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Chobkwon/연습장



북한산성(北漢山城)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사적
북한산성 대서문
지정번호 사적 제162호
(1968년 12월 5일 지정)
소재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1-1 외
서울특별시 은평구·성북구·강북구·도봉구 일원
제작시기 조선 숙종대왕 37년 (서기 1711년)
서울의 역사


북한산성(北漢山城)은 북한산에 쌓은 산성이다.

북한산성(北漢山城) 개요 편집

Bukhansanseong

지정번호 : 사적 제162호 / 시대 : 1711년(숙종 37년)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1-1(임)

지정면적 494,516㎡.


북한산성은 경기도 고양시와 서울시에 걸쳐있는 북한산(北漢山)-인수봉․백운봉․만경대가 뿔처럼 솟아있어 일제 이전에는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렸음-에 조선시대 숙종(1711년)때 축성된 산성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개루왕 5년(132)에 북한산성의 명칭으로 축조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후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고 수도를 방어하는 중요한 요새로서 북한산성의 명칭이 등장하나 삼국시대의 북한산성이 현재의 북한산성과 같은 곳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고려시대,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자 현종은 고려 태조의 재궁(梓宮 : 유해를 모신 관)을 부아산 향림사로 옮긴 일도 있었으며, 1232년(고종 19) 이곳 삼각산에서 몽고군과의 격전과 1387년(우왕 13) 개축의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 들어 도읍을 한양(서울)으로 정하면서 삼각산은 도성을 수호하는 진산(鎭山)이자 조산(祖山)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목멱산(남산)과 함께 국가에서 신에게 제사 드리는 곳으로 중요시 되었다. 특히 조선후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에는 수도 한양을 지키는 관방지(關防地)로서 역할이 강조되어 산성(山城)을 축조하게 되었다.

북한산성의 축성은 숙종 37년(1711년) 4월에 착수되어 동년 10월에 완공되기까지 약 6개월이 걸렸으며, 전례없는 빠른 축성으로 둘레 7,620보, 약 12.7km의 석성이 완성되었다. 성벽은 내탁과 內外俠築으로 견고하게 쌓았으며,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함으로써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성의 시설은 1.대서문, 2.북문, 3.소동문(현 대동문), 4.대동문(현 대성문), 5.소남문(현 대남문), 6.중성문등 6개 문에는 홍예문과 초루가 설치되었고, 7.서암문(원 소서문:홍예), 8.백운봉암문, 9.용암암문, 10.동암문, 11.가사당암문, 12.부왕동암문(원 소남문:홍예), 13.청수동암문등 7개 암문 그리고 14.수문이 설치되었다.

성곽에는 성문이외에 시단봉(柴丹峰) 위에 동장대(東將臺), 나한봉(羅漢峰:현 715봉) 동북에 남장대, 중성문(中城門) 서북에 북장대 등 3개소의 장대와 함께 유사시 어가를 북한산성으로 옮길 행궁을 건립하였다.

행궁은 북한산성 축성공사가 상당히 진척된 숙종 37년 8월에 공사가 시작되었고 완공은 그 이듬해인 숙종 38년(1712) 5월에 이루어졌다.

이외에 군사시설로 성랑과 유영, 군창(軍倉)이 있다. 성내에는 승군(僧軍)을 위한 중흥사(重興寺)를 비롯한 13개의 사찰이 있고, 99곳의 우물과 26곳의 저수지가 있었다.

북한산성은 둘레가 7,620보(步)이며, 21리 60보에 해당한다.

수문(水門) 북쪽에서 용암(龍岩) 남벽까지 수문, 북문, 서암문(원 소서문), 백운봉암문 등 2,292보는 훈련도감(訓鍊都監)에서 만들었다.

용암 남쪽에서 보현봉(普賢峯)까지 용암암문(현 용암문), 소동문(현 대동문), 동암문(현 보국문), 대동문(현 대성문)등 2,821보는 금위영(禁衛營)에서,

수문 남쪽에서 보현봉까지 대서문, 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원 소남문), 가사당암문, 소남문(현 대남문)등 2,570보는 어영청(御營廳)에서 만들었다.

성벽 높이는 평지와 산지 등 지형에 따라 높이를 달리하여 쌓았는데,

고축(高築)· 반축(半築)·반반축(半半築)으로 축성하였으며, 성벽없이 여장(女檣)만 쌓은 곳도 있다.

고축은 14척(尺)~12척, 반축은 7척~6척, 반반축은 4척~3척이며,

고축의 경우 총 길이가 2746 보이고, 반축의 경우는 총 길이가 2906보이며, 반반축의 총 길이는 511보이다.

그리고 여장만을 쌓은 길이는 1,457보이다.


북한산성관련 역사적 사실 편집

□ 북한산성 축성기간 (1711년 4월 ~ 1711년 10월. 6개월)

 ◎ 삼국시대
  ․ 고구려 북한산군 소속. 남평양이라고도 함.
  ․ 백제 온조왕 14년(B.C.5) 성을 쌓았다.
  ․ 백제 개루왕 5년(132) 북한산성 축성
  ․ 백제 근초고왕 26년(371)에 도읍을 이곳으로 옮김.
  ․ 백제 개로왕 15년(469) 북한산성을 지키게 함
  ․ 백제 개로왕 21년(475) 고구려군(장수왕)의 공격으로 함락. 성이 폐지됨.
  ․ 신라 진흥왕 14년(553) 한성지역을 신라가 점령. 비봉에 진흥왕 순수비를 세움
  ․ 신라 진흥왕 16년(555) 진흥왕이 북한산을 순행.
  ․ 신라 진평왕 25년(603) 고구려장군 고승이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 공격. 신라 진평왕이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함
  ․ 신라 무열왕 8년(661) 고구려장군 뇌음신과 말갈장군 생개가 북한산성 공격. 북한산성 성주 동타천은 성내 주민을 합한 2,800명으로 방어
 ◎ 고려시대
  ․ 목종 9년(1006) 현종이 즉위 전 삼각산 신혈사로 옮겨 우거함
  ․ 현종 원년(1010) 거란 성종 40만 군사가 침입. 태조의 재궁을 부아산 향림사에 옮겨 안치했다가 7년(1016) 정월에 개성의 현릉으로 옮겨감 
  ․ 현종 9년(1018) 12월 거란 소손녕 10만 군사가 침입. 태조의 재궁을 부아산 향림사에 옮겨 안치함
  ․ 우왕 13년(1387) 삼각산에 중흥산성을 쌓음
 ◎ 조선시대
  ․ 문종 원년(1451) 북한산을 비롯한 도성 주변지역에 대한 축성을 논의.
  ․ 선조 29년(1596) 북한산성 축성논의에 따라 이덕형이 북한산 중흥동 산성을 돌아보고 옴.
  ․ 효종 10년(1659) 임란, 병란 이후의 축성론에 따라 송시열에게 북한산성 축성 계획을 은밀히 말했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함
  ․ 숙종 28년(1702) 우의정 신완(申玩)이 성지(城池) 문제를 논의 
  ․ 숙종 29년(1703) 북한산성 축성에 대하여 재논의
  ․ 숙종 30년(1704) 10월 훈련대장(訓鍊大將) 이기하(李基夏), 어영대장(御營大將) 김석연(金錫衍)에게 홍복산(弘福山)과 북한산(北漢山) 을 답사하여 산성 축조의 타당성을 검토하도록 하명.
  ․ 숙종 36년(1710) 장신(將臣)으로 하여금 현지에 가서 북한산성 축조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도록 명하였다.
  ․ 숙종 37년(1711) 2월에 비로소 북한산성을 축성하자는 의논이 결정되었다.
  ․ 숙종 37년(1711) 4월 3일 대대적인 축성공사 시작
  ․ 숙종 37년(1711) 8월 행궁영건청 설치, 김우항, 이언강 북한행궁영건당상 임명
  ․ 숙종 37년(1711) 10월 북한산성 완공(둘레 7,620보, 성문13, 행궁1, 장대3, 창고8, 대사18, 암자2, 누각3, 교량7 성랑143, 지26, 정99) 
  ․ 숙종 38년(1712) 4월 숙종대왕이 북한산성 행행, 중성을 쌓도록 지시
  ․ 숙종 38년(1712) 5월 북한산성 행궁공사 완료
  ․ 숙종 38년(1712) 9월 북한산성 주관부서로 「경리청」을 신설하고, 도제조-제조를 둠
  ․ 숙종 39년(1713) 탕춘대에 평창 설치
  ․ 숙종 40년(1714) 중성문 완성(중성문1, 시구문1, 수문1)
  ․ 숙종 44년(1718) 8월 탕춘대 외성 축성 결정
  ․ 영조 21년(1745) 팔도도총섭 승 성능(聖能)이 『북한지 (北漢誌)』를 지음
  ․ 영조 23년(1747) 경리청이 총융청에 이속, 총융사가 경리청 관리함
  ․ 영조 36년(1760) 8월 영조대왕이 북한산에 거둥함.
  ․ 1760년(영조 36년) 무렵에 소남문에 문루를 올려 암문이 아니게 되고 
  ․ 1765년(영조 41년)에는 이름을 대남문으로 바꿈 
  ․ 영조 48년(1772) 4월 영조대왕과 세손(정조대왕)이 북한산성 행궁에 행차하여 시단봉에 오름
  ․ 정조 17년(1792) 북한산성 수축
  ․ 순조 32년(1832) 북한산성 수축
  ․ 순조 33년(1833) 북한산성 수축
  ․ 고종 28년(1891) 경리청 재설치
  ․ 고종 31년(1894) 경리청 폐지
  ․ 1912년 총독부의 요청으로 북한산성 사고 건물을 10년간 영국 교회에 대여
  ․ 1996년 서울대박물관이 북한산성 지표조사
  ․ 1999년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가 북한산성 행궁지 지표조사
  ․ 2009년 경기문화재단 북한산성행궁지 종합정비 기본계획 발간
  ․ 2011년 한울문화재연구원 고양 북한산성행궁지 시굴조사

