국학
국학(國學)은 유교 진흥책의 하나로서 설립된 신라의 교육 기관이다.[1] 신라의 지배 체제가 삼국통일 이후 성숙해짐에 따라 유교 이념의 교육과 관리 양성의 필요성으로 설립되었다.
국학 國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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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 | 682년 |
국가 | 신라 |
관할관청 | 예부 |
설치
편집신문대왕 2년(682년)에 설치되어 성덕대왕 16년(717년) 당으로부터 공자와 그 제자들의 화상을 들여와 국학에 안치하였으며, 경덕대왕 6년(747년) 국학에 제업박사(諸業博士)와 조교(助敎)를 두었고, 국학의 이름을 태학감(太學監)으로 고쳤다. 혜공대왕 12년(776년)에 다시 국학으로 환원하였다.
교육 내용
편집교육 내용은 4과(四科)로 나누어 경의(經義, 경서) 즉, 《논어(論語)》, 《효경(孝經)》, 《서경(書經, 상서尙書)》, 《시경(詩經, 모시毛詩)》, 《주역(周易, 역경易經)》, 《춘추(春秋, 좌전左傳, 곡량전穀梁傳, 공양전公羊傳)[2]》, 《예기(禮記)》, 《문선(文選)》, 《산학(算學, 수학數學)》 등을 가르쳤다. 이중 논어, 효경을 필수 과목[3]으로 하였다. 그 외 5경[4]과 문선, 수학을 학습시켰다.
학생
편집학생은 15~30세의 귀족 자제[5]로서 대사(大舍[6]) 이하 무위(無位)까지이다. 학생 중 능력이 부족하면 퇴학시키고, 재질이 성취할만 하되 미숙한 자는 9년을 넘어서도 재학하게 된다. 졸업자는 대나마(大奈麻), 나마(奈麻)의 관위를 주었다. 교수는 박사, 조교 등이 있었다.
결과
편집결과적으론 골품제의 제약과 진골귀족들의 관리 독점에 의해 큰 실효는 거두지 못하였다. 하지만 국학으로 인해 학문과 유학을 신라 사회에 널리 보급시켜 무치주의의 신라 사회를 문치주의로 바꾸는 계기가 되어 고려 시대에 유교를 확립시키고 과거 제도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