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Hanet/연습장

안산시(安山市)는 대한민국 경기도 서부 서해안에 있는 이며, 수도권 서울위성도시 중 하나로서 서울 도심에서 남남서쪽으로 31Km 거리에 있다.

수도권의 공업도시로써 개발 되어 반월국가산업단지, 시화국가산업단지 배경으로 조성된 계획 도시로 발전해 현재 인구 약 70만이 생활하는 도시이다.

고대시대부터 좋은 수산물와 소금로 유명한 중부지방의 어촌으로써, 일찍부터 현재의 경기도 시흥시 남부지역과 함께 하나의 지역으로써 읍성과 어시장이 형셩되어. 수리산 서쪽에 해당하는 현재의 상록구 안산동 지역인 수암 지역을 중심으로 중부지방의 주요 고을로 발전했다. 특히 중국으로 가는 주요 포구 중 하나인 마포의 길목에 위치했으며 관내에도 잿머리 포구에서 무역이 시작되었고, 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여러 사대부들이 자리 잡았던 지역이 되었다.[1] 이 지역은 ‘안산(安山)’이라는 이름으로 고려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알려졌고, 조선 초기부터 연성(蓮城)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2] 또한 조선 시대의 실학자 성호 이익이 활동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3][4]





도로 편집

비교적 안산 외곽지역 변두리 지역으로 서해안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평택시흥고속도로가 위치해 있으며, 안산 지역의 국도는 국도 제42호선, 국도 제39호선, 국도 제77호선가 지나간다. 국도 제42호선의 일부인 수인산업도로가 안산 동부지역을 지나가며 안산시의 주요 도로인 중앙대로, 용신로, 삼일로. 해안로 등의 도로들과 직접 연결된다. 이 때문에, 다수의 고속버스 및 시외버스 노선이 수인산업도로를 이용하여 운행되고 있다.

국도 편집

39번 국도는 특히 경기 서북부 서남부 및 충남 지역을 남북으로 연결되는 도로로써, 반월신공업도시 건설 시기였던 1981년 3월 14일에 지정되어 안산동 읍내 일대가 인천수원을 연결한 42번 국도와 교차 되어. 여러 마을들은 비포장 도로와 농경 도로로 연결되었다. 1977년에는 42번 국도의 일부인 수인산업도로의 개통 등 안산 지역은 본격적으로 도로 교통의 발달이 시작되었다. 도시 형성 초기 전부터 수인산업도로의 경유하는 지역으로써 태화상운 소속의 시외버스가 인천-수원을 연결함에 따라 인근 도시 지역과 대중 도로 교통이 연결하기 시작했다. 70년 후반부터 80년대까지 반월신공업도시 (현 안산시) 조성으로 시가지 도로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시가지 형성 후에는 39번 국도는 안산 시내에서는 산단로 중앙대로 이름으로 있으며, 42번 국도 일부인 수인산업도로와 팔곡동 반월동 부근에 일부 겹친게 되었다. 42번 국도수인산업도로는 동부 시외곽 지역의 주요 간선도로 역할과 중앙대로, 삼일로 등이 연결되었으며, 39번 국도산단로, 중앙대로로 도로 자체가 시내 간선도로에 편입하게 되었다. 77번 국도는 안산시 경유 도로명은 별망로로써 원래는 일반도로 였으나 2001년 8월 25일에 장기간 해안 도로 연결 사업으로 포함되어 국도로 개편되었다. 현재 77번 국도는 시화산업단지, 반월산업단지 해안선 따라 동서방향로 연결하며, 화성 송산 남양로 방면으로는 아직 미연결상태로 원래 바다였던 경기만였던 지금의 시화호 두고 끊겨 잇다.

고속도로 편집

안산 지역에서 첫번재 고속도로 등장은 현 영동고속도로의 연장선인 당시 신갈-안산고속도로로써 초장기에는 임시적으로 안산 나들목수인산업도로와 직접 연결되다가 현 양상동 위치로 옮겨졌다. 과거의 서해안고속도로의 일부 구간인 인천 나들목 ~ 안산 나들목 구간이 1994년 7월 6일 개통되었으며 서안산 나들목이 설치 되었다. 서울안산고속도로 개통에 이어서 서해안고속도로 일부 구간(안산-포승)이 개통되면서 신갈안산고속도로안산 분기점이 형성하게 되었다.

2001년 8월 25일 고속도로 개편으로 서울안산고속도로서해안고속도로로 개편되고, 기존 서해안고속도로의 서창 분기점 ~ 안산 분기점 일부 구간과 신갈안산고속도로와 기존의 영동고속도로와 함께 영동고속도로로 개편하게 되었다.

서해안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가 만나는 안산 분기점이 존재하며, 영동고속도로 서안산 나들목안산 나들목을 통해 고속도로로 진입할 수 있다. 그러나 영동고속도로 하행선 진입 시에는 서안산 나들목과 안산 나들목보다는 반월 인근의 군포 나들목이 비교적 많이 이용되며, 서해안고속도로 하행선 이용시 매송 나들목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제2서해안고속도로 일부 구간인 평택시흥고속도로2013년 3월 28일에 개통 함에 따라 남안산 나들목이 반월스마트허브 (반월산업단지)와 연결되어 안산 서부 지역에서 인천 방면 및 서평택 방면의 진출입이 더 용이해졌다.