역사 편집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편집

옛날 고구려백제의 쟁탈 중심지가 되었다. 백제는 대방군의 옛땅을 합쳐버리고 차차 북방에 쳐들어갈 때 132년 개루왕 5년에 이 성을 쌓았다. 그러나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백제를 공격하였고,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은 이 성을 포위하여 함락시키자 서울 지방은 고구려의 북한산주로 예속되었다. 뒤에 신라가 점차 국력이 강해져서 이 지역에 진출하였는데, 진흥왕이 북경 관내를 순시하였을 때 북한산의 순수비를 건립했다. 비는 현존하며 비가 있는 일대의 산은 ‘비봉’(碑峰)이라 부르고 있다.

고려 시대 편집

고려는 도읍을 개성에 두었으므로 북한산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조선 초기에도 처음은 그다지 주의를 끌지 않았다.

조선 시대 편집

선조 때의 임진·정유의 왜란과 1636년 인조 14년 청 태종이 쳐들어온 뒤부터 피난의 적소로서 매우 중요시되었다. 그러나 성은 쌓지 못하였다.

이 축성이 가장 대규모로 이루어진 것은 1711년 숙종 37년이다. 이보다 앞서 1659년 효종 10년에 왕이 송시열에게 명령하여 북한산성을 수축하게 하고 ‘임란이어처’[1]로 하여 도성의 근본을 견고하게 하라는 하교가 있었다. 이때부터 이 성의 축성이 누차 논의되긴 하였으나 1702년 숙종 28년 우의정 신완강화도·남한산성은 비상시에 의지할 지대가 아님을 극론하였고 이후로 여러 신하들과 수차 상론하는 바, 먼저 기지를 시찰시키고, 여러 신하들에게 방안을 의논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704년 숙종 30년 음력 10월 훈련대장 이기하와 어영대장 김석연으로 하여금 북한 축성의 가부를 가서 살피고 오라 하자 이기하는 돌아와 보고하기를 험하기가 남한산성은 비할 바 아니며 도성에 가까운 곳에 있는 이런 형세의 지대를 버릴 것이 아님을 역설하였고, 여러 신하도 이에 동의하는 수가 많아졌는가 하면, 특히 판중추부사 이유는 강력히 이를 지지했다. 그리고 총융사 김중기와 사직 이우항도 성의 터를 시찰하고 돌아와 찬성의 뜻으로 보고하자 1711년 숙종 37년 음력 2월에 비로소 축성하기로 결정하고, 음력 3월에 축성의 착수를 명하니 음력 4월에 시작하여 음력 9월에 완료하고, 이듬해에 임금이 행차하였다. 이 산성은 전시에 임금이 거처하고, 만일의 경우 도성의 백성도 수용함을 목적으로 하여 축조하였다. 성의 둘레는 7,620보이며, 문은 14개, 장대는 3개, 곽성은 26개, 우물 99개가 있었다.

성의 시설 및 건축물 편집

성문 편집

훈련도감 : 1개 홍예문 1개 수문 2개 암문 관리


수문(水門) 높이 16척(尺), 넓이 50척

북문(北門) 높이 11척, 넓이 10척. 홍예문(虹霓門)으로 만들다.

서암문(西暗門) 높이, 7척 넓이 7척

백운봉암문(白雲峯暗門) 높이 6척 3촌(寸)


금위영  : 2개 홍예문 2개 암문 관리


용암암문(龍巖暗門) 높이 6척 5푼[分] 넓이 7척 5푼

소동문(小東門) 높이 9척, 넓이 10척. 홍예문으로 만들다.

동암문(東暗門) 높이 6척 6촌, 넓이 6척 5촌

대동문(大東門) 높이 13척, 넓이 14척. 홍예문으로 만들다.


어영청 : 2개 홍예문 3개 암문 관리


대서문(大西門) 높이 11척, 넓이 13척. 홍예문으로 만들다.

청수동암문(淸水洞暗門) 높이 7척, 넓이 7척

부왕동암문(扶王洞暗門) 높이 9척, 넓이 8척

가사당암문(伽沙堂暗門) 높이 7척, 넓이 7척

소남문(小南門) 높이 11척, 넓이 11척. 홍예문으로 만들다.


출처 : http://db.history.go.kr/front2010/dirservice/BB/viewDocumentBB.jsp?PGubun=VIECH&pLevel=4&pDatabaseID=bb_063&pRecordID=bb_063_001_04_1220&pFlge=T


대서문(大西門) 편집

대서문(大西門) 높이 11척, 넓이 13척. 홍예문으로 만들다.


북한산성에는 6개의 대문과 7개 암문 1개 수문이 설치되었는데, 그 중 대동문(현 대성문) 다음으로 규모가 큰 문이 대서문이다. 대서문은 의상봉과 수문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성내부로 통하는 주 출입구로 사용되고 있다. ‘북한지’에 의하면 문은 홍예(虹蜺)로 만들어졌고, 초루가 설치되었다. 현재 성문의 육축부는 폭 19m, 높이 6m, 문지폭 7.9m이다. 타원형 홍예 출입구는 높이 4m, 폭 3.3m 이다. 홍예 양쪽에는 문루의 배수시설로 짐승의 얼굴을 형상화한 누혈을 하나씩 설치하였다. 문의 바깥쪽 홍예 안쪽에는 문비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육축은 3단의 기초석을 쌓아 평지를 조성한 후 8단을 석축하였으며, 그 위로 미석을 한줄로 놓고 여장을 설치하였다. 여장은 하나의 화강암을 깍아서 만들었으며, 그 가운데 20×30cm의 총안이 하나씩 뚫려있다. 육축부의 서쪽에는 성벽을 약간 밖으로 내어 쌓았다. 현재의 문루는 1950년대에 복원된 것이다.

