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패의 아버지의 밑에서 학문을 익혔다.
영시 3년(기원전 14년), 다른 열두 명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진류태수 엄보를 죽이고 스스로 장군을 칭하였으나, 이담 등[1]에게 잡혀 맞아 죽었다. 이담 등은 공로를 인정받아 모두 열후에 봉해졌다.
태중대부 평당·시중 주창(周敞) 등은 성제에게 장패의 아버지의 글을 추천하였으나, 훗날 번병이 난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글을 퇴출시켰다.
곡영은 본래 이름이 곡병(谷並)이었는데, 번병의 난이 일어나자 '곡영'으로 고쳤다.[2]
- 반고, 《한서》
- 권10 성제기
- 권26 천문지
- 권27상 오행지 上
- 권88 유림전
- ↑ 한서 성제기에는 '이담 등 다섯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공신표에 따르면 이담·칭충·종조·자순 네 사람이다.
- ↑ 반고, 《한서》 권85 곡영두업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