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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우(普雨: 1515~1565)는 조선 명종 때의 승려이다.[1][2] 호는 허응당(虛應堂) · 나암(懶庵)이다.[1][2]

보우는 1530년 금강산 마하연암에 들어가 수도하다가, 명종의 모후로 불심(佛心)이 깊은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신임을 얻어 1548년봉은사 주지가 되었다.[1] 그 후 선종교종을 부활시키고,[1] 문정왕후가 섭정할 때에 보우는 봉은사(奉恩寺)를 선종(禪宗)의 본산(本山)으로 삼았으며 봉선사(奉先寺)를 교종(敎宗)의 본산으로 삼았다.[2] 이와 더불어, 승과를 부활시키고 도첩제를 다시 실시하게 하는 등, 숭유억불 정책으로 탄압받던 불교의 부흥에 노력하였다.[1] 후에 도대선사(都大禪師)에 올랐다.[1]

그러나 이러한 불교 부흥은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일시적인 부흥에 그치고 종막을 고하였다.[2] 또한 보우도, 문정왕후가 죽자, 유림의 기세에 밀려 승직을 삭탈당하고 제주도유배되었다가 제주 목사가 참하였다.[1]

생애 및 활동편집

보우는 조선 중종 25년 금강산 마하연암(摩訶衍庵)에 입산하여 참선경학 연구에 전심하였다.[3] 그 후 하산하였는데, 이후 다시 설악산 백담사(白潭寺)의 승려로 있던 중, 문정왕후(文定王侯)가 선 · 교(禪敎) 양과를 부활시키자 판선종사도대선사 봉은사 주지(判禪宗寺都大禪師奉恩寺住持)가 되고 봉선사(奉先寺) 주지로서 교종(敎宗)을 맡았던 수진(守眞)과 더불어 선 · 교 양 면에서 그 위세가 빛나기 시작하였다.[3]

나중에 유신(儒臣)들의 배척을 받아 제주(濟州)로 유배되고, 거기서 죽었다.[3] 또한 그의 힘으로 재흥했던 선교양종의 과(科)도 폐지되고 말았으나 그때에 들어온 승려들 가운데 임진왜란 때에 근왕호국(勤王護國)의 충성을 다한 휴정(休靜) · 유정(惟政) 등이 배출되어 법맥이 이어진 것은 조선의 불교로서는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3]

사상편집

보우의 (禪) 이해는 틀리지 않았지만 크게 독창적인 점은 없고 약간 소극적인 (空)의 편견에 치우쳐 심경불이(心境不二)의 묘제(妙諸)는 언급이 부족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3]

그러나 그의 일정설(一正說)은 그 표현의 묘(妙)를 얻은 것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일정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3]

하나라는 것은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니며, 성실하여 망녕됨이 없는 것을 말하니 하늘이치이다. 그 이치(理)가 공막(空漠)하여 아무런 조짐이 없지만 만상(萬象)이 울창하여서 물(物)의 어느것 하나 그 이치를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그것의 체(體)를 말하면 하나(一)일 따름이니 처음부터 물(物)이 둘이나 셋 있는 것은 아니다.…… 바르다(正)는 것은 치우치지 않고 그릇됨이 없고 순수하며 잡되지 않는 것은 이르는 것이니 곧 사람마음이다. 그 마음이 안정되어 딴 생각이 없고, 천지만물의 이치가 어디 한 군데 해당되지 않는 곳이 없으며 영통(靈通)하여 어리석지 않으니, 천지만물의 모든 일에 어느 것 하나 응하지 않는 것이 없고, 일찍이 한 생각도 사사로이 치우치거나 그릇된 적이 없다.

보우는 일정설(一正說)에서 하나(一)를 가지고 하늘이치를, 바른 것(正)을 가지고 사람마음을 이야기 하였는데 그 취지는 한국 민족 사상의 한 전통을 이루는 것으로 평가된다.[3]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저서편집

보우의 저서로는 《허응당집》(虛應堂集)·선게잡저》(禪偈雜著)·불사문답》(佛事問答) 등이 있다.[1]

각주편집

참고 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