수문(水門) 편집

수문(水門) 높이 16척(尺), 넓이 50척.


북한산성에는 6개의 대문과 7개 암문 1개 수문이 설치되었는데, 이 수문은 대서문과 서암문 사이의 계곡에 있다. 북한산성내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여 북한산내 모든 물이 이곳으로 흘러나온다. ‘북한지’에 의하면 문은 높이가 16척, 넓이가 50척 규모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흔적을 찾기 어려운 상태이며 계곡 옆 능선 위로 무너지 성벽이 남아있다. 다만 수문 주변 바위에는 축성 당시로 추정되는 구멍들이 여러군데 남아 있다.


서암문(西暗門) 편집

서암문(西暗門) 높이, 7척 넓이 7척.


북한산성에는 6개의 대문과 7개 암문 1개 수문이 설치되었는데,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게 만든 비상출입구로 그 중 하나이다. 원래 대서문과 더불어 소서문으로 만들 계획으로 홍예로 지웠으나 최종적으로 서암문이라 명하였다. 서암문은 수구문과 원효봉사이에 위치해있다. 외부와 내부를 모두 홍예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출입구는 높이 2.9m, 폭 2.6m 가량이다. 성안의 시체가 이곳을 통하여 밖으로 나갔다 하여 屍軀門이라고 불린다. 문 내부에는 성의 바깥쪽으로 문비(門扉)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성의 바깥쪽 서쪽 체성은 둥글게 튀어 나와 일종의 雉 혹은 문이 보이지 않도록 가려지도록 축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북문(北門) 편집

북문(北門) 높이 11척, 넓이 10척. 홍예문(虹霓門)으로 만들다.


북한산성에는 6개의 대문과 7개 암문 1개 수문이 설치되었는데, 그 중 북쪽에 위치한 북문은 원효봉과 영취봉 사이의 골짜기에 있다. ‘북한지’에 의하면 문은 홍예(虹蜺)로 만들어졌고, 초루가 설치되었다. 타원형 홍예 출입구는 너비 4m, 높이 3.35m이고, 육축부의 너비는 16m 가량 된다. 문의 바깥쪽 홍예 안쪽에는 문비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지금은 문루는 없으며 초석만 남아 있다.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 편집

백운봉암문(白雲峯暗門) 높이 6척 3촌(寸) .


북한산성에는 6개의 대문과 7개 암문 1개 수문이 설치되었는데,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게 만든 비상출입구로 그 중 하나이다. 백운봉과 만경봉사이에 위치해있다. 일제시대 이후 위문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방형의 문으로 출입구는 높이 1.7m, 폭 1.9m 가량이다. 문 내부에는 성의 바깥쪽으로 문비(門扉)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용암문(龍嚴門) 편집

용암암문(龍巖暗門) 높이 6척 5푼[分] 넓이 7척 5푼 .


북한산성에는 6개의 대문과 7개 암문 1개 수문이 설치되었는데,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게 만든 비상출입구로 그 중 하나이다. 용암봉과 일출봉사이 용암봉 아래에 위치해있다. 맨 처음 용암암문으로 불리우다가 일출봉 아래 용암사를 창건한 이후 이곳을 용암문이라 불리우고 있다. 방형의 문으로 출입구는 높이 1.8m, 폭 2.2m 가량이다. 육축부는 9m이다. 문 내부에는 성의 바깥쪽으로 문비(門扉)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대동문(大東門) 편집

 
대동문

초기 소동문(小東門)이라 불리었다. 높이 9척, 넓이 10척. 홍예문으로 만들다.


북한산성에는 6개의 대문과 7개 암문 1개 수문이 설치되었는데, 그 중 하나로 용암문 남쪽에 위치하며, 덕장봉과 복덕봉 사이에 있다. ‘북한지’에 의하면 문은 홍예(虹蜺)로 만들어졌고, 초루가 설치되었다. 현재 성문의 육축부는 폭 11m, 높이 3.5m이다. 타원형 홍예 출입구는 높이 3m, 폭 2.6m 이다. 문의 바깥쪽 홍예 안쪽에는 문비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성 내부쪽 무사석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금위영 자용암 지보현봉, 이천팔백이십보분십오, □□신미사월시후구원, 화축, 도청중군, 축응감관 이필신, 이후강, □□□□ 이희승, □□초관 □세흠’의 각자로 보아 금위영에서 만들었으며, 축성시 책임자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현재의 문루는 1993년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된 것이다.


보국문(輔國門) 편집

초기 동암문(東暗門)이라 불리었다. 높이 6척 6촌, 넓이 6척 5촌.


북한산성에는 6개의 대문과 7개 암문 1개 수문이 설치되었는데, 그 중 하나로 복덕봉과 성덕봉 사이에 위치해 있다. ‘북한지’에는 동암문으로 기록되었다. 방형의 문으로 출입구는 높이 2.2m, 폭 1.6m 이다. 문 내부에는 성의 바깥쪽으로 문비(門扉)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문 안쪽 좌측에 계단이 설치되었으며, 출입구 안쪽에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금영□□, 천일백팔십육보, 신유사월 일시역력, 월일화후, 편수김도□, 이□□’의 각자로 보아 금위영에서 만들었으며, 축성시 책임자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대성문(大成門) 편집

 
대성문

초기 대동문(大東門)이라 불리었다. 높이 13척, 넓이 14척. 홍예문으로 만들다.


북한산성에는 6개의 대문과 7개 암문 1개 수문이 설치되었는데, 그 중 하나로 문중에서 가장 크다. 화룡봉과 잠룡봉 사이에 위치해 있다. ‘북한지’에 의하면 문은 홍예(虹蜺)로 만들어졌고, 초루가 설치되었다. 현재 성문의 육축부는 폭 17m, 높이 5.2m이다. 타원형 홍예 출입구는 높이 4m, 폭 3.7m 이다. 홍예 양쪽 육축부 상단에 누혈이 한쌍씩 설치되었다. 문의 바깥쪽 홍예 안쪽에는 문비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은 없어졌으며,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금위영에서 축조한 것으로 바깥쪽 우측 육축부에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금영, 감조패장 장태흥, 석주편수 김선운’의 각자로 보아 축성시 책임자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현재의 문루는 복원된 것으로 구조는 이익공의 오량으로 겹처마에 우진각지붕이며,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대남문(大南門) 편집

초기 소남문(小南門)이라 불리었다. 높이 11척, 넓이 11척. 홍예문으로 만들다.


북한산성에는 6개의 대문과 7개 암문 1개 수문이 설치되었는데, 잠룡봉과 문수봉 사이에 위치해 있다. ‘북한지’에는 소남문으로 기록되었다. 홍예(虹蜺)로 만들어졌다. 현재의 문루는 복원된 것이다.


가사당암문(伽沙堂暗門) 편집

가사당암문(伽沙堂暗門) 높이 7척, 넓이 7척 .


북한산성에는 6개의 대문과 7개 암문 1개 수문이 설치되었는데,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게 만든 비상출입구로 청수동암문은 암문중 하나이다. 대남문과 부왕동암문 사이 남장대 서쪽에 위치해있다. 방형의 문으로 출입구는 높이 2m, 폭 2m 가량이다. 문 내부에는 성의 바깥쪽으로 문비(門扉)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부왕동암문(扶王洞暗門) 편집

부왕동암문(扶王洞暗門) 높이 9척, 넓이 8척.


