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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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남한산성 입성과 전투의 경과편집

1636년 12월, 청군이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대거 침공하였다. 청군은 임경업이 지키는 백마산성과 홍명구가 지키는 평양성 등 주요 격전지가 될 만한 곳을 회피하며 빠른 속도로 남하하여 개성을 함락하고, 한양 코앞까지 진격해왔다. 이에 조선 인조는 한성부판윤 김경징을 강화도 검찰사로 임명하고, 이민구는 강화 부사로 임명하여 강화도로 보냈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 왕자와 왕족들 역시 이곳으로 피신시켰다. 인조 또한 강화도로 향하려 했으나 청군이 한양에서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미리 차단하자 하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입성하여 13,800여명의 군사를 확보하며 장기 항전을 꾀하려 하였다. 남한산성에는 미곡 14,300여석과 피, 잡곡 9,500여석, 장 220여독이 있었는데, 이는 1만 4000여명의 군사가 충분히 2개월 이상 버틸 수 있는 양이였다. 그러나 남한산성에는 군사들뿐만 아니라 왕족, 종친, 문무관료, 노비 등 14,300명의 사람들도 함께 들어와 식량 부족이 우려되었다.

1637년 1월 13일 청 좌익군 24,000명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계속해서 도착한 청의 군대는 산성을 포위하였다. 1월 12일 어영대장 원두표가 군사 50여명을 이끌고 나가 청군을 공격, 청군 6명을 전사시키고 이들을 물리쳤다. 계속해서 1월 15일까지 이기축, 원두표, 구굉, 김류 등이 청군을 향해 출성공격을 하였다. 1월 16일 청군 5,000명이 운제, 화포 등 공성 무기를 동원하여 남한산성에 대공세를 가하자 조선군은 출성하여 청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고 결국 승리하였다. 이날의 전투에서 조선군 80명이 전사하였고, 청군은 200명이 전사하였다. 두 차례의 집중공격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청군은 일반적인 공격으로는 항복을 받아낼 수 없다고 판단하여 작전을 바꾸고 병력을 나누어 남한산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이 때문에 남한산성의 조선군은 지방의 지방군들과의 연락이 끊어지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추위로 인해 군사들이 죽어나갔으며, 식량 또한 서서히 고갈되면서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게 되었다. 1월 21일 충청 감사 정세규최진립, 이경징 등의 장수들을 데리고 충청도 근왕군 8,000명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도중 양고리의 청군과 격돌하게 되었는데(험천 전투), 이 전투에서 조선군이 패하였다. 계속해서 각 지방에서 근왕군들이 남한산성으로 향했으나, 대부분 청군에게 격퇴되었다. 조정에서는 백성들이 의병을 일으켜 청군을 치기를 원했으나 임진왜란 때처럼 의병이 활발하게 일어나지 않았다.

2월 5일 청군은 병력을 재배치하여 남한산성이 외부의 지원을 받을 수 없도록 차단하였다. 그 후 청군은 남한산성을 수 차례 공격하였으나 대부분 조선군에게 격퇴당하자 인조의 항복을 보다 쉽게 받아내기 위해서는 인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주요 왕족들이 있는 강화도도르곤으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공격하게 하였다(강화도 방어전). 그러나 이때 강화도 검찰사 김경징과 강화 부사 이민구는 청군의 강화도침략을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청군이 강화도에 접근하자 충청도 수사 강진흥은 수군 몇백여명을 이끌고 청군의 배를 연이어 침몰시켰으나 청군은 충청도 수군의 방어선을 뚫고 강화도에 결국 상륙하여 진해루를 함락하고, 뒤이어 강화산성을 함락하였다. 이때 강화도를 수비해야 할 검찰사 김경징과 부사 이민구가 도주해버리는 바람에 봉림대군과 소현세자 등 왕자와 왕족들이 인질로 잡히게 되었다. 이는 인조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게다가 경상좌병사 허완과 경상우병사 민영이 이끄는 4만의 군사마저 청군에게 대패(쌍령 전투)하는 바람에 인조는 항전을 지속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결국 항전이 아닌 항복을 택하였다.

결국 2월 24일,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항복하였다.

1월 25일[1] 기록(인조실록)편집

"청나라 황제가 모든 군사를 모아 탄천(炭川)에 진을 쳤는데 30만명이라고 하였다. 황산을 펴고 성에 올라 동쪽으로 월봉을 바라보고 성 안을 내려다 봤다." 그리고 너를 바라보았다.

2월 13일[2] 전투(인조실록)편집

"오랑캐가 대포를 발사했는데, 대포의 탄환이 거위알만했으며 더러 맞아죽는 사람도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무서워했다."

2월 18일[3] 전투(인조실록)편집

청나라군이 대포를 발사했다. 포탄이 행궁으로 날아와 떨어지자 사람들이 두려워해 피했다. 적병이 남성에 육박했는데, 우리 군사가 격퇴시켰다.

결과편집

남한산성 전투는 조선군의 전략적인 승리였으나, 인조의 항복으로 인해 패배로 끝났다.

교전국편집

  •   조선 - 인조,김상헌,심경진 병력:14,000명
  •   청나라 - 홍타이지,도르곤 병력: 78,000명

사상자편집

참고문헌편집

  • 나만갑의 병자록

각주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