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조선)

조선의 제9대 임금 (1457–1495)
(조선 성종에서 넘어옴)

성종(成宗, 1457년 8월 28일(음력 7월 30일) ~ 1495년 1월 29일(1494년 음력 12월 24일))은 조선의 제9대 국왕(재위 : 1469년 음력 11월 28일 ~ 1494년 음력 12월 24일)이다. 본명은 혈(娎), 묘호는 성종(成宗)이며 시호는 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이다.

성종
成宗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인 선릉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인 선릉
제9대 조선 국왕
재위 1469년 11월 28일 ~ 1494년 12월 24일 (음력)
즉위식 경복궁 근정문
전임 예종
후임 연산군
이름
이혈(李娎)
묘호 성종(成宗)
시호 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
(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
능호 선릉(宣陵)
서울특별시 강남구 선릉로100길 1
작호 잘산군(乽山君) · 자을산군(者乙山君)
신상정보
출생일 1457년 7월 30일(1457-07-30) (음력)
출생지 조선 한성부 세자궁
사망일 1494년 12월 24일(1494-12-24) (37세) (음력)
사망지 조선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부친 덕종
모친 소혜왕후 한씨
배우자 공혜왕후 한씨 · 폐비 윤씨 · 정현왕후 윤씨
자녀 16남 12녀 (19남 15녀)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버지 의경세자가 요절하자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되었기에, 조부 세조 사후에 숙부인 예종이 즉위하였다. 숙부 예종이 즉위 14개월만에 죽었을 때 예종의 적장자 제안대군과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을 뒤로하고 즉위하였는데, 이는 할머니인 정희왕후훈구파 대신들의 추대에 의한 것으로, 서열을 뛰어넘은 즉위과정으로 인해 왕이 된후 정치적인 입지가 매우 좁았다.[1]

정희왕후의 섭정 7년동안 저자세로 일관하며 때를 기다리다가,[2] 1476년 친정이 시작되자 태종세조에 의해 숙청된 사림파를 중용한후 원상제[3][4]를 폐지하며 훈구파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억불승유 정책을 추진하며, 경연을 되살리고[5] 1485년에 경국대전을 완성후 반포하여 조선 유교정치의 틀을 닦는 업적을 세웠다.[6] 이후 성리학적 통치 규범을 지키고 왕도정치를 구현하려 노력하였다. 1479년에 계비 윤씨를 폐출시킨 사건은 훗날 연산군에 의한 갑자사화(1504)의 원인이 되는 불행사가 되고 말았다.[7] 3명의 왕비와 8명의 후궁을 통해 16남 12녀를 두었다.[8]

생애 편집

탄생과 성장 편집

 
성종대왕 태실비 (창경궁 경내에 위치)

성종은 1457년 음력 7월 30일,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세자빈 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경신(慶新)이고 휘는 (娎)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일찍부터 행동거지가 매우 침착하였다고 전해진다. 세조 때 궁궐에 내려친 벼락에 맞아 한 환관이 즉사하였던 일이 있었는데, 그의 형 월산대군이나 다른 내관들은 이 같은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하였으나, 그는 태연히 서 있었다고 한다. 이 일로 그는 세조로부터 태조와 세종을 닮아 기상과 학식이 뛰어날 것이라는 칭찬과 귀여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의경세자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그는 어머니 세자빈 한씨와 함께 궁밖으로 나가게 된다. 조부 세조는 특별히 한씨를 수빈으로 봉하고, 궁궐에 살아도 좋다고 하였으나 한씨는 사저로 물러 앉는다. 어린 나이에도 곤궁한 생활에 대한 불평불만이 없었다 하며, 자신의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한명회신숙주 등은 이점에 착안하여 월산대군 대신 그를 선택하게 된다. 또한 한명회의 딸과 가례를 올렸고, 신숙주의 조카딸이 그의 계비인 폐비 윤씨인 점이 왕위 계승에도 보다 유리하게 작용하게 된다.

잠저 시절 편집

1461년(세조 6년) 5살이 되던 해에 자을산군(者乙山君)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수빈 한씨는 꾸준히 대궐에 출입하면서 한명회, 신숙주 등과 교류하였고, 한명회의 딸 중의 한명을 자산군과 결혼시킨다.