북한산성에는 6개의 대문과 7개 암문 1개 수문이 설치되었는데, 그 중 하나로 가사당암문과 청수동암문 사이, 나월봉과 증취봉 사이에 위치해있다. 외부는 홍예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내부는 방형의 문으로 처음에는 남쪽에 위치해서 대남문과 더불어 소남문으로 명명하려고 하였으나 대남문을 소남문으로 격하시키면서, 부왕동암문이 되었다. 문 내부에는 성의 바깥쪽으로 문비(門扉)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청수동암문(淸水洞暗門) 편집

청수동암문(淸水洞暗門) 높이 7척, 넓이 7척.


북한산성에는 6개의 대문과 7개 암문 1개 수문이 설치되었는데, 그 중 하나로 대서문과 부왕동암문 사이, 의상봉 바로아래에 위치해있다. 성안에 국녕사가 있어 국녕문으로 불리기도 한다. 방형의 문으로 출입구는 높이 2m, 폭 2m 가량이다. 문 내부에는 성의 바깥쪽으로 문비(門扉)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중성문(中城門) 편집

북한산성에는 6개의 대문과 7개 암문 1개 수문이 설치되었는데, 그 중 하나인 중성문은 원효봉(元曉峯)과 의상봉(義相峯) 사이, 북한산성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북한산성 축성 후 1712년 숙종대왕의 행행하여 ‘서문 가장자리가 가장 낮으니 중성을 쌓지 않을 수 없다’며 속히 의논하여 쌓도록 명하였다. 숙종 38년(1712) 5월에 중성축조 공사를 착수하여 수문의 홍예 축조, 결성 보축과 함께 1714년까지 축성이 이루어졌다.

‘북한지’에 의하면 문은 홍예(虹蜺)로 만들어졌고, 초루가 설치되었다. 현재 성문의 육축부는 폭 13m, 높이 4.5m이다. 타원형 홍예 출입구는 높이 3.3m, 폭 2.7m 이다. 홍예 양쪽 육축부 상단에 누혈이 한쌍씩 설치되었다. 문의 바깥쪽 홍예 안쪽에는 문비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현재의 문루는 복원된 것이다.

중성문의 서쪽 암벽에는 방형문이 확인되는데, 기록상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문은 암벽을 다듬어서 벽으로 삼았으며, 높이 1.8m, 폭 2.4m, 길이 3m 가량으로 출입구 바깥쪽으로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구멍이 남아있다.

또한 중성문의 서쪽 아래에는 수구(水口)가 기록되어 있다. 중성문의 서쪽을 지나는 계곡의 반대편에는 무너진 성벽과 계단시설이 남아 있는데, 중성문과 일직선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 수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대 편집

북한산성동장대(北漢山城東將臺) 편집

 
동장대

북한산성내 설치된 3개소의 장대(동·남·북장대)중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북한산성 최고의 지휘소이다.

동장대는 三軍門의 하나인 금위영의 장수가 주둔하며 어수재를 비롯한 성내 시설물을 관리하기 위한 지휘·관측소로

북한지에 의하면 봉성암(奉聖庵) 뒷봉우리 시단봉에 위치하고 있는데 용암문에서 직선거리로 650m 떨어져 있으며, 해발고도는 586.0m이다.

기단은 정방형의 이중구조를 갖춘 중층 건물이다. 외부기단은 가로·세로 5.5m의 장방형으로 장주형 초석 12개를 배치했고, 내부 기단은 가로·세로 2.8m의 정방형으로 기단을 만들고 원형 초석 4개를 배치했다.

1996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 복원하였다.


북한산성남장대지(北漢山城南將臺址) 편집

북한산성내 설치된 3개소의 장대(동·남·북장대)중 하나이다.

남장대는 三軍門의 하나인 어영청의 장수가 주둔하며 행궁을 비롯한 성내 시설물을 관리하기 위한 지휘·관측소로 북한산 상원봉의 줄기인 나한봉(羅漢峯:현 715봉) 동북쪽에 위치한다. 현재는 기단석만 남아 있다.


북한산성북장대지(北漢山城北將臺址) 편집

북한산성내 설치된 3개소의 장대(동·남·북장대)중 하나이다.

북장대는 三軍門의 하나인 훈련도감의 장수가 주둔하며 성내 시설물을 관리하기 위한 지휘·관측소로 북한산 중성문(中城門) 서북쪽에 위치한다. 현재는 공터로 흔적만 남아 있다.


북한산성행궁지(北漢山城行宮址) 편집

북한산성 행궁은 북한산 상원봉 아래에 있으며, 북한산성의 동남쪽에 위치해 있다.

중성문을 지나 중흥사에서 남쪽 골짜기로 진입하여 10여분 거리에 북동쪽 동장대가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도성의 방위 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북한산성을 축성하고 임금이 거처할 수 있는 행궁을 만들었다. 숙종 37년(1711)에서 착수하여 이듬해 5월 완공하였다.

행궁의 규모는 내전 정전이 28칸, 외전 정전이 28칸, 부속건물 68칸 등 총 124칸에 이르며, 내전 정전은 좌우 상방이 각각 2칸, 대청이 6칸, 사면에 퇴가 18칸이며, 부속건물로 좌우 행각방이 9칸, 청이 5칸, 중문이 1칸, 대문 3칸, 수라간이 5칸, 중문이 1칸, 측소 2칸으로 이루어졌다. 외전 정전은 내전 정전과 체제가 같다. 부속건물로 대문 3칸, 북협문 1칸, 외북장중문 1칸, 외행각방 12칸, 루 4칸, 청 4칸이 있고 헛간이 2칸, 중문 2칸, 외대문 3칸, 북변외대문 1칸이 있다.

평상시에는 행궁에 北漢山文庫를 마련하여 고문헌을 비밀리에 보관하였으며, 역대왕 가운데 숙종과 영조가 이곳을 찾은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 외전이 있었던 곳은 수해로 지반이 유실되었으나 내전이 있었던 지역은 기단석과 계단, 주춧돌 등이 뚜렷이 남아있어 당시 내전과 행각의 배치상황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사찰 편집

중흥사지(重興寺址) 편집

중흥사는 고려초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다.

중흥사의 유물로 현전하는 1103년작 金鼓와 1344작 香垸이 남아있어 12세기초 이전에 이미 개창되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고려말 태고보우국사(太古普遇國師)에 의해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숙종 37년(1711년) 북한산성 축성 이후 산성의 수비를 위해 창건된 13개 사찰들을 관장하는 총섭이 거처하는 곳이다.

‘북한지’에 의하면 등안봉(登岸峰) 아래에 있으며, 30여칸의 규모에서 136칸으로 중건하고, 1828년에 대웅전과 만세루를 중건하였다고 한다.

1894년 화재와 1915년에 홍수로 석축이 허물어지고 遺址만 남아 현재에 이른다.


서암사지(西巖寺址) 편집

서암사는 조선 숙종 37년(1711년) 북한산성 축성 이후 산성의 수비를 위해 창건된 13개 사찰들 중 하나로

‘북한지’에 의하면 수구문(水口門) 안에 있으며, 133칸으로 승(僧) 광헌(廣軒)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고려 문인공 민지(閔漬:1248~1326)가 살았던 유지가 그 옆에 있었기 때문에 閔漬寺(민지사)로 불리었으나 후에 공의 휘(諱:이름)를 피해 사명을 고쳐 서암사라 하였다.

서암사는 수문일대의 산성 수비 역할을 담당하다가 19세기 말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절은 전하지 않는다.


태고사(太古寺) 편집

태고사는 고려말 공민왕(14세기 후반)때, 원증국사(圓證國師) 보우(普愚)에 의해 창건되었으나, 고려멸망 이후 거의 폐허가 되었다.

조선 숙종 37년(1711년) 북한산성 축성 이후 산성의 수비를 위해 다시 복원되었다.

‘북한지’에 의하면 태고대(太古臺) 아래에 있으며, 131칸으로 승(僧) 성능(聖能)이 중건하였다고 전해진다.

