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샤 우크라인카

레샤 우크라인카(우크라이나어: Леся Українка, 본명: 라리사 페트리우나 코사치크빗카(Лариса Петрівна Косач-Квітка), 1871년 2월 25일 러시아 제국(현재의 우크라이나) 즈뱌헬 ~ 1913년 8월 1일 러시아 제국(현재의 조지아) 수라미(Surami))는 우크라이나시인, 작가, 극작가이다.

레샤 우크라인카
우크라이나 200 흐리우냐 지폐에 그려진 레샤 우크라인카의 초상화

그녀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신낭만주의적 모더니즘에스힐이나 소포클래스의 작품들에 영향을 받았다.[1] 그녀는 드라마라는 장르가 지식인의 고민과 같은 현실적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2] 그녀의 서정시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것과는 달리, 당시 우크라이나의 민족적 고통을 반영하지 못하고 우크라인카가 인간 보편적인 실존적 문제를 다뤘다는 점에서 당대 비평가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3][4]

생애 편집

1871년에 작가인 올하 페트리우나 코사치(Ольга Петрівна Косач, 필명: 올레나 프칠카(Олена Пчілка))의 딸로 태어났다. 우크라이나어 외에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라틴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불가리아어를 이해할 줄 알았으며 8세 때에 첫 시를 발표했다. 우크라인카는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와 성경의 신화적 인물들과 신화적 요소들에 관심이 많았다.[1] 1879년에는 그의 가족들이 루츠크로 이주했다.

1884년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를 받고 있던 르비우에서 발행된 문학 잡지에 〈은방울꽃〉이라는 제목의 시를 게재하면서 문학계에 등단했다. 그의 초기 시는 타라스 셰우첸코, 이반 프란코의 영향을 받았으며 시인의 외로움, 사회적 소외감, 우크라이나 민족의 자유에 대한 동경이 담겨 있다. 질병 치료를 위해 건조한 기후를 띠는 곳으로 여행을 떠났으며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불가리아, 크림반도, 캅카스, 이집트를 여행했다.

러시아 제국차르 전제 정치 체제에 반대했던 우크라이나의 마르크스주의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1902년에는 《공산당 선언》을 우크라이나어로 번역했다. 1907년에는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었고 석방된 뒤에도 러시아 경찰의 감시를 계속 받았다. 1913년에 휴양지였던 조지아의 수라미에서 질병으로 사망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시집 《노래의 날개에서》(1893년), 《생각과 꿈》(1899년), 《메아리》(1902년), 서사시 《고전 동화》(1893년), 《한 단어》(1903년), 희곡 《공주》(1913년), 《카산드라》(1903년 ~ 1907년), 《카타콤에서》(1905년), 《숲의 노래》(1912년), 《귀부인》(1914년) 등이 있다.

각주 편집

  1. 조혜경 2004, 208쪽: "고대 그리스의 비극 속에서 찾았을까? 우크라인카는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와 성경의 신화적인 인물들과 신화적인 요소에 관심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에스힐이나 소포클레스의 작품을 통하여 많은 신화적 모티프를 접하였다"
  2. 조혜경 2004, 208쪽: "이처럼 우크라인카가 드라마가 현실의 문제를 다루어야 하며 특히 인텔리들의 고민을 담아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 또한 그녀의 시학 전반을 흐르는 '신낭만주의적 모더니즘' 경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3. 조혜경 2004, 208쪽: "서정시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과는 달리 우크라인카의 드라마적 포에마(драматические поэмы)는 당대 비평가들에게 그다지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드라마는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지향했고 보편적인 테마와 인간 본연의 실존적인 문제를 거론하였기 때문이다"
  4. 조혜경 2004, 209쪽: "그러면 여기서 민족주의와 인민주의가 지배적이었던 우크라이나 모더니즘 경향에 반하여 고대 그리스 신화의 비극적인 주인공과 트로이의 멸망이라는 종말론적인 분위기를 주요 모티프로 하여 씌어진 우크라인카의 드라마적 포에마인 『카산드라』에 대해 살피기로 하자"

참고 문헌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