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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단 운동의 영향과 평가편집

영향 1― 중국 내부에 끼친 영향―편집

다시금 강조할 필요도 없이 의화단 운동은 국내외에 여러 영향을 끼쳤다. 우선 국내에 끼친 영향에 대해 설명한다.

1. 총리아문의 폐지와 외무부의 창설
이것들은 베이징의정서에서 나타낸 것처럼 열강의 강한 의향에 따라서 실현 된 것이다. 제2차 아편 전쟁 이후 청나라 조정의 외교를 담당해온 총리아문이 청나라 조정의 관청내에서 차례로 지위가 격하된 것에 불만을 품어온 나라들이 청나라 조정에게 외교를 중시하는 것을 요구한 결과 총리아문을 폐지하고 외무부를 세우게 되었다. 또한 외무부는 다른 관청보다 상위 조직으로 되었다.
2. 광서신정(光緒新政)의 시작
베이징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외세를 배척하는 자세에서 벗어나서 70세가 가까운 나이임에도 영어를 배우는 등 서구 문명에 실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중 가장 전형적인 방침의 전환은 이른바 광서신정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은 입헌군주제의 이행, 군의 근대화, 경제 진흥, 과거 폐지를 범위에 넣은 교육개혁을 목표한 것으로 방향성은 수년전 서태후가 소멸한 캉유웨이 일당의 무술변법과 같은 것이었다. 이에는 서구화에 강하게 반대한 보수세력이 베이징의정서에 의해 제거된 것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3. 섭사성의 무위전군의 북양군 멸망에 의한 위안 스카이의 대두
의화단운동에서 직접 예속된 총리에게 소속되어있던 근대화된 군대는 연합군에게 져서 큰 타격을 입었으나 위안 스카이의 군만큼은 의화단에게 이겼으며 직접 열강과의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부상을 입지 않았다. 그로 인해 청나라 조정 내부에서 은연히 영향력을 뻗치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이홍장이나 유곤일 등의 청나라 조정의 실력자가 차례로 사망하는 '행운'을 안고 청나라의 정예부대를 인솔하게 된 위안 스카이는 그것을 정치자본으로 잘 활용했다. 이윽고 그것은 직례총독인 이홍장의 후임으로 위안 스카이가 내정됨으로써 그를 출세하게 만들며 신해혁명 후의 중화민국대통령, 중화제국황제(홍헌제)로도 상승하게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첨언하면 한족인 위안 스카이가 멸망한 청나라 조정에 있어서 최강 병력을 보존해간 것 자체가 이윽고 만한대립(満漢対立)이라고 하는 민족간의 알력을 높이는 불안정요인이 되었다.
4. 중국의 반식민지화
베이징의정서에 따라서 베이징이나 톈진에 외국의 주병권(駐兵権)을 인정하며 거액의 배상금에 의해서 재정지배(해관세, 상관세, 염세을 지불할 때까지의 담보로서)를 수용해야하는 청나라 조정, 그리고 중화민국은 이미 독립국으로서의 체재가 없이 반식민지라고도 불려지는 상태에 놓였다. 베이징에 주병권용인을 허용한 것은 이미 노구교사건의 방아쇠로도 볼 수 있다.
5. 청나라 조정을 향한 불신 증대
가장 큰 영향은 민중의 불평불만이 오히려 열강보다 청나라 조정 자체에 향해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청나라 멸망의 카운트다운을 알리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열강을 향한 '선전포고' 때는 "현재 우리 중국은 약하다.기댈 곳은 이미 인심뿐이라고 말하며 베이징 함락 후 간단하게 의화단을 무시한 청나라 조정과 서태후의 자세는 민중에게 큰 실망을 보였다. 게다가 베이징의정서에 의해 정해진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민중에게 과대한 부담을 지운 것은 사람들이 청나라 조정을 단념하게 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쑨원은 중국에서 몇번이나 혁명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그 때마다 주위로부터 무리라며 냉소받았다. 하지만 의화단운동 이후 민중들에게 방관자적인 분위기가 없어지고 쑨원 일행을 적극적으로 응원하는 동향이 갑작스럽게 증가하고 있다고 서술하고있다. 즉 의화단운동은 신해혁명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복선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영향 2―세계, 동아시아에 끼친 영향―편집

중국 국내에, 그리고 국외에 끼친 영향은 아래와 같다.