6.25전쟁 때 소실되었으나 다시 중건되었다. 경내에는 고려 禑王때 세운 태고사원증국사탑과 탑비가 전한다.


태고사원증국사탑(太古寺圓證國師塔) 편집

고려말의 승려인 원증국사 普遇(1301~1382)의 사리탑이다.

태고사 북쪽 봉우리 중턱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굴로 인해 쓰러져 있었는데 1980년 10월에 복원하였다.

부도는 2단의 널찍한 축단 중앙에 건조되어 있으며 탑신은 전체적으로 원형이지만 상부는 매우 좁은 편이다.

하대석은 방형으로 각 면에는 3구씩의 장방형 額을 새겼으며, 상면에는 연화문을 받침대를 조성하였다. 8각의 옥개석은 모서리의 전각마다 귀꽃이 장식되어 있는데, 그 사이에는 장막을 돌린 施文이 고려 시대 특유의 수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仰伏蓮은 대칭적이며, 중대석 각 면의 花紋과 함께 고려 시대 후기의 솜씨를 보여준다. 정상에는 원구형의 부재, 寶蓋, 화염보주 등이 놓여 있다. 우왕 11년(1385)에 탑을 세운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판단된다. 최근 비슷한 형식의 부도탑을 그 앞에 세워놓았다.


태고사원증국사탑비(太古寺圓證國師塔碑) 편집

현재 북한산 태고사 법당 우측에 목조와 화강암의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널찍한 정방형의 地臺石 위에 귀부를 안치하고, 그 위에 비신을 세웠으며 꼭대기에 이수를 놓은, 통일신라시대 이래 고려 시대까지 유행된 일반적인 탑비형식을 갖추고 있다.

비신은 장방형으로 앞면에 본문을 새기고, 뒷면에는 음기가 있으며, 앞면 윗부분에 ‘圓證國師塔銘’이란 6자의 題額이 있다.

이 석비는 고려 말의 명승인 普愚大師의 부도탑비로서 대사의 출생부터 입적에 이르기까지의 내력을 적은 것이다. 비각은 石柱만 남아있던 것을 1979년에 복원한 것이다.


상운사(祥雲寺) 편집

상운사는 조선 숙종 37년(1711년) 북한산성 축성 이후 산성의 수비를 위해 창건된 13개 사찰들 중 하나로

‘북한지’에 의하면 영취봉(靈鷲峯:현 염초봉) 아래에 있으며, 133칸으로 승(僧) 회수(懷秀)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경종 2년(1722)년 창건되었으며, 순조 13년(1813) 중창되었으며, 고종 원년에 극락전등을 중건하였다. 명성황후가 국가의 안녕을 위해 기도를 올리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6.25전쟁 때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다시 중건되었다. 경내에 오래된 향나무가 있다.


노적사(露積寺) 편집

노적사는 창건당시 진국사로 불리었으며, 조선 숙종 37년(1711년) 북한산성 축성 이후 산성의 수비를 위해 창건된 13개 사찰들 중 하나로

‘북한지’에 의하면 노적봉(露積峯) 아래에 있으며, 85칸으로 승(僧) 성능(聖能)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6.25전쟁 때 소실되었으나 1960년 다시 중건되면서 노적사라 하였다. 중성문 안에 있으며, 돌사자상이 전한다.


봉성암(奉聖庵) 편집

봉성암은 조선 숙종37년(1711년) 북한산성 축성 이후 창건된 11개 사찰과 2개 암자중 하나로

‘북한지’에 의하면 귀암봉(龜巖峰) 아래 위치한다. 25칸의 암자로 승(僧) 성능(聖能)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태고사 뒤편에 위치해 있으며, 경내에 성능대사부도가 남아있다. 6.25전쟁 때 소실되었으나 다시 중건되었다.


고양 봉성암 전성능대사부도(高陽奉聖庵傳聖能大師浮屠) 편집

북한산 태고사 뒤편의 봉성암 경내에 있다. 부도탑의 구조는 4개의 판석을 짜맞춘 方形 地臺石위에 방형 하대석과 중대석, 팔각모양의 상대석이 안치되었다.

그 위로 팔각의 탑신석 팔각의 옥개석,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팔각의 옥개석 일부는 현재 파괴되어 있으며 전체규모는 280cm에 이른다. 탑의 기단부 앞에는 74×70×59cm의 불규칙한 육면체 석재가 놓여져 있는데 부도탑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의 부도탑은 6.25당시 폭격으로 일부 파괴된 것을 복원한 것인데 완전한 상태는 아니며 탑신부의 부재는 소실된 상태이다.


국녕사(國寧寺) 편집

국녕사는 조선 숙종 37년(1711년) 북한산성 축성 이후 산성의 수비를 위해 창건된 13개 사찰들 중 하나로

‘북한지’에 의하면 의상봉(義湘峯) 아래에 있으며, 86칸으로 승(僧) 청휘(淸徽)와 철선(徹禪)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6.25전쟁 때 소실되었으나 다시 중건되었다.


국녕사 한월당 대선사 부도탑(國寧寺漢月堂大禪師浮屠塔) 편집

북한산성 중성문 방향에서 의상봉으로 오르는 등산로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데 국녕사 경내의 입구에 해당하는 곳이다.

돌과 시멘트로 만들어진 계단 위에 넓은 기단을 만들고 2단의 화강암 단과 사리석, 탑신을 안치했다. 전체적으로 탑은 가운데의 중간 부분이 가장 넓고 아랫부분과 맨 윗부분은 좁아진다.

꼭대기 부분에 蓮 봉우리 모양의 꼭지가 달린 鐘形이다. 부도의 정면에는 ‘漢月堂 大禪師’라는 刻字가 뚜렷하게 음기 되어 있다.


용암사지(龍巖寺址) 편집

용암사는 조선 숙종 37년(1711년) 북한산성 축성 이후 산성의 수비를 위해 창건된 13개 사찰들 중 하나로

‘북한지’에 의하면 일출봉(日出峯) 아래에 있으며, 87칸으로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절은 전하지 않으며 빈터 주위로 기단석 등 석재들과 기와편이 산재해 있으며, 북한산장 옆으로 용암사지 석탑이 남아 있다.


원각사지(元覺寺址) 편집

원각사는 조선 숙종37년(1711년) 북한산성 축성 이후 산성의 수비를 위해 창건된 사찰들 중 하나로

‘북한지’에 의하면 증봉(甑峰:현 증취봉) 아래에 있으며, 71칸으로 승(僧) 신초(信楚)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圓覺寺로도 표기되기도 하며, 부왕동암문 바로 아래 성내부에 위치한다. 현재는 절은 전하지 않으며 석축 30m 가량만 남아 있다.


원효암(元曉庵) 편집

원효암은 조선 숙종37년(1711년) 북한산성 축성 이후 창건된 11개 사찰과 2개 암자중 하나로

‘북한지’에 의하면 원효봉(元曉峰) 바로 아래 위치한다. 10칸의 작은 암자로 승(僧) 성능(聖能)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원효대사가 좌선하였다는 원효대가 부근에 있다. 의상봉과 마주하고 있으며, 절벽아래로 대서문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6.25전쟁 때 소실되었으나 다시 중건되었다.


보광사지(普光寺址) 편집

보광사는 조선 숙종37년(1711년) 북한산성 축성 이후 산성의 수비를 위해 창건된 사찰들 중 하나로

‘북한지’에 의하면 대성문(大成門) 아래에 있으며, 71칸으로 승(僧) 설휘(雪輝)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절은 전하지 않으며 빈터만 남아 있다.


보국사지(輔國寺址) 편집

보국사는 조선 숙종37년(1711년) 북한산성 축성 이후 산성의 수비를 위해 창건된 사찰들 중 하나로

‘북한지’에 의하면 금위영(禁衛營) 아래에 있으며, (1)77칸으로 승(僧) 탁심(琢心)과 명희(明凞) 등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절은 전하지 않으며 빈터만 남아 있다.


