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안현주

길안현주(吉安縣主, 1457년 7월 ~ 1519년 10월)는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세종소헌왕후의 8남인 영응대군 이염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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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안현주
吉安縣主
지위
조선의 왕족
이름
억천(億千)
신상정보
출생일 1457년 7월
사망일 1519년 10월 (62세)
부친 영응대군
모친 대방부부인 송씨
배우자 구수영
자녀 5남 5녀

생애편집

1457년(세조 3년) 7월, 세종의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永膺大君)과 어머니 대방부부인 송씨(帶方府夫人 宋氏)의 딸로 태어났다. 이름은 억천(億千)이며, 영응대군과 대방부부인의 자녀들 중 유일하게 생존하였다. 영응대군과 세조의 우애가 돈독하여, 어려서부터 세조가 총애하였으며 많은 물품을 하사하였다.[1]

1463년(세조 9년), 대군(大君)의 딸에게 주어지는 '현주(縣主)'의 작호를 받아 길안현주(吉安縣主)에 봉해졌다. 조선 초기에는 대군의 적녀에게도 현주의 작호를 주었으나, 《경국대전》 반포 이후 왕세자의 서녀에게만 부여하였다.

1467년(세조 13년) 1월, 구치홍(具致洪)의 아들 구수영(具壽永)과 혼인이 결정되었으나, 불과 며칠 후에 아버지 영응대군이 병으로 죽어 가례가 연기되었다.[2]

1469년(성종 1년), 구수영과 혼인하였으며 슬하에 5남 5녀를 두었다.

길안현주의 자녀들은 각각 왕실과 중첩된 혼인을 맺었는데, 연산군 때에 정쟁과 사화에 휘말리는 불운을 겪었다.

첫째 사위인 임희재1504년(연산군 10년) 능지처참 되었으며[3], 셋째 사위인 안양군갑자사화에 휘말려 사사되고 가산은 모두 적몰되었다.[4] 넷째 아들인 구문경은 연산군의 딸 휘신공주와 혼인하였는데, 중종반정 이후 휘신공주가 폐서인 되자, 구문경 또한 부마의 작위를 박탈당하였다. 구문경의 아버지 구수영의 청으로, 구문경과 휘신공주는 이혼하였는데[5], 이후 중종은 유순의 건의에 따라 구문경과 휘신공주를 재결합시켰다.[6]

길안현주의 후손들 또한 왕실의 인척이 되었는데, 증손자인 구사안과 손자인 구한은 각각 중종의 딸인 효순공주, 숙정옹주와 혼인하였다. 구사안의 동생인 구사맹의 딸 계운궁 구씨는 선조의 5남 정원군(원종)과 혼인하여 인조(仁祖)를 낳았으며, 후에 인헌왕후로 추존되었다.

1519년(중종 14년) 10월 사망하였다. 12월 양주 팔곡산에 안장하였다.[1]

가족 관계편집

직계 조상편집


배우자와 자녀편집

각주편집

  1. 《길안현주 이씨 묘지명》
  2. 세조실록》 41권, 세조 13년(1467년 명 성화(成化) 3년) 1월 29일(병신)
    영응대군 이염의 사위를 정하고 입시한 제신에게 종친의 도리에 대해 말하다
  3. 연산군일기》 56권, 연산 10년(1504년 명 홍치(弘治) 17년) 10월 28일 (을유)
    승지 권균 등에게 명하여 임희재의 능지 처사 등을 감독하게 하다
  4. 연산군일기》 58권, 연산 11년(1505년 명 홍치(弘治) 18년) 6월 15일 (무진)
    의금부 낭청을 보내어 이항 · 이봉을 사사하게 하다
  5.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1506년 명 정덕(正德) 1년) 9월 25일 (신축)
    능천 부원군 구수영이 폐왕과 절혼하기를 원하니 윤허하다
  6. 《중종실록》 7권, 중종 3년(1508년 명 정덕(正德) 3년) 10월 7일 (신미)
    유순 등에 따라 구문경 부부를 결합시키고 문정부정 상과 노종도 결합시키다
  7. 연산군일기》 56권, 연산 10년(1504년 명 홍치(弘治) 17년) 12월 14일 (경오)
    공주의 뜻을 보아 구순복을 특별히 놓아주다
    어서를 내려 이르기를,

    "구순복(具順福)을 특별히 놓아준 것은 공주의 뜻을 보아서이다. 놓아줌이 너무 빠른 듯하나, 특은(特恩)을 베푼 것이요, 간사한 자가 이미 형을 받았고 흉계가 그 처에게 있는 것도 아니며, 역사시킨 날은 비록 적다 할지라도 경계받음이 얕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순복은 임희재(任熙載)의 처인데 능양위(綾陽尉) 구문경(具文璟)의 누이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