1468년 세조가 죽자 그의 첫번째 아들이었던 의경세자의 동생인 해양대군이 예종으로 즉위하면서 잘산군(乽山君)에 봉해졌다. 1469년 예종은 즉위한 지 14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당시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은 3살이었고, 잘산군의 친형인 월산군은 병환 중이었기 때문에 정희왕후의 명령에 따라 1469년(예종 1년) 음력 11월 28일에 경복궁에서 즉위하였다. 성종의 즉위 배경에는 정희왕후의 의지 외에 그의 장인이었던 한명회의 생각과 어린 그를 즉위시킴으로써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신숙주 등의 훈신들의 이해관계가 두루 작용한 결과이기도 했다.

성종은 가뭄이 들면 자주 수반(水飯)을 들었다.[9] 물에 밥을 말아먹는 수반은 자연재해를 극복하고자 하는 자신의 도덕성을 과시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속이 타는 체질의 특성이 드러난 것이다. 즉위 직후 원상 김질이 “비위는 찬 것을 싫어하므로 수반이 비위를 상할까 염려합니다”라며 걱정하자 “경의 말과 같다면 매양 건식을 올려야 하겠는가”라고 성질 급하게 반박했다. 수반을 자주 먹는 습관은 설사로 이어졌다.[9]

즉위 이후 편집

수렴 청정 기간 편집

예종에게 아들 제안대군 현이 있었음에도, 그는 예종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하였다. 이후 조선의 열성계서도, 왕통에서는 성종은 예종의 사자로 나타나고, 의경세자는 생부, 덕종 추존 이후에도 그의 생부로 표기된다.

반발세력을 무마하고자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월산대군제안대군을 군에서 대군으로 책봉하고 이들을 좌리공신에 임명하였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즉위 초반에는 할머니인 자성대왕대비 윤씨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당시 유력한 국왕 후보들을 모두 제치고 한명회와 정희왕후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올랐았던 만큼 섭정을 받은 7년 동안 국정의 모든 결정권은 신숙주, 한명회 등의 원로대신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수렴청정을 끝낸 1476년(성종 7년)부터는 원로대신들이 국정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는 원상 제도를 폐지하여 결재권을 되찾았다. 친정을 시작한 이후 그는 할아버지 세조가 권신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길재-김숙자 등의 문인들을 적극 등용한 것을 참작, 김종직의 문하생들을 새로 대거 등용한다.

생부 의경세자 추존 편집

성종은 작은 아버지인 예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즉위하였는데, 1475년을미년(乙未年)에 회간대왕(의경세자, 성종의 생부)의 신주를 종묘에 올리는 것을 두고 조정에서 다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10][11]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정인지(鄭麟趾)를 비롯한 대신들은 "의경세자의 신주를 종묘에 올리게 된다면 왕실의 계통(대종)에서 아버지가 두 분인 것과 같고, 예경(禮經)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를 이유로 들어 반대하였으나,[10][11], 대왕대비 윤씨가 나서 "의경세자는 명(命)을 받아 왕세자(王世子)가 되고, 명을 받아 왕(王)이 되었으며, 또 원래는 대종(大宗)이고, 예종이 비록 명을 받아 왕이 되었더라도 먼저 신하의 예를 의경세자에게 하였거늘, 하물며 의경세자는 예종의 친형이니, 예종의 위에 둔들 무엇이 해롭겠는가?"하여 되물었으며,[12] 배맹달(裵孟達), 임수겸(林守謙), 홍경손(洪敬孫), 권윤(權綸)등의 대신들도 대왕대비 윤씨의 의견에 동조하여 "의경세자는 세조조(世祖朝)에 있어서 이미 세자(世子)로 봉(封)하였으므로 안으로는 계승(繼承)한 바가 있고, 명나라 황제가 특히 고명(誥命)을 내려 주었은즉 위로도 주품(奏稟)한 바가 있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의경세자의 친자(親子)로서 대통을 계승하셨으니, 의경세자의 신주를 종묘에 올리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거들었다.[12] 이후 조정의 논의가 계속되었으나 타협점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가자 성종은 확고한 의지로 의경세자(덕종)의 신주를 종묘에 올리라는 절차 준비 명을 예조에 내렸고 반대파 대신들의 상소가 잇따랐다.[13][14] 결국 1476년 1월 9일에 의경세자(덕종)의 신주를 받들어 종묘에 안치함으로써 성종이 예종의 법자가 아닌, 덕종(의경세자)의 친자로서 왕위를 계승함을 확인하였다.[15]