부왕사지부도(扶旺寺址浮屠) 편집

부왕사지 내에 있다. 원판형 지대석 위에 종형 탑신, 사각형 옥개석을 갖추었으며 높이 152cm, 身部 높이 92cm, 腹部 최대경 62cm이다.

부도의 한쪽 면에는 ‘○○堂○○之塔道○○年 三月日 上佐乃營 汶俊’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도관 연간(1821~1850)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산성내 문화재 편집

청하동문명문(靑霞洞門銘文) 편집

이 명문은 용학사 맞은편 골짜기 부황사 근처 바위에 새겨져 있다. 靑霞는 ‘푸른노을’이라는 뜻으로 이 명문은 ‘白雲洞門’과 같이 지명을 알려주는 표석이다. 북한산에는 이 외에도 곳곳에 지명을 알려주는 刻字가 있다.


북한산승도절목명문(北漢山僧徒節目銘文) 편집

이 명문은 북한산 용학사 아래 비석거리 내 화강암 암벽에 새겨져 있다. 명문의 기록을 보아 조선조 철종 6년(1855)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 모두 325자로 되어 있는 이 명문의 내용은 19세기 중엽 북한산성 내의 사찰이 피폐하고 승도가 흩어짐이 승병대장인 總攝의 책임인 바 그의 임용시 폐단을 없애기 위한 규칙을 새겨 놓은 것이다. 이 금석문 명문은 당시 불교계의 단편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규모는 가로 226.5cm, 세로 107.5cm이다.


북한산성금위영이건기비(北漢山城禁衛營移建記碑) 편집

조선 숙종 41년(1715) 조선 후기의 군사기관인 금위영을 옮긴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원래 금위영은 소동문(현 대동문)안에 있었으나 그 지세가 높아 비바람이 몰아치면 무너지기 쉬우므로 보국사 아래로 옮기게 되었다. 금위영 이건기비는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화강암의 비는 뒷면이 땅에 묻혀 있고 옥개는 장대석에 앞면에만 낙수면을 새겼다. 즉 臥碑의 형식으로 비문의 끝부분에 ‘乙未卽大明宗禎甲申後 七十二年也 都提調李頣命 識’이란 명문으로 보아 숙종 41년(1715)에 도제조 이이명이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비문에는 “숙종 37년(1711) 4월에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으로 하여금 백제의 옛 성인 북한산성을 나누어 다시 쌓게 하고 각 군영을 설치하도록 하여 군량을 저장하고 유사시에 대응하게 하라고 하니 그해 10월에 성곽의 보수가 완료되었다. 금위영은 용암 동남쪽에서 보현봉 아래까지 2,821보를 쌓았다. 4개 사찰이 성내에 있으며 군영의 막사와 창고 90여 칸은 3월에 4개 사찰 중 하나인 보국사로 옮겼다. 공사는 8월에 준공하였다”라고 새겨져 있다.


북한산성금위영유영지(北漢山城禁衛營留營址) 편집

금위영은 북한산성의 축성과 수비를 담당하였던 삼군문(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하나로 보광사 아래에 위치해 있다. 북한산성 축성시 용암 남쪽에서 보현봉까지 체성 2,821보, 여장 1,107첩과 용암암문, 소동문, 동암문, 대동문을 축조하였다. 축성 후 효율적인 산성 자치와 관리를 위하여 이곳에 대청 18칸, 내아 6칸, 양곡창고 54칸, 무기고 13칸, 중군소 5칸, 서원청 4칸, 월랑 8칸을 건립하여 유영을 두었다. 유영에는 유영감관(留營監官) 1원, 서원(書員) 1인, 고직(庫直) 2인, 수직군(守直軍) 1인, 사환군(使喚軍)․대성문직(大城門直) 각각 2인을 두었다.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금위영이건기비를 비롯하여 가로 4m, 세로2m 크기의 건물 기단, 주춧돌 9개, 돌계단 2개소, 장대석 7개, 석누조 1개가 있으며, 산기슭에는 무너진 담장터가 남아 있다. 부근에 산재한 20~30평 규모의 부속 건물터를 살펴보면, 둘레에 돌더미로 담장을 두른 것이 특색으로 대부분 성루가 있던 자리였으나 일부는 개울과 접해 있는 것으로 보아 평상시 물을 가두어 두는 못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북한산성어영청유영지(北漢山城御營廳留營址) 편집

어영청은 북한산성의 축성과 수비를 담당하였던 삼군문(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하나로 대성문 안에 위치해 있다. 북한산성 축성시 수문 남쪽에서 보현봉까지 체성 2,507보, 여장 986첩과 대서문, 청수동암문, 가사당암문, 소남문을 축조하였다. 축성 다음해인 숙종 38년(1712)에 효율적인 산성 자치와 관리를 위하여 이곳에 대청 18칸, 내아 7칸, 양곡창고 48칸, 무기고 10칸, 중군소 4칸, 서원청 2칸, 월랑 12칸을 건립하여 유영을 두었다. 유영에는 유영감관(留營監官) 1원, 서원(書員) l인, 고직(庫直) 2인, 수직군(守直軍) 1인, 사환군(使喚軍)․서문직(西門直)․중성문직(中城門直) 각각 2인, 문수문직(文殊門直) l인을 두었다. 어영청 유영은 19세기 말에 관리소홀로 방치되다가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없으며 오래된 석축, 주춧돌, 돌담 등이 흩어져 있다.


북한산성훈련도감유영지(北漢山城訓鍊都監留營址) 편집

훈련도감은 북한산성의 축성과 수비를 담당하였던 삼군문(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하나로 노적봉 아래에 위치해 있다. 북한산성 축성시 수문 북쪽에서 용암까지 체성 2,292보, 여장 704첩과 수문, 북문, 서암문, 백운봉암문을 축조하였다. 축성 후 효율적인 산성 자치와 관리를 위하여 이곳에 대청 18칸, 내아 8칸, 양곡창고 60칸, 무기고 16칸, 중군소 4칸, 낭청소 5칸, 서원청 5칸, 구류간 3칸, 행각 11칸을 건립하여 유영을 두었다. 유영에는 유영감관(留營監官) 1원, 서원(書員)1인, 고직(庫直) 2인, 수직군(守直軍) 1인, 사환군(使喚軍)․북문직(北門直) 각 2인, 수구문직 (守口門直) 1인을 두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없으며 총 길이 200m, 높이 7m에 이르는 긴 석축과 각 건물에 사용되었던 주춧돌, 기단석, 대석과 우물, 연못자리 등이 남아 있다. 대지 중간에는 2m 높이의 석단을 쌓고 그 위에 여러 채의 건물을 배치했던 흔적을 건물 기단과 19개의 주춧돌이 발견되며 간혹 원형의 주초석도 발견되고 있다. 대지 중간에는 또한 왼쪽으로 돌출된 또 하나의 연결된 석단이 나오는데, 이곳에도 기단과 주춧돌 3개가 있다. 건물 주춧돌 우측으로는 가로 7m, 세로 9m 규모의 연못이 현존하고 있는데 화강암 돌을 4각으로 깎아 쌓은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북한산성산영루지(北漢山城山映樓址) 편집

산영루는 북한산성내 중흥사 앞에 위치해 있는 조선후기의 누정이다. 태고사 계곡과 중흥사 계곡이 만나 합수되는 지점의 연못가에 위치하며, 산그림자가 수면 위에 비치는 곳이라 하여 산영루라 이름붙였다. 산영루의 첫 건립시기는 알 수 없으나 선조 36년(1603년) 이정구의 ‘유삼각산기’의 기록으로 보아 17세기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산영루는 북한산성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팔도도총섭이 자리한 중흥사 앞 계곡가에 세워져 있는데, ‘凸’자형의 평면구성을 하고 있는 정교한 건물로서 뛰어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전한다. 특히 북한산과 산영루를 유람하고 기록을 남긴 사람들만도 허목, 송상기, 이익, 이중환, 유광천, 이덕무, 이옥, 정약용, 김정희, 이계서, 신기선 등 이루헤아릴 수 없이 많다. 특히 추사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 성호 이익과 청담 이중환 등 조선 명사들의 흔적과 문향들이 많이 남아 있다. 시회의 장소로서 산영루는 몇 번의 중수를 거쳤는데 현재는 1915년과 1925년 홍수로 누각은 사라지고 초석 10매만이 남아 있다.


