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평렬(金萍烈, 1899년 3월 13일(1899-03-13) ~ 1922년 6월 14일(1922-06-14))은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임정 시대정치인)였다.

김평렬
金萍烈
출생1899년 3월 13일(1899-03-13)
대한제국 평안남도 대동군
사망1922년 6월 14일(1922-06-14)(23세)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후창군
국적대한민국
거주지대한제국 평안남도 평양
중화민국 둥베이 지역 지린성 퉁화
중화민국 장쑤성 상하이
학력대한제국 평안남도 평양 숭덕소학교 3학년 중퇴(1908년)
직업항일 독립운동가정치인
경력대한청년단 재무부 부장
형제무녀독남
배우자없음(미혼 독신)
자녀없음
정당무소속
상훈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1991년 3월 1일)
웹사이트[1] -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기타 별칭 편집

그는 한때 만주 토지 막노동판 시절 진판(金潘(금반), 김반)·난핑위(南萍雨, 남평우)·푸밍례(朴明烈, 박명렬)·정주잉(鄭珠瑛, 정주영)이라는 가명(假名)을 사용하였다.

생애 편집

일찍이 1908년 당시에 평안남도 평양의 숭덕소학교를 3학년으로 중퇴한 후 일가족들과 같이 함께 청나라 만저우 지역 지린 성(퉁화)으로 건너가 농업(農業)과 한문학 공부 등에 열중하다가 만주 헤이룽장 성(헤이허·치치하얼)·랴오닝 성(선양·안둥)에서 차라리 막노동도 마다치 아니하던 그는 1920년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에 가입하여 재무부장(財務部長)으로 임명된 후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민정부 대륙 본토 시대 중화민국 장쑤 성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에 제공하는 등 상당히도 활발히 임정 분야에 투신 및 활동하였다.

1922년 6월 14일, 일제 시대 평북 후창(厚昌)의 어느 면내(面內)의 부근에서 이일현(李日鉉) 등과 함께 은신하던 중 일경의 총으로써 습격을 받으면서 결국, 이일현과 함께 일경한테 피살 순국하였다.

사후 편집

그의 사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자 1991년 3월 1일 당시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외부 링크 편집

  • [2] -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