폐비 윤씨 폐출과 사사 편집

첫 왕비였던 공혜왕후가 18세의 나이에 요절하자 자신의 후궁 중 숙의 윤씨를 왕비로 간택한다. 폐비 윤씨공혜왕후 사후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폐비는 성종이 다른 후궁을 찾자 공공연히 질투심을 드러내고 독약인 비상이 발각되는 등의 문제를 일으켰다. 성종의 인수대비는 분노하여 폐비 윤씨의 투기를 계속 지적하였고, 원로 훈신들은 폐비 윤씨를 계속 탄핵하였다. 1479년 윤씨는 왕비에서 폐출, 사저로 내쫓겼다. 그 뒤 양사의 언관들이 폐비를 사사해야 된다는 여론을 조성하자 그는 원자의 생모임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양사의 거듭된 탄핵을 이기지 못하고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린다. 그 뒤 왕비 간택 건의가 있었으나 이를 뿌리치고 다른 후궁인 숙의 윤씨[16]를 왕비로 삼았는데 정현왕후중종의 생모가 된다.

친정과 사림파 등용 편집

임사홍, 유자광 등의 권신들을 축출하는 한편, 성균관을 비롯한 각 도의 향학에 전결과 서적을 주어 교육과 문화의 진흥에 힘썼으며, 김종직 등 사림파를 과감히 등용함으로써 신진세력을 형성시키고 정치적 기반을 만들었다. 이는 후대 선조 시기 사림정치의 완성으로 나타난다.

성종의 치세는 ‘문화의 황금기’라고 불렸을 만큼 세종세조가 이룩해 놓은 치적들을 바탕으로 빛나는 문화 정책을 펴 나간 시기였다. 1474년(성종 5년)에는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반포했으며 1492년에는 경국대전을 보충한 《대전속록》과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동문선(東文選)》 등 다양한 서적을 편찬·간행했다. 세조 때 폐지된 집현전과 비슷한 역할을 맡은 홍문관을 설치하는 한편, 문신 중에서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인물을 골라 집에서 독서하게 하는 호당제도를 실시하는 등 문화 발전에 이바지했다. 또한 승려들을 엄하게 통제하고 대부분의 사찰을 폐쇄하는 등 숭유억불 정책을 철저하게 실천했다.

대외적으로는 1479년(성종 10년) 윤필상(尹弼商)으로 하여금 압록강 주변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1491년(성종 22년) 허종(許琮)을 파견하여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 소굴을 소탕하고, 이듬해에는 이계동(李季同)을 함길도 일대에 파견하여 여진족의 침략을 대비하는 등 북방 방비에 힘썼다.

최후 편집

 
서울 선릉과 정릉 선릉 동측무석인 측면. 국립문화재연구원 촬영.

성종은 동물을 좋아하였는데 궁궐 후원에 사슴과 강아지, 고양이 등을 데려다가 기르기도 했다.[17] 성종은 1494년 가을부터 폐결핵천식 등의 폐병, 기허증, 서증(暑症, 일종의 더위 먹은 병), 두통 등으로 병석에 누웠고, 등창까지 생겼다. 병석에 누운 상태에서 배꼽 밑에 갑자기 종기가 생겼고 이게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승하 직전 대사면령을 내리긴 했지만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성종은 1495년 양력 1월 20일 (1494년 음력 12월 24일)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폐결핵천식 등의 폐병 합병증과 두통, 기허증, 서증, 등창, 피부종기 등의 후유증으로 39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능은 선릉(宣陵)이며, 현재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2계비 정현왕후와 함께 안장되어 있다.

사후 편집

묘호는 조선의 모든 법제와 정비를 완성시켰다는 뜻을 담은 성종(成宗)으로 정해졌는데, 빈청에서는 성종의 덕을 표현하려면 인종(仁宗)으로 정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주장했으나 결국 원래대로 갔으며, '인종(仁宗)'이란 묘호는 그의 차남 중종과 며느리 장경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손자 인종이 받게 된다.

그는 폐비 윤씨 사사 사건 문제를 자신의 사후 100년간 언급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러나 이 유언은 지켜지지 않고 임사홍에 의해 거론돼 친어머니의 비참한 죽음을 안 연산군이 분노하여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간 이세좌 등을 죽이면서 페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된 신하들의 대량 학살로 이어졌다. 사림파에서 이때의 성종의 유언을 지적하며 폐비 윤씨의 추숭을 적극 반대한 것은 연산군의 폭정의 원인의 하나가 된다.

