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와왕

부여의 왕

금와왕(金蛙王, 기원전 89년?~기원전 24년, 재위: 기원전 60년~기원전 24년)은 부여의 왕으로 성은 해(解), 이름은 금와(金蛙)이다. 금와(金蛙)는 금빛이 나는 개구리라는 의미이다. 금와는 해부루의 아들이다.

금와왕
金蛙王
1854년《조선정벌기(絵本 朝鮮征伐記)》에 나온 금와왕 삽화.
1854년《조선정벌기(絵本 朝鮮征伐記)》에 나온 금와왕 삽화.
동부여의 2대 국왕
재위 기원전 60년~기원전 24년
대관식 금와왕(金蛙王)
전임 해부루왕(解夫婁王)
후임 대소왕(帶素王)
부왕 해부루왕(解夫婁王)
이름
해금와(解金蛙)
이칭 미상
별호 미상
묘호 금와왕(金蛙王)
시호 금와(金蛙)
연호 미상
신상정보
출생일 기원전 89년?
출생지 동부여(東夫餘)
사망일 기원전 24년
사망지 동부여(東夫餘)
왕조 동부여(東夫餘)
가문 미상
부친 해부루왕(解夫婁王)
모친 미상
배우자 미상
자녀 대소왕(帶素王) 갈사왕(曷思王) 동명성왕 (東明聖王)
종교 미상
묘소 미상

생애 편집

부여왕 해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어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하루는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렀는데, 그 곳에 있던 큰 바위를 보고 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바위를 치워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해부루가 기뻐하여 "이는 하늘이 내게 준 아이로다."라 말하며 아들로 삼으니, 이가 곧 금와이다.[1][2]

해부루의 뒤를 이어 부여의 왕이 된 금와는, 태백산(太白山) 남쪽의 우발수(優渤水)에서 사냥을 하다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나 유화(柳花)를 방에 가두었더니 내리쬐는 햇볕을 받고 잉태하여 알을 낳았는데,금와왕은 그것을 보고 알을 버리게 하였는데 짐승이 알을 밟지 않고 도리어 품어주는 등 기이한 일이 생기자 유화부인에게 그 알을 돌려주었다.그리고 그 알에서 뒤에 고구려의 시조가 된 추모왕(鄒牟王)이 나왔다. 여기서 ‘추모’를 ‘주몽(朱蒙)’이라는 하는 것은 ‘어리석다라는 뜻’으로 중국이 낮춰 부른 이름이라는 견해가 있다.[3][4]

추모가 장성하자 대소(帶素)를 비롯한 일곱 왕자들이 그를 시기하여 처치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금와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추모에게 말을 기르는 임무를 맡겼다. 이후 추모가 대소의 음모를 피해 도피하자 추격대를 파견하였으나 잡지는 못하였다. 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한 이후인 기원전 24년 유화가 죽자 태후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얼마후 금와가 죽고 대소왕이 뒤를 이었다.

금개구리 설화 편집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전하기를 어느 날 곤연(鯤淵)이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타고 있던 말이 큰 돌 앞에 서서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히 여겨 돌을 굴려 보니 그 곳에서 금빛을 두른 개구리 형상의 아이가 나왔다. 해부루 왕은 이를 하늘이 내린 축복이라 여기고 그 아이의 이름을 금와라 짓고 고이 길렀다. 이후 금와는 자라서 태자가 되었고, 해부루가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설화에서 나오는 곤연이라는 지명은 동부여가 멸망한 이후에는 고구려가 관리하는 졸본의 땅에 있었으며 금와의 일족들은 곤연의 호족(豪族)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가계 편집

  • 조부 : 해모수왕(解慕漱王)
  • 조모 : ?
    • 부왕 : 해부루왕(解夫婁王)
    • 모후 : ?
      • 국왕 : 금와왕(金蛙王, 기원전 89년?~기원전 24년, 재위:기원전 60년경~기원전 24년경)
      • 왕비 : ?
        • 장남 : 대소왕(帶素王, 기원전 73년?~서기 22년, 재위:기원전 24년~서기 22년) 동부여 마지막 왕
        • 육남 : 갈사왕(曷思王, 생몰년 미상, 재위:22년~?) 갈사부여의 왕
        • 증손녀 : 해씨 부인
      • 후비 : 유화(柳花, ? ~기원전24년)
        • 아들 : 동명성왕(東明聖王, 기원전 58년~기원전 19년 재위:기원전 37년~기원전 19년)

금와왕이 등장한 작품 편집

각주 편집

  1. 김부식 (1145) “扶餘王解夫婁老無子 祭山川求嗣 其所御馬至鯤淵 見大石 相對流涙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 金色蛙形  · 王喜曰 此乃天賚我令胤乎 乃收而養之 名曰金蛙” (부여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었으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렀는데, 그 곳에 있던 큰 바위를 보고 말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왕이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왕이 바위를 굴려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개구리개구리는 또는 달팽이라고도 한다.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여 “이는 하늘이 내게 준 아이로다.”라고 말하며 아들로 삼으니, 이가 곧 금와(금빛이 나는 개구리)이다.)
  2. 일연 (1281) 북부여조, “夫婁老無子。一日祭山川求嗣。所乘馬至鯤淵。見大石相對俠流。王怪之。使人轉其石。有小兒金色蛙形。王喜曰。此乃天賚我令胤乎。乃收而養之。名曰金蛙。”(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었다. 하루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후사를 구하였다. 〔부루가〕 탄 말이 곤연에 이르러, 큰 돌을 마주하고 의기롭게 우는 것을 보았다. 왕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리게 하니,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금빛 개구리 모양이었다. 왕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하늘은 나에게 내려준 자식이로구나!” 하였다. 이에 맡아서 그를 키웠다. 이름하여 금와라 부르고...)
  3. "주몽(朱蒙)은 추모(鄒牟)의 창씨개명" 연합뉴스(2007.03.12) 기사 참조
  4. 고구려 연구의 권위자로 알려진 서길수 박사는 발표문에서 주몽(朱蒙)은 추모(鄒牟)의 중국식 표기일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부정적인 글자를 빌려 써 추모를 비하했다고 지적했다. 414년에 세워진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와 5세기 중엽의 고구려 모두루무덤에는 고구려의 시조를 추모로 표기했지만 6세기 중엽 이후 편찬된 위서(魏書)ㆍ주서(周書)ㆍ북사(北史)ㆍ수서(隋書) 등에서는 주몽이라고 표기하고 있다는 것, 서 박사는 "'주(朱)'자는 '난쟁이(侏)'라는 뜻이 있고 '몽(蒙)'자는 '속이다'ㆍ'어리석다'는 뜻으로 고구려의 시조를 '어리석은 난쟁이'로 폄하한 작명(作名)"이라며 "일본의 창씨개명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참고 문헌 편집

전임
해부루왕
제2대 동부여
기원전 60년경 ~ 기원전 24년
후임
대소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