주로 세균배양에 쓰인다. 특정 세균만 선택 배양하는 순순분리에 한천 평판 배치 (Agar Plate) 미생물 배양기술분야의 선구자는 코흐 배지 겔(Gel) 상태로 만들어 사용했던 젤라틴은 미생물 분해로 흑느적거리 미생물 분리에 불편 그의 아내를 통해 동료의사 헤세의 조언 1881년 우뭇가사리에서 나오는 한천으로 강력한겔 제조 가능함을 한천으로 표면 처리한 유리 수비게 미생물 배양

명칭 및 역사 편집

근대 교육 이후의 초등교육기관에는 '학사'나 '학당'이라는 명칭이 쓰인 동시에 대한제국 1895년에는 소학교 이름으로 초등교육기관이가 설립되었으며, 한일병합 후인 1906년 보통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38년 다시 소학교로 명칭이 바뀌어 1941년 국민학교로 개편되었고, 1996년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대한제국의 소학교은 1895년에 서울에 관립소학교가 설립 시작으로 1896년 공립소학교수는 전체 38개릐 공립소학교와 사립소학교도 설립되어 1905년을사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서울에 관립 10개교, 지방에 공립 50개교가 전국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서울에는 1895년 '소학교령' 공포 직후 심상소학교로서 수하동, 장동. 정동, 재동. 양사동 소학교가 설치된 데 이어 미동, 양현동, 주동, 안동 소학교가 설치되었다.

고등소학교로 교동소학교가 설립되었으나, '소학교령' 공포 후 10년 동안 고등소학교는 교동소학교 하나 밖에 없었다. 당시 고등소학교는 심상소학교 졸업생에게 시험을 치르게 해서 입학시켰다.

1895년 지방에는 각 관찰부 소재지, 즉 수원, 공주, 충주, 광주(光州), 전주, 진주, 대구, 춘천, 평양, 영변, 해주, 함흥, 경성(鏡城)에 공립 심상소학교가 1개교씩 설립되었다. 1896년에는 학부가 지정한 곳인 개성, 강화, 인천, 안산, 부산, 원산, 경흥, 제주, 양주, 파주, 청주, 홍천, 임천, 남원, 순천, 영광, 경주, 안동, 의주, 강계, 성천, 원주, 강릉, 북청 등지에 소학교가 설립되었다. [5]


소학교 교원은 주로 한성사범학교 통해서 교원을 임용했으며, 외국인 교사도 임용이 되었다.

교과서는 수신·독서, 작문을 위한 소학·역사·지리 등의 편찬 교과서와 일본 교과서를 번역·수정한 산술교과서를 사용했다.

소학교의 편제는 3년제의 심상과와 2, 3년제의 고등과로 나누어 실제 수업 연한은 5년, 6년으로 되어 있었다. 또한 만 8세부터 15세까지를 학령으로 정하였으며, 각 부·군은 관내의 학령 아동을 취학시키기 위한 공립소학교를 세우도록 하였다.

소학교 교과목은 심상과(尋常科)의 경우 필수 과목으로 수신, 독서, 작문, 습자, 산술, 체조 등이 있었으며, 선택 과목으로 본국지리, 본국역사. 도화, 외국어 등이 있었는데, 그때 사정에 따라 학부 대신의 허가를 얻어 체조 대신 한국지리·역사·도화·외국어 가운데 한 과목 또는 몇 과목을 더할 수 있으며, 여학생을 위하여 재봉과목을 더할 수 있었다.

고등과의 경우는 교동소학교 제외한 대부분의 소학교에는 고등과가 설치되지 않았다. 고등과의 교과목은 수신, 습자, 산술, 본국지리, 본국역사, 외국역사, 이과, 도화, 체조 등으로 하고 여학생을 위하여 재봉 과목을 더할 수 있었다. 역시 사정에 따라 외국어 한 과목을 더할 수 있었으며, 외국역사·외국지리·도화 중에서 한 과목 또는 몇 과목을 제외할 수 있었다. [6]

대한제국의 근대화 개혁으로써 교육정책의 기반을 놓으려는 시도를 거의 10년 동안 했으나, 일본에 의한 국권 침탈로 인해 대한제국의 권한이 점점 사라지는 시기가 됩에 따라서 정부에서는 재정적인 뒷받침을 충분히 해주지 못하였다. 일반 국민도 초기에는 근대화된 형태의 신교육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아직 부족하였기 때문에 여전히 주로 한문 습득에 주력이 되었으며, 이과(理科)에 관한 교육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대한제국 말기와 일본제국 치하 초기에는 계몽주의 및 민족적 독립 관련해 교육의 중요하게 여기는 신지식인들이 형성됨에 따라 사립 교육 사업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일병합1906년 8월에는 일본제국통감부에 의해서 학제를 개정함에 따라 기존의 조선인의 위한 소학교의 명칭이 모두 '보통학교'로 바뀌었고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위한 초등교육기관만 '소학교'로 칭했다. 수업연한을 6년에서 4년으로 줄이는 동시에, 심상과·고등과를 하나로 통일하였다. 이 후 명칭이 1938년에는 모든 초등교육기관의 명칭이 소학교로 통합함에 따라 기존의 주로 조선인들이 교육받던 보통학교를 '심상 소학교'로 바뀌다가 다시 1941년에 모든 초등교육기관의 명칭이 '국민학교'로 바뀌었다. 하지만 '소학교', '국민학교'로 명칭은 같아졌으나 상당수 학교가 일본인학교와 조선인학교로 여전히 나뉘어 있었다. [7] [8]