가족 관계 편집

   조선 제9대 국왕       성종 成宗    출생 사망
1457년 8월 28일 (음력 7월 30일)
  조선 한성부 세자궁
1495년 1월 29일 (1494년 음력 12월 24일) (37세)
  조선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성종의 직계 조상 편집

 
 
 
 
 
 
 
 
 
 
 
 
 
 
 
 
 
 
세종
 
 
 
 
 
 
 
 
 
 
 
세조
 
 
 
 
 
 
 
 
 
 
 
 
 
 
소헌왕후 심씨
 
 
 
 
 
 
 
 
 
 
 
아버지 덕종
 
 
 
 
 
 
 
 
 
 
 
 
 
 
 
 
 
파평부원군 윤번
 
 
 
 
 
 
 
 
 
 
 
정희왕후 윤씨
 
 
 
 
 
 
 
 
 
 
 
 
 
 
흥녕부대부인 인천 이씨
 
 
 
 
 
 
 
 
 
 
 
  성종  
 
 
 
 
 
 
 
 
 
 
 
 
 
 
 
 
 
 
 
 
한영정
 
 
 
 
 
 
 
 
 
 
 
서원부원군 한확
 
 
 
 
 
 
 
 
 
 
 
 
 
 
의성 김씨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
 
 
 
 
 
 
 
 
 
 
 
 
 
 
 
 
 
홍여방
 
 
 
 
 
 
 
 
 
 
 
남양부부인 남양 홍씨
 
 
 
 
 
 
 
 
 
 
 
 
 
 
동래 정씨
 
 
 
 
 
 
 
 
 
 

부모 편집

본관 생몰년 부모 비고
  부   덕종대왕 德宗大王
의경세자 懿敬世子
전주 1438년 - 1457년 세조대왕
世祖大王
정희왕후 윤씨
貞熹王后 尹氏
   추존 국왕   
  소혜왕후 한씨 昭惠王后 韓氏  
인수대왕대비 仁粹大王大妃
인수왕대비 仁粹王大妃
청주 1437년 - 1504년 서원부원군 한확
西原府院君 韓確
남양부부인 남양 홍씨
南陽府夫人 南陽 洪氏


왕비 편집

시호 본관 이름 생몰년 부모 비고
정비 공혜왕후 한씨
恭惠王后 韓氏
청주 송이 松伊 1456년 - 1474년 상당부원군 한명회
上黨府院君 韓明澮
황려부부인 여흥 민씨
黃驪府夫人 驪興 閔氏
예종장순왕후의 동생
제1계비 폐비 윤씨
廢妃 尹氏
    제헌왕후 齊獻王后[18][19]
함안 1455년 - 1482년 윤기견 尹起畎
고령 신씨 高靈 申氏
  • 성종 10년(1479년) 폐위[20]
  • 성종 13년(1482년) 사사됨[21]
제2계비 정현왕후 윤씨
貞顯王后 尹氏
자순왕대비 慈順王大妃
파평     창년 昌年[22] 1462년 - 1530년 영원부원군 윤호
鈴原府院君 尹壕
연안부부인 담양 전씨
延安府夫人 潭陽 田氏
 

후궁 편집

작호 본관 이름 생몰년 부모 비고
귀인 귀인 엄씨 貴人 嚴氏 영월 은소사 銀召史[23]   ?   - 1504년 엄산수 嚴山壽
남양 홍씨 南陽 洪氏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사망[24]
귀인 정씨 貴人 鄭氏 초계 금이 金伊[23]   ?   - 1504년 정인석 鄭仁石
귀인 권씨 貴人 權氏 안동 1471년 - 1500년 권수 權壽
한씨 韓氏
귀인 남씨 貴人 南氏 의령 생몰년 미상 남흔 南炘
   전주 이씨 全州 李氏[25]
소의 소의 이씨 昭儀 李氏 미상
숙의 숙의 홍씨 淑儀 洪氏 남양 1457년 - 1510년 홍일동 洪逸童
남평 문씨 南平 文氏
숙의 하씨 淑儀 河氏 진주 생몰년 미상
숙의 정씨 淑儀 鄭氏 미상
숙용 숙용 심씨 淑容 沈氏 청송 1465년 - 1515년 심말동 沈末同[26]
성주 이씨 星州 李氏
숙용 권씨 淑容 權氏 미상 생몰년 미상
숙원 숙원 김씨 淑媛 金氏
명빈 김씨 明嬪 金氏
숙원 윤씨 淑媛 尹氏   ?   - 1533년[27]