북한산성경리청상창지(北漢山城經理廳上倉址) 편집

조선 숙종 37년(1711) 북한산성 축성 이후 전란을 대비하여 양곡을 보관하던 창고터로 북한산성행궁 아래에 있다. 북한산성내에는 상창, 중창, 하창과 어공미를 보관하던 호조창 등 관성 4창과 훈창, 금창, 어창 등 삼군문 창고 3곳이 있었으며, 성 밖 탕춘대에는 평창이 있었다고 한다. 상창에는 “팔비헌(八非軒)”이라는 편액이 있으며, 관성장인 전통제사 이우의 글이 있었다고 한다. 상창의 규모는 대청 18칸, 내아 12칸, 향미고 63칸, 군기고 3칸, 집사청 3칸, 군관청 4칸, 서원청 4칸, 고지기집 5칸, 월랑 2칸, 각문 7칸 등이 있었으며 창고 기능 외에도 성내 사무를 총괄하는 관성소를 함께 두었으며 행궁을 관리하는 관성장이 근무하던 곳이다. 상창은 19세기 말에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산성중창지(北漢山城中倉址) 편집

조선 숙종 37년(1711) 북한산성 축성 이후 전란을 대비하여 양곡을 보관하던 창고터로 중흥사 앞에 있다. 북한산성내에는 상창, 중창, 하창과 어공미를 보관하던 호조창 등 관성 4창과 훈창, 금창, 어창 등 삼군문 창고 3곳이 있었으며, 성 밖 탕춘대에는 평창이 있었다고 한다. 중창의 규모는 대청 6칸, 향미고 78칸, 고지기집 5칸, 대문 2칸이다. 19세기 말에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산성하창지(北漢山城下倉址) 편집

조선 숙종 37년(1711) 북한산성 축성 이후 전란을 대비하여 양곡을 보관하던 창고터로 서문 안에 있다. 북한산성내에는 상창, 중창, 하창과 어공미를 보관하던 호조창 등 관성 4창과 훈창, 금창, 어창 등 삼군문 창고 3곳이 있었으며, 성 밖 탕춘대에는 평창이 있었다고 한다. 하창의 규모는 대청 6칸, 향미고 34칸, 고지기집 8칸, 대문 2칸이다. 19세기 말에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산성 선정비군(北漢山城善政碑群) 편집

이 선정비군은 노적사에서 태고사에 이르는 중간 지점 용학사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현존하고 있는 비의 숫자는 총 26기로 이 중에 옥개석을 모두 갖춘 것은 몇 기 되지 않으며 대부분 훼손된 상태이다. 비문에 새겨진 기록을 통해 본 비의 건립 시기는 모두 19세기 이후이다. 이 중 대표적인 선정비만 살펴보면, ‘摠戎使 申公櫶 愛民善政碑’는 同治 9年(1879) 10월에 건립된 것으로 높이 159cm, 너비 35cm, 두께 24cm의 규모이다. 비의 구조를 간단히 보면 대부분 기단은 특별히 축조하지 않고 자연 화강암에 비신을 꽂는 형태로 되어 있다. 비신의 모양으로 보아 본래는 모두 옥개석이 씌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비신과 떨어져 옥개석은 따로 방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비문은 앞면에만 표기되어 있고 뒷면에는 아무런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북한산성내 봉우리와 계곡 편집

[북한지에 기록된 峰(봉우리)] 편집

01)三角山(삼각산) - 山有(산유) 仁壽(인수), 白雲(백운), 萬景(만경) 三峰屹立(삼봉흘입) 巑岏(찬영) 如三角焉(여삼각언).

02)仁壽峯(인수봉) - 卽三角山之第一峯(즉삼각산지제일봉).

03)白雲峯(백운봉) - 在仁壽峯西(재인수봉서).

  백운봉암문(白雲峯暗門) 높이 6척 3촌(寸)

04)萬景峯(만경봉) - 在白雲峰南(재백운봉남).

05)露積峯(노적봉) - 在萬景峯西(재만경봉서).

06)龍巖峯(용암봉) - 在萬景峯南(재만경봉남).

  용암암문(龍巖暗門) 높이 6척 5푼[分] 넓이 7척 5푼

07)日出峯(일출봉) - 在龍巖峯前(재용암봉전).

08)月出峯(월출봉) - 與日出峯竝峙(여일출봉병치).

09)起龍峯(기룡봉) - 在月出峯前(재월출봉전).

10)盤龍峯(반룡봉) - 在起龍峯傍(재기룡봉방).

11)柴丹峯(시단봉) - 在盤龍峯南(재반룡봉남).

12)德藏峯(덕장봉) - 在柴丹峯南(재시단봉남).

  소동문(小東門) 높이 9척, 넓이 10척. 홍예문으로 만들다.

13)福德峯(복덕봉) - 在德藏峯南(재덕장봉남).

14)釋迦峯(석가봉) - 在東門外靑藪洞上(재동문외청수동상).[동문=동암문]

  동암문(東暗門) 높이 6척 6촌, 넓이 6척 5촌

15)聖德峯(성덕봉) - 在釋迦峯西(재석가봉서).

16)化龍峯(화룡봉) - 在聖德峯傍(재성덕봉방).

  대동문(大東門) 높이 13척, 넓이 14척. 홍예문으로 만들다.

17)潛龍峯(잠룡봉) - 在化龍峯近西(재화룡봉근서).

18)普賢峯(보현봉) - 在大西門外(재대서문외).[대동문의 오기]

  소남문(小南門) 높이 11척, 넓이 11척. 홍예문으로 만들다.

19)文殊峯(문수봉) - 在普賢峯西(재보현봉서) 峯下(봉하) 有文殊窟(유문수굴)

  가사당암문(伽沙堂暗門) 높이 7척, 넓이 7척

南將臺(남장대) - 在羅漢峯東北(재나한봉동북)

20)蘿月峯(나월봉) - 在歡喜峯南(재환희봉남).

  부왕동암문(扶王洞暗門) 높이 9척, 넓이 8척

21)甑炊峯(증취봉) - 在蘿月峯西(재나월봉서).

22)龍穴峯(용혈봉) - 在甑炊峯西(재증취봉서).

23)龍出峯(용출봉) - 在龍穴峯西(재용혈봉서).

  청수동암문(淸水洞暗門) 높이 7척, 넓이 7척

24)彌勒峯(미륵봉) - 在龍出峯西(재용출봉서). [현 의상봉]

  대서문(大西門) 높이 11척, 넓이 13척. 홍예문으로 만들다.
  수문(水門) 높이 16척(尺), 넓이 50척
  서암문(西暗門) 높이, 7척 넓이 7척

25)元曉峯(원효봉) - 在水口有元曉菴(재수구유원효암).

  북문(北門) 높이 11척, 넓이 10척. 홍예문(虹霓門)으로 만들다.