교육 목적은 아동 신체의 건전한 발달에 유의하여 국민 도덕을 함양하고 국민생활에 필수적인 보통 지능을 얻게 함으로써 (일본제국)의 충실하고 선량한 황국신민을 만든다는 데 두었다. 특히 일제의 민족 말살정책 단계에서는 초등교육에서부터 한국의 민족 정신을 없애고 일본화 하려는 데 목표를 두었다.

일본제국 치하에 개편한 조선의 소학교에는 6년제 심상소학교와 2년제 고등소학교를 두었다. 다만 심상소학교는 당분간 4년으로 설치하도록 하였으며, 고등소학교는 3년으로 연장할 수 있었는데, 고등소학교는 주로 일본인 학교를 제외한 조선인 학교에서는 제도상으로 존재할 뿐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심상소학교의 교과목은 수신, 일본어, 산술, 국사, 지리, 이과,직업, 도화, 수공, 창가, 체조 등이었으며, 여학생을 위하여 가사와 재봉과목을 더할 수 있었다. 조선어(한국어)는 정규과목에서 제외되고 수의과목(선택과목)으로 하였으나, 실제로 수업에 제한을 두거나 없애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등소학교는 심상소학교의 교과목 외에 기타 지역의 상황에 따라 필요한 교과목을 과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96년 3월 1일부터 '국민학교'의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었다. 이는 '국민학교'의 명칭이 1941년 일제 칙령에 의해 바뀌었고, 군국주의적 색채가 있다는 지적에 따른 것으로, 구 총독부건물 철거와 함께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시도로 이루어졌다.[9] [10]

  1. 다시 쓰는 택리지 1권 일부 참조.
  2. 현재의 경기도 시흥시에 중부지역에 위치한 연성동 일대로써 과거에는 이 지역이 안산군에 해당되며, 이 지명의 유래와 ‘연성’은 동일한 뜻이다.
  3. 이익이 활동하던 안산은 당시 광주군(廣州郡)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광주시 일대에서 활동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있기도 하다.
  4. 재야 학자 성호 이익의 실학사상 下 경향신문, 2008년 6월 6일.
  5. 1894년 7월 학무아문 고시를 통해 신분차별을 없앤 교육기회 개방, 학령 개념의 도입, 학기제 운영, 전문적 교원 양성 등의 근대적 형식을 갖춘 소학교 설립 계획이 반포되었고, 1895년 학무아문이 학부로 재편된 후 신학제의 제정에 따라 7월 19일 '소학교령'이 공포하여 초등교육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 학부령 제3호로 '소학교규칙대강'을 공포하였다. '소학교령'에 나타난 교육 목적은, 아동의 신체발달에 비추어 국민교육의 기초와 생활에 필요한 보통 지식 및 기능을 갖추게 하기 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1896년 2월 학부령 제1호로 '보조공립소학교규칙'을 공포하여 공립소학교에 대한 국고금 보조를 법적으로 강화하였다. 1896년 대한제국에서 발행한 관보 제434호에 전국 각 지방에 36개 공립소학교를 설치한다는 내용이 있으며, 대한제국 정부는 사립소학교에 재정지원을 하고 지방장관 감독을 받도록 했다.
  6. 그리고 심상과 및 고등과의 교과목을 가감 할 때는 학부 대신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는데, 이들 각 과목에 대한 교수 요지는 '소학교교칙대강'에서 밝히고 있으나 사립소학교의 경우에는 이러한 저촉을 받지 않았던 것 같다. 또한 교과서는 학부가 편집한 것 또는 학부 대신의 검정을 받은 것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교원은 검정시험에 합격한 사람 가운데에서 관립은 학부 대신, 공립은 관찰사가 임명하였으며, 필요에 따라 외국인 교사도 채용할 수 있게 하였다.
  7. 국권 상실 뒤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과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에서도 소학교를 보통학교라고 부르다가,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에서 보통학교를 다시 소학교라고 부르게 되었다.
  8. 50여년 만에 벗은 일 잔재 오명 - 「국민학교」 명칭 변경 의미, 《서울신문》, 1995.8.12. 참고로, 1945년 이후 일본은 미국의 강요로 소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9. 국민학교 ‘초등학교’로 바뀐다, 《한겨레》, 1995.8.12.
  10. 國敎(국교)명칭 초등학교로 바뀐다 1995.8.12 경향신문 2011-09-0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