왕자 편집

작호 이름 생몰년 생모 배우자 비고
- 왕자[28] 효신 孝信 1474년 - 1475년 미상
1 연산군 燕山君 융 㦕 1476년-1506년 폐비 윤씨 폐비 신씨 廢妃 慎氏 제10대 국왕
중종반정으로 폐위됨
- 대군[29]   ?   - 1479년
2 계성군 桂城君 순 恂 1480년 - 1504년 숙의 하씨 안성군부인 원씨 安城郡夫人 元氏
3 안양군 安陽君 1480년-1505년 귀인 정씨     면천군부인 구씨 沔川郡夫人 具氏[30] 연산군 11년(1505년) 사사됨[31]
4 완원군 完原君 忄+遂 1481년-1509년 숙의 홍씨 면천군부인 최씨 沔川郡夫人 崔氏
정선군부인 허씨 旌善郡夫人 許氏
 
5 회산군 檜山君 염 恬 1482년-1512년 영원군부인 안씨 寧原郡夫人 安氏
6 봉안군 鳳安君 봉 㦀 1482년-1505년 귀인 정씨 의춘군부인 조씨 宜春郡夫人 趙氏 연산군 11년(1505년) 사사됨[31]
7 견성군 甄城君 돈 惇 1482년-1507년 숙의 홍씨 영양군부인 신씨 永陽郡夫人 申氏 중종 2년(1507년) 사사됨[32]
- 왕자[33] 견석 堅石 1486년 -   ?   미상
8 중종대왕 中宗大王
진성대군 晉城大君
역 懌 1488년-1544년 정현왕후 윤씨 단경왕후 신씨 端敬王后 慎氏
장경왕후 윤씨 章敬王后 尹氏
문정왕후 윤씨 文定王后 尹氏
제11대 국왕
9 익양군 益陽君 회 懷 1488년-1552년 숙의 홍씨 순천군부인 정씨 順川郡夫人 鄭氏  
10 이성군 利城君 관 慣 1489년-1553년 숙용 심씨 곤산군부인 문씨 昆山郡夫人 文氏
풍산군부인 권씨 豊山郡夫人 權氏
 
11 경명군 景明君 침 忱 1489년-1526년 숙의 홍씨 강양군부인 윤씨 江陽郡夫人 尹氏  
12 전성군 全城君 1490년-1505년 귀인 권씨 단양군부인 권씨 丹陽郡夫人 權氏
13 무산군 茂山君 1490년-1525년 숙원 김씨 영양군부인 신씨 永陽郡夫人 申氏
14 영산군 寧山郡 전 恮 1490년-1538년 숙용 심씨 금릉군부인 심씨 金陵郡夫人 沈氏
교성군부인 정씨 交城郡夫人 鄭氏
15 운천군 雲川君  인 忄寅 1491년-1524년 숙의 홍씨     학성군부인 권씨 鶴城郡夫人 權氏[34]
16 양원군 楊原君 1492년-1551년 숙의 홍씨 문천군부인 조씨 文川郡夫人 趙氏
양근군부인 류씨 楊根郡夫人 柳氏

