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자료 {{{1}}} |국기그림/구현 |변수=공군 |크기= }} [[{{나라자료 {{{1}}} |나라이름/구현 |변수=

}} 공군]]

당시 해군이 주릅잡던 미국 군계에서 처음으로 해군의 독주에 제동을 건 사람이다ㅡ 1920년대 고작 육군항공대 부사령관으로서 엄청난 혁명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기존 항공기로 어떠한 함선도 격침시킬 수 있다는 것을 최초로 부르짖은 사람으로 유명하다. 즉, 미국 해안에 접근하는 외국 해군 함정을 항공기로 제거해 버릴 수 있다면, 외국 항공기도 똑같이 미국 함정을 무력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미 해군이 더 이상 미군력을 대표하여 해외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는 커녕, 미국령 도서를 방어하기에도 쓸모가 없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독일 패망 후(일차대전), 차기 전쟁은 일본과의 충돌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미첼 대령은 이러한 자신의 이론과 주장을 실증하기 위해 시범에 나섰다. 육군측은 물론 해군이 집요하게 저지해도 실행에 옮긴다. 1921년 버지니아 케입스 앞바다에 독일로 부터 획득한 전함을 늘어 놓고 육군 항공대가 폭격하는 실험을 수행한다. 우선 잠수함 한 척을 폭격으로 침몰시킨다. 구축함, 순양함에 이어 침몰이 불가능 하다는 전함 "오스트프리즈란드"마저 완파시켜버린다.  계속해서 폐함이 된 전함 앨러버머도 간단히 침몰시킨다... 강력하고 신속한 전폭기를 생산해야하고 적절한 정찰기를 개발하여 적기를 사전에 요격하며 의폭격 시도를 봉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간단히 말해서, 미첼 대령은 육군항공대가 욱군으로부터 독립해야함과 동시에 제3군, 즉, 공군으로 개편되기를 원한 것이다. 그는 미국 육해군 사령관들이 항공기의 위력과 문제점에 무지를 들어냈고 무관심 하다는는 것을 공표한다. 1924년 10월, 진주만 공격이 있기 17년전, 미첼 대령은 323페이지에 달하는 태평양 및 극동 보고서를 제출한다. 이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이 예언했다. "언젠가 일본은 태평양에서 우위를 걸고 미국과 전쟁을 불사할 것입니다. 일본의 전쟁개시는 어느 날 동틀 무렵, 항공모함의 함재기들이 남모르게 진주만, 스코필드 병영 및 항공기지를 공습하는 것으로 시작할 것입니다." 이 보고서는 전쟁성(현 국방성) 문서함에 파묻혀 버리고 만다. 미첼 대령은 이 보고서로 당시 해군성과 전쟁성의 무능을 공격한 죄로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군기 및 불명예 죄로 5년간 자격정지 처분을 받게 된다. 그는 스스로 자진 퇴역하고 10년 후인 1936년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