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김씨(扶餘 金氏)는 충청남도 부여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부여 김씨
扶餘金氏
나라한국
관향충청남도 부여군
시조김작신(金作新. 일명 作辛)
집성촌함경남도 갑산군(甲山郡)
평안북도 강계시
주요 인물김희조, 김언
인구(2000년)1,024명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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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김씨(扶餘 金氏)는 유적이 멸실되어 관향은 있으나, 상계는 상고할 수 없다고 하였다.[1] 다만 후손들이 선대의 거주지인 부여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일설에 시조가 김작신(金作新)으로 고려 호장 동정 김경수의 증손이라 한다.[2] 《고려사》 김구 열전에 조부 김작신(金作新)은 중(僧)이었다고 하였다.[3]

또 일설에 시조 김작신고려 때 우복야 겸 이부상서에 오르고 부령군(扶寧君)에 봉해졌으나, 간신들의 고자질로 낙향하여 부령의 호장(戶長)을 지냈다고 한다.

시조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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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사》 김구 열전 : 조부 작신(作新)은 중(僧)이었다고 한다.[4]
  • 김구 신도비명 : 조부 작신(作新)은 우복야 겸 이부상서에 오르고 부령군(扶寧君)에 봉해졌다고 한다.[5]
  • 부안 김씨 : 부안 김씨 《을사보》(1785년)는 김작신(金作新)에 대한 여러 설에 대해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6]

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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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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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급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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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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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지성(金之聲, 1610 庚戌生) : 문과 인조 26년(1648) 식년시 을과

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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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시행(金時行, 1805년 乙丑生) : 헌종 2년(1836) 정시(庭試) 무과(武科) 급제, 평안도(平安道) 상토첨사(上土僉使)[7]

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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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선(金璿, 1874 甲戌生) : 율과(律科)

사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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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균(金正均, 1874 甲戌生) : 진사시 고종 25년(1888) 식년시 삼등(三等)
  • 김병걸(金秉杰, 1874 甲戌生) : 생원시 고종 28년(1891) 증광시 삼등(三等)

집성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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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년 국세 조사에 따르면 함경도 갑산군 회린면, 운흥면 일대에 30호가 살고 있었다.
  • 함경도 지역은 초기 여진족의 발현 지역으로 송막기문에는 초기 여진 추장을 신라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마의태자 또는 그의 후손이 초기 여진족의 조상이라는 견해가 있다.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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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년 92가구 374명
  • 2000년 333가구 1,024명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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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증보문헌비고》,《조선씨족통보》
  2. 일명 김작신(金作辛)이라 한다.
  3. 《고려사》
  4. 《고려사》 열전 권제19 김구(金坵) : 원종(元宗) 4년(1263)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 임명되었는데, 김구의 조부가 승려이므로 대간(臺諫)에 있는 것이 마땅하지 않았으나 김구가 재능이 있어 이에 그의 고신(告身)에 서명하였다.
  5. 김구 신도비명을 안동부사 정포(鄭宲. 1701~1776)[송강 정철의 현손인 정호(鄭澔)의 종손(從孫)이다.]가 찬하였는데, 이에 의하면 "공의 휘는 구(坵)요. 자는 차산(次山)이며, 호는 지포(止浦)이다. 신라 국성으로 공의 고조부는 춘(春)이며, 증조부는 인순(仁順)이니 은덕(隱德)으로 벼슬하지 않았다. 조부는 작신(作新. 또는 作辛)으로 우복야(右僕射) 겸 이부상서(吏部尙書) 부령군(扶寧君)이며, 부는 의(宜)이니 합문지후(閤門祗侯) 우복야(右僕射)이고, 어머니는 나주 김씨이다."고 하였다.(坵 次山 止浦 扶寧 文貞 金仁鏡 門人 百鎰 | 金作新尙書右僕射 金宜右僕射 羅州金氏 金坵 慶州崔氏禮賓卿 崔㺹 女 金宗盂典校副令 金叔盂西都監判官 金汝盂刑部尙書 女 鄭瑎贊成事 金承印大司成 神道碑文 鄭宲 撰)
  6. 김작신(金作辛)에 대해 벼슬 후 승려로 출가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고려는 불교를 적극 지원하며 국교로 삼은 나라로 광종은 과거시험에 승과를 두었으며 국사와 왕사를 두는 등 승려의 권위 역시 낮지 아니하였다.
  7. 병조판서 김언(金彦)의 7대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