왕녀 편집

작호 이름[35] 생몰년 생모 배우자 비고
1 순숙공주 順淑公主
신숙공주 愼淑公主
 1478년 - 1488년[36] 정현왕후 윤씨
2 혜숙옹주 惠淑翁主 수란 秀蘭
     壽蘭
1478년 -     ?      숙의 홍씨 고원위 高原尉 신항 申沆[37]
- 숙신옹주 淑愼翁主    ?   - 1487년[38]
 1478년 - 1489년[39]
미상 상반된 기록이 존재
3 휘숙옹주 徽淑翁主
혜신옹주 惠愼翁主
생몰년 미상 숙원 김씨 풍원위 豊原尉 임숭재 任崇載
4 공신옹주 恭愼翁主  1481년 - 1549년[40] 귀인 엄씨     청녕위 淸寧尉 한경침 韓景琛[41]
5 경순옹주 慶順翁主 옥환 玉環 1482년 -     ?      숙용 심씨     의성위 宜城尉 남치원 南致元[42]
6 경숙옹주 敬淑翁主     합환 合歡[43] 1483년 -     ?      숙원 김씨 여천위 驪川尉 민자방 閔子芳 선조의 후궁 정빈 민씨의 증조모
- 공주[44][45] 1485년 - 1486년[46] 정현왕후 윤씨
7 정순옹주 靜順翁主     복란 福蘭[47] 1486년 -     ?      숙의 홍씨     봉성위 奉城尉 정원준 鄭元俊[48]
8 숙혜옹주 淑惠翁主 벽환 碧環    1486년 - 1525년[49] 숙용 심씨 한천위 漢川尉 조무강 趙無彊
9 경휘옹주 慶徽翁主     정복 貞福[50]      ?   - 1525년[51] 숙용 권씨 영원위 鈴原尉 윤내 尹鼐[52]
10 휘정옹주 徽靜翁主     복▨ 福▨[53] 생몰년 미상 숙원 김씨     의천위 宜川尉 남섭원 南燮元[54]
11 정혜옹주 靜惠翁主     승복 承福[55]  1490년 - 1507년 귀인 정씨 청평위 淸平尉 한기 韓紀
- 공주[44][45] 1490년 - 1490년 정현왕후 윤씨
12 정숙옹주 靜淑翁主 여란 如蘭  1493년 - 1573년[56] 숙의 홍씨 영평위 鈴平尉 윤섭 尹燮[57]

성종이 등장하는 작품 편집

기타 편집

서자 차별의 강화 편집

성종은 태종때 내려진 적서 차별과 서자의 관직 제한을 구체적인 조항으로 명시하여 반포하고, 이를 경국대전에 수록하게 한다. 이때부터 서자(庶子)들은 본격적으로 차별대우를 받게 된다.

1471년(성종 2년)에 반포, 실시된 경국대전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다.[58] 이는 사림파 학자들의 건의를 수용한 성종의 특명으로 삽입한 것이다.

실행(失行)한 부녀 및 재가한 여자의 자손은 동서의 관직에 임명하지 말라 문무관 2품 이상 관리의 양첩 자손[59]에게는 정3품으로 한정하고 천첩 자손에게는 정5품으로 한정한다. ...(이하 중략)...
7품 이하 관리부터 관직이 없는 자의 양첩의 자손에게는 정5품으로 한정하고
천첩 자손 및 그밖에 천인으로 양민이 된 자는 정7품에 한정한다. ...(이하 생략)...
재가(재혼)하거나 실행한 부녀의 아들 및 손자, 서얼의 자손은 문과를 응시하지 못하게 하라
— 출처 : 이이화, 한국의 파벌 (어문각, 1983) 225페이지

이후 김종직, 김굉필 등은 한때 서자라는 이유로 차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의견을 피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폐비 윤씨 문제 편집

성종은 유지(유언)를 내려 자신의 사후 100년 동안 폐비 윤씨를 사사한 것을 공론하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아들 세자 융은 성종의 유지를 앞세운 사림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유지를 깨고,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을 재조사한다.