26)靈鷲峯(영취봉) - 在元曉峯上(재원효봉상). [현 염초봉]

27)侍者峯(시자봉) - 在白雲臺下(재백운대하) 登臨可盡北漢之一城形勢(등임가진북한지일성형세)

  올라가 보면 북한산성의 형세를 자세히 볼 수 있다 [현재의 말바위 부분]

28)麒麟峯(기린봉) - 在露積峯下(재노적봉하).

29)將軍峯(장군봉) - 在中興寺西(재중흥사서) 高麗崔瑩所留(고려최영소류) 故名云(고명운).

30)登片峯(등편봉) - 在將軍峯之上(재장군봉지상) 中興寺之後(중흥사지후). [등안봉의 오기]

31)龜巖峯(귀암봉) - 在東將臺下(재동장대하).

32)上元峯(상원봉) - 在文殊峯北(재문수봉북).

33)鵂巖峯(휴암봉) - 在南將臺北(재남장대북).



[북한지에 기록된 洞(계곡)] 편집

 長春洞(장춘동) - 自水口(자수구) 至白雲橋下(지백운교하).

1)장춘동은 수구에서 백운교 아래까지이다

(풀이)

-백운교[등운각근처 합수점]를 중심으로 계곡의 이름이 나누어지 짐.

-백운교는 계곡의 합수점 근처인 등운각 근처에 설치된 교량으로 추정.

-장춘동은 수문지에서 등운각 합수점까지의 계곡


 玉流洞(옥류동) - 自白雲橋(자백운교) 至萬景峯下(지만경봉하).

2)옥류동은 백운교에서 만경봉 아래까지이다

(풀이)

-등운각 근처 백운교에서 갈라지는 계곡은 청계동과 옥류동 두 계곡

-옥류동은 등운각 합수점에서 만경봉 방향의 계곡


 淸溪洞(청계동) - 自白雲橋上(자백운교상) 至靑雲橋下(지청운교하).

3)청계동은 백운교 위쪽에서 청운교 아래까지이다

(풀이)

-청운교는 현재의 중성문 밖[용유동과 노적동의 합수점 근처]에 위치한 교량으로 추정

-청계동은 백운교[등운각 합수점]에서 청운교[용유동과 노적동의 합수점]까지의 계곡으로 추정


 露積洞(노적동) - 在露積峯下(재노적봉하).

4)노적동은 노적봉 아래쪽에 있다.

(풀이)

-노적봉 아래쪽인 청운교[용유동과 노적동의 합수점]에서 강선교[영천동과 백운동 합수점]까지의 계곡


 靈泉洞(영천동) - 在露積峯下(재노적봉하) 其上(기상) 有靈泉窟(유영천굴) 其下(기하) 有降仙橋(유강선교).

5)영천동은 노적봉 아래쪽에 있다. 그 위쪽에 영천굴이 있고 아래쪽에 강선교가 있다.

(풀이)

-강선교는 노적사 근처 정자 있는 곳인 영천동과 백운동 합수점에 있는 것으로 추정

-영천굴는 노적봉 방향에 있을 것으로 추정.

-영천동은 강선교[영천동과 백운동 합수점]에서 영천굴[노적봉 방향]까지의 계곡으로 추정


 白雲洞(백운동) - 在將軍峯下(재장군봉하) 洞門(동문) 刻白雲洞門(각백운동문) 四字(사자).

11)백운동은 장군봉 아래쪽에 있다. 계곡길(동문)에 백운동문 넉자를 새겨 놓았다.

(풀이)

-백운동문은 노적사 갈림길과 용화사 갈림길 사이에 있는 점을 감안하면

-백운동은 강선교[영천동과 백운동 합수점]에서 환선교[중흥동과 부왕동의 합수점]까지의 계곡으로 추정



 重興洞(중흥동) 

-- 따로 설명이 없으나

환선교[중흥동과 부왕동의 합수점]에서 용암동 합수점[용암동과 용계동의 합수점] 까지의 계곡으로 추정


 叫龍洞(규룡동) - 自重興洞口上(자중흥동구상) 至武學堂下(지무학당하).

8)규룡동은 중흥동 입구 위에서 무학당 아래까지이다

(풀이)

-중흥사지 합수점[중흥사계곡과 태고사계곡의 합수점]에서 만경봉 방향으로 3개의 계곡이 나온다. 이중 첫번째 계곡으로

-무학당의 위치가 핵심포인트이다. 봉성암 왼쪽 계곡으로 올라가면 위에 월출봉과 기룡봉 사이로 나온다.


 龍溪洞(용계동) - 在龍巖洞口(재용암동구) 日出峯下(일출봉하).

7)용계동은 용암동 입구 일출봉 아래쪽에 있다

(풀이)

-중흥사지 합수점에서 만경봉 방향으로 3개의 계곡이 나온다. 이중 두번째 계곡으로 용암동이 있다.

-현재 중흥사지 위 용암동 입구에서 일출봉 아래까지 이어지는 계곡으로 추정

-이 계곡을 쭉 올라가면 일출봉과 월출봉 사이로 나온다



 龍巖洞(용암동)

--따로 설명이 없으나

용암봉에서 중흥사로 내려오는 용암봉 지능선 아래 계곡으로 추정.

용암봉 지능선과 일출봉 사이의 계곡으로 추정되며 이계곡을 따라 쭉 올라가면 용암문이 나온다.


 隱仙洞(은선동) - 在中興洞上(재중흥동상) 萬景峯下(만경봉하).

6)은선동은 중흥동 위, 만경봉 아래쪽에 있다

(풀이)

-중흥사지 합수점에서 만경대 방향으로 3개의 계곡이 나온다. 이중 세번째 계곡으로

-중흥사지에서 만경대로 이어지는 계곡으로

-중흥동 위쪽 즉 구체적으로는 용암동과 분리되는 지점부터 만경봉 아래까지로 추정.


 潛龍洞(잠룡동) - 在上元峯下(재상원봉하).

9)잠룡동은 상원봉 아래쪽에 있다

(풀이)

-잠룡동은 대성문과 대남문 사이의 봉우리인 잠룡봉과 관계가 있는 명칭으로 추정

-잠룡봉이 대성문 근처 봉우리인 점을 감안하면

-중흥사지 합수점[중흥사계곡과 태고사계곡의 합수점]에서 시작하여 잠룡봉[대성문과 대남문 사이] 까지의 계곡으로 추정



 龍遊洞(용유동) - 在甑峯下(재증봉하).

10)용유동은 중봉 아래쪽에 있다

(풀이)

-중봉이란 의상능선상의 증취봉을 말하며

-증취봉과 용출봉용혈봉 사이에서 발원하여 법용사로 내려오는 합수점까지의 계곡

-증취봉 아래에서 청운교[용유동과 노적동의 합수점]까지의 계곡



 紫霞洞(자하동) - 在仙遊臺下(재선유대하).

12)자하동은 선유대[유선대] 아래쪽에 있다.

(풀이)

-환선교2[부왕동(扶旺洞)과 자하동의 합수점]인 유선대 근처에서 학현[나월봉과 환희봉 사이 안부]까지의 계곡으로 추정


 扶旺洞(부왕동) 

--따로 설명이 없으나

부왕사(扶旺寺)에서 발원하여 용학사 갈림길까지 이어지는 계곡으로 추정


 扶王洞(부왕동) 

--따로 설명이 없으나

부왕동암문[환희령]에서 발원하여 삼천사와 신혈사 갈림길까지 이어지는 계곡으로 추정



 淸水洞(청수동) 

--따로 설명이 없으나

중골(백화사)에서 청수동암문[현 가사당암문] 까지의 계곡으로 추정


 靑藪洞(청수동)

--따로 설명이 없으나

석가봉에서 정릉에 이르는 계곡. 현재는 淸水洞(청수동) 이라고 부른다.

관광정보 편집

관련 드라마 편집

같이 보기 편집

함께 보기 편집

주석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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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臨亂移御處

바깥 링크 편집

틀:대한민국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