1.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격화와 영일동맹의 체결
의화단운동의 진압을 위해 각국이 저마다 출병했으나 그 중에서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이 드러나있었다. 특히 러시아제국군의 만주 점령과 도덕성이 결핍된 군사행동은 각국에 큰 유감을 끼친 동시에 조선과 일본에 있어서 자국의 권익을 위협받는 것인가하는 위기감을 전하기에 충분했다. 영국도 중국에 있어서 자국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일본에 기대를 표명했으며 1902년영일동맹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에는 일본군을 칭찬한 모리슨의 후원도 있었다.
2. 영토 할양 요구의 잠잠함
청일전쟁이후 청나라 조정은 과분(중국분할)이라는 최대 위기를 맞게 되나 의화단운동의 기세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전투에 있어서 압도적인 우위를 보인 연합군이었으나 그 후의 점령지 지배에 애를 먹었고 중국의 영토지배에 대해 곤란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열강의 생각은 연합군 사령관인 발더제의 열강의 힘을 모으더라도 중국인의 4분의 1을 돌보는 것조차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한 것에 잘 나타나있다. 다만 예외적으로 영토지배를 목표로 한 국가가 있었다. 그 국가는 러시아와 일본이었다. 러시아의 만주점령은 러일전쟁을 촉발시켰으며 간신히 승자가 된 일본은 한층 더 영토에 대한 야심을 뻗쳐서 중일전쟁을 초래하게 되었다.
한편 크리스트교회측도 의화단운동 이후 반감을 사기 쉬운 오만한 자세를 개선하기에 이르렀다 이때까지 오히려 적극적으로 관여했던 재판에 대해서도 자강(自粛)하도록 해서 교안(敎案)은 차례로 감소되었다.
3.대역(大逆)사건의 복선
얼핏보면 관계가 없다고 할 수도 있으나 신해혁명(1910년)의 원인을 의화단운동 때 일어난 마제은사건에서 구했다는 연구가 있다. 마제은사건이란 청나라의 마제은이라고 불리우는 은괴를 파병군대가 횡령했고 곧 일본군은 자군이 법강과 풍기가 바르단 것을 내외에 선전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을 『만조보』의 기자 고토쿠 슈스이일행이 가차없이 추궁했다. 바로 이것이 마제은사건이다. 이 일련의 기사에 의해서 고토쿠 슈스이일행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노여움을 샀으며 그것이 고토큐 수스이 자신에게 처형이라는 가혹한 처치가 내려진 것을 원인으로 한다고 한다 (小林1986).

평가편집

역사학에 있어서 평가하기 전에 당시 어떻게 의화단운동이 생각 되었는지에 대해서 언급한다.

1. 의화단운동에 대한 당시의 평가
의화단운동이 일어났을 때의 세계는 유력한 이데올로기사회진화론이 있었으며 문맹/야만이라고 하는 두 개가 대립함으로써 이야기가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앞에서 언급한 두 개의 대립이란 서구/비서구라고 하는 본래 다른 류(類)의 대립이 무리해서 더해진 것이며 이 두 개의 항목에는 암묵적인 이해로 상하 랭크가 있다. 하위부터 상위까지 이행하는 것 즉 비서구(야만)부터 서구(문명)으로의 이행하는 것이야말로 '진화', '진보'로서 받아들여져왔다. 이러한 상황에 일어난 의화단의 반(反)크리스트적 혹은 비,서구적인 '악행'은 '문명'에 어긋나는 야만적인 행위로서 곧 세계로 퍼져서 혹독한 비난이 중국에 쏟아지게 된다.
하지만 한편 중국의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의화단운동에 대해 동정적인 소리나 의화단운동의 의의를 올바르게 꿰뚫어본 사람도 있었다. 예를들면 어쩔 수 없이 베이징농성을 한 외교관은 내가 중국인이었다면 나도 의화단이 되었을 것이다(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A.E.로스트혼)라고 말하고 있으며 R. 하트는 의화단의 발생을 국가적 의식이 깨어나기 전에 널리 알려졌다고 말하고있다. 일본에서도 아오야키 유비는 '의화단찬론(義和団賛論, 『有美臭』文明堂, 1904)'이라는 문장을 씀으로 의화단에 공감을 표하고 있다.
2. 역사학에 있어서 의화단운동
중국사, 그리고 세계사에 큰 영향을 끼친 점으로는 일치하지만 의화단운동에 대한 평가는 아직 확실치 않다고 말하는 것이 나으며 그것이 언급해지는 지역인 중국, 일본, 서구에 있어서, 중국인 연구자에게 있어서도 구미적 조사에 가까운 것도 있으나 논조는 다르다. 가장 차이가 나는 점은 의화단의 성격에 대한 평가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구미 및 일본의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애국운동이라고 이해하는 데에 반해 미국등 다른 지역에서는 무지막지하게 외국인을 공격한 반외세 운동이라고 이해하고있다.(에슐릭, 코엔등)
의화단은 제국주의에 관한 점으로 크리스트교집단(선교사랑 중국인 크리스천)과의 대립중에 그들이 가진 여러 특권(행정상 혹은 사법상)에 직면해서 그것들이 제국주의에 유래하는 것에 자각했고 그로인해 반대운동을 펼쳤다고 중국, 일본 등의 학자는 얘기한다. 하지만 구미 쪽 연구자들은 의화단은 제국주의를 자각하지 않았으며 그저 제노포비아로부터 오는 반외세 운동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의화단이 애국주의 운동이었는지 아니었는지에 대해서도 대립한다. 의화단이 근대적인 국가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땠는지 '부청멸양(扶清滅洋)', '소청멸양(掃清滅洋)'이라고 하는 슬로건에서 '청'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가에 대해서도 일치를 보이지 않는다. 즉 이 거리감에서 오는 바와 같이 애국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가 혹은 내셔널리즘의 각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라는 점에서 학자간의 의견이 나뉘어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