각주 편집

  1.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1998년 p263 ~ 272
  2.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1998년 p272
  3. [네이버 지식백과] 원상제 [院相制]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조선시대 어린 임금이 즉위할 경우 재상들이 임금을 보좌하여 정사를 보았던 제도였다. 세조가 죽고 19살의 예종이 즉위하자 한명회, 신숙주 등의 재상들이 어린 임금을 도와 정사를 돌보게하면서 원상제를 채택하였고 성종 때에도 원상제를 시행하였다. 그리고 명종과 선조 때에도 섭정을 하면서 원상제가 시행되었다. 원상제는 임금의 권한을 재상들과 함께 공유하는 것으로써 왕권이 약화되고 신(臣)권이 강화된 것을 의미한다.
  4.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지식하우스 1996년 p160
  5.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1998년 p280
  6.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1998년 p296
  7.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지식하우스 1996년 p179
  8.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1998년 p296, 299
  9. 주색 밝힌 ‘밤의 황제’ 서증(暑症) 시달리다 단명 신동아 2014년 1월호
  10. 성종 59권, 6년(1475 을미 / 명 성화(成化) 11년) 9월 16일(임술) 1번째기사
  11. 성종 59권, 6년(1475 을미 / 명 성화(成化) 11년) 9월 16일(임술) 2번째기사
  12. 성종 59권, 6년(1475 을미 / 명 성화(成化) 11년) 9월 19일(을축) 2번째기사
  13. 성종 59권, 6년(1475 을미 / 명 성화(成化) 11년) 9월 21일(정묘) 5번째기사
  14. 성종 59권, 6년(1475 을미 / 명 성화(成化) 11년) 9월 21일(정묘) 2번째기사
  15. 성종 63권, 7년(1476 병신 / 명 성화(成化) 12년) 1월 9일(갑인) 1번째기사
  16. 윤호의 딸
  17. 이중 두 마리의 사슴은 연산군에 의해 사살된다.
  18. 연산군일기》 52권, 연산 10년(1504년 명 홍치(弘治) 17년) 3월 25일 (병술) 폐비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증하는 교서를 내리다
  19. 중종반정후 삭탈
  20. 성종실록》 105권, 성종 10년(1479년 명 성화(成化) 15년) 6월 2일 (정해) 중궁 폐출의 교서를 내리다
  21. 성종실록》 144권, 성종 13년(1482년 명 성화(成化) 18년) 8월 16일 (임자) 이세좌에게 명하여 윤씨를 그 집에서 사사하게 하다
  22. 중종실록》 69권, 중종 25년(1530년 명 가정(嘉靖) 9년) 8월 23일 (경진) 자순왕대비(慈順王大妃) 윤씨(尹氏)는 파주인(坡州人)이다. 아버지 윤호(尹壕)가 신창 현감으로 있을 때인 임오년(1462년) 6월 무자일에 그 고을 관아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창(昌)자를 가지고 창년(昌年)이라고 이름을 지었었다.
  23. 연산군일기》 52권, 연산 10년(1504년 명 홍치(弘治) 17년) 3월 28일 (기축)
  24. 연산군일기》 52권, 연산 10년(1504년 명 홍치(弘治) 17년) 3월 20일 (신사)
    안양군과 봉안군을 곤장 때리다
    항(안양군)과 봉(봉안군)은 정씨의 소생이다.

    왕이, 모비(母妃) 윤씨가 폐위되고 죽은 것이 엄씨(嚴氏)·정씨(鄭氏)의 참소 때문이라 하여, 밤에 엄씨·정씨를 대궐 뜰에 결박하여 놓고, 손수 마구 치고 짓밟다가,

    항과 봉을 불러 엄씨와 정씨를 가리키며 ‘이 죄인을 치라.’ 하니 항은 어두워서 누군지 모르고 치고, 봉은 마음속에 어머니임을 알고 차마 장을 대지 못하니, 왕이 불쾌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마구 치되 갖은 참혹한 짓을 하여 마침내 죽였다.

    (중략)

    뒤에 내수사(內需司)를 시켜 엄씨·정씨의 시신을 가져다 찢어 젓담그어 산과 들에 흩어버렸다.

  25. 효령대군의 증손녀
  26. 소헌왕후의 사촌 동생
  27. 중종실록》 76권, 중종 28년(1533년 명 가정(嘉靖) 12년) 11월 5일 (계묘)
    후궁 윤숙원에게 부의를 보내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성종의 후궁 윤숙원(尹淑媛)이 죽었으니 숙용(淑容)의 예로 각별히 부의를 보내라."

  28. 성종실록》 55권, 성종 6년(1475년 명 성화(成化) 11년) 5월 20일 (무진)
    왕자 이효신의 졸기
    왕자 이효신(李孝信)이 졸(卒)하였다.

    태어난 지 겨우 다섯 달이므로, 3일만에 장사하고 관곽(棺槨)을 쓰지 말고 제사에 흰 떡을 쓰고 1백일 만에 그치라고 명하였다.

  29. 성종실록》 105권, 성종 10년(1479년 명 성화(成化) 15년) 6월 12일 (정유)
    폐비 윤씨의 소생인 왕자가 죽다
    왕자가 졸(卒)하였는데, 폐비 윤씨(廢妃 尹氏)의 소생이었다.
  30. 세종의 8남 영응대군의 외손녀
    세종영응대군길안현주 이씨 → 면천군부인 구씨
  31. 연산군일기》 58권, 연산 11년(1505년 명 홍치(弘治) 18년) 6월 15일 (무진)
    의금부 낭청을 보내어 이항 · 이봉을 사사하게 하다
  32. 중종실록》 4권, 중종 2년(1507년 명 정덕(正德) 2년) 10월 16일 (병술)
    견성군 이돈을 간성군에서 사사하다
  33. 울진 삼달리 태실
    성화 22년(1486년) 12월 초6일 해시에 태어난 왕자 견석(堅石)의 태실을 성화 23년(1487년) 4월 초7일 조성함
  34. 양녕대군의 외증손녀
    양녕대군 → 이씨부인 → 권인손(權仁孫) → 학성군부인 권씨
  35. 선원록》 및 《왕녀 태실 태지》
  36. 성종실록》 218권, 성종 19년(1488년 명 홍치(弘治) 1년) 7월 14일 (을해)
    순숙공주가 졸하니 조회와 저자를 3일 동안 정지하다
    순숙공주(順淑公主)가 졸(卒)하니, 조시(朝市)를 3일 동안 정지하였다. 공주는 주상의 딸인데, 나이가 열 한 살이다. 전교하기를,

    "공주는 나이 어린 미성인(未成人)이므로 상장(喪葬)의 모든 일을 일체 반드시 횡간(橫看)에만 따른 것이 아니고 참작해 할 것이며, 빈소(殯所)를 없애고 바로 장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37. 신숙주한명회의 증손자
  38. 성종실록》 206권, 성종 18년(1487년 명 성화(成化) 23년) 8월 20일 (정해)
    숙신옹주의 졸기
    숙신옹주(淑愼翁主)가 졸(卒)하였다. 임금의 딸인데 나이가 어려서 출가하지 않았었다.
  39. 성종실록》 234권, 성종 20년(1489년 명 홍치(弘治) 2년) 11월 8일 (임술) 숙신옹주의 졸기 숙신옹주(淑愼翁主)가 졸(卒)하였는데, 나이 12세이다. 임금이 나이가 어린 것 때문에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염습(斂襲)하고 빈소(殯所)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40. 《공신옹주 백자묘지명》
  41. 한명회의 손자
  42. 신승선의 외손자이며 폐비 신씨의 조카
  43. 《왕녀 합환아기씨 태실(王女合歡阿只氏胎室)》
  44. 중종실록》 69권, 중종 25년(1530년 명 가정(嘉靖) 9년) 8월 23일 (경진)
    산릉을 간심하는 것과 지문에 대해 논의하고 비망기를 예조에 내리다

    (중략) 을사년(1485년) 11월에 아홉 달 만에 공주가 출생하므로 궁중이 깜짝 놀랐었고, 무신년(1488년) 3월 기사에 대군 【곧 금상(今上, 중종)임.】이 출생하였고 경술년(1490년) 11월에 공주가 출생하였으며, (중략)

  45. 유명 조선국 소의흠숙정현왕후(昭懿欽淑貞顯王后) 선릉지(宣陵誌)
    후(后, 정현왕후)는 금상(今上, 중종)을 탄생시켰고, 또 세 공주를 낳았으나 모두 요절하였다.
  46. 성종실록》 188권, 성종 17년(1486년 명 성화(成化) 22년) 2월 14 (경인)
    공주가 죽었으므로 조하를 정지하라고 전교하다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새로 낳은 공주가 비록 허무하기는 하나 어제 죽었으니, 내일의 조하(朝賀)는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47. 《정순옹주 태실》
  48. 이세좌의 외손
  49. 중종실록》 54권, 중종 20년(1525년 명 가정(嘉靖) 4년) 6월 23일 (신해)
    숙혜옹주의 졸기
  50. 《왕녀 정복 태실비(王女貞福胎室碑)》
  51. 중종실록》 52권, 중종 20년(1525년 명 가정(嘉靖) 4년) 1월 5일 (갑자)
    영원위 옹주의 졸기
  52. 윤필상의 증손자
  53. 보물 제1788호 《양주 수종사 석탑 출토발원문》
  54. 귀인 남씨의 동생이며, 의성위 남치원의 사촌 동생
  55. 《왕녀 승복아기씨 태실(王女承福阿只氏胎室)》
  56. 정숙옹주묘지명(靜淑翁主墓誌銘)》
  57. 세종의 셋째 딸인 정현옹주의 증손자
    세종정현옹주 → 윤인 → 윤승유 → 윤섭
  58. 이이화, 한국의 파벌 (어문각, 1983) 224페이지
  59. 평민 출신 첩이 낳은 자손

같이 보기 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조선 왕조의 통치기구"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에는 국립문화재연구원에서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배포된 자료를 기초로 작성된 글과 사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