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진형
석진형(石鎭衡, 1877년 9월 29일 ~ 1946년 2월 24일)은 일제강점기의 관료 겸 기업인이다. 호는 반아(槃阿), 본관은 충주.
석진형
石鎭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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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조선총독부 예하 전라남도 도지사 (前 朝鮮總督府 隸下 全羅南道 道知事) | |
임기 | 1926년 8월 14일 ~ 1929년 1월 19일 |
군주 | 히로히토 (일본) |
총독 | 사이토 마코토 (일본) 우가키 가즈시게 (일본) |
총리 | 하마구치 오사치 (일본) 와카쓰키 레이지로 (일본)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77년 9월 29일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광주 |
거주지 |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예산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대전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일제강점기 경성부 일제강점기 경기도 광주 |
사망일 | 1946년 2월 24일 | (68세)
사망지 | 미 군정 조선 서울 |
학력 | 일본 도쿄 제국대학교 법학과 |
경력 | 前 호서은행 취채역 前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역 前 북선주조주식회사 취체역 前 요식업체 천향원 사장 前 북선주조주식회사 사장 |
정당 | 무소속 |
본관 | 충주(忠州) |
친인척 | 김명학(사위) |
종교 | 유교(성리학) |
생애
편집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호세이 대학의 전신인 도쿄의 와후쓰 법률학교에서 공부하여 나왔고 그 후 동경제국대학 법과를 나왔다. 1904년 대한제국 군부의 군법국 주사에 임명되면서 관직에 들어섰고, 보성전문학교에서 법학을 강의하고 법관양성소 교관으로 근무하는 등 법률 전문가로서 중용되었다.
1913년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설립된 호서은행 취체역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1920년 조선제사주식회사와 대동상회에 참여하고 경성상업회의소 특별위원으로 재직하는 등 경제인으로의 이력도 쌓았다.
1921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발탁되어 전라남도의 참여관으로 발령받았다. 3·1 운동 이후 구성된 임시교육조사위원회에 이완용, 고원훈과 함께 조선인 위원 3인 중 한 사람으로 포함되는 등 총독부의 신임을 받았다. 1924년과 1926년 충청남도와 전라남도 도지사에 임명되었다.
1929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감사역을 맡았다. 요식업체 천향원과 양조업체 북선주조주식회사에서 취체역과 사장을 지내며 기업인으로 활동했다. 이 가운데 천향원은 서울의 ‘3대 요리집’으로 불리던 곳이다.[1]
사후
편집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도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수록했다.
같이 보기
편집참고자료
편집-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7년 12월). 〈석진형〉 (PDF). 《2007년도 조사보고서 II -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이유서》. 서울. 964~978쪽쪽. 발간등록번호 11-1560010-0000002-10.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2월 1일). 〈석진형 : 총독부의 신임 두터웠던 절대 맹종파 (이명화)〉. 《친일파 99인 1》.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1-7.
- 임종국 (1991년 2월 1일). 〈「혈의 누」의 이인직은 한일합방의 주역〉.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서울: 돌베개. ISBN 89-7199-036-8.
각주
편집- ↑ 장규식 (2003년 6월 21일). “10만석 재산 털어 지킨 문화재의 거리 - 〈장규식의 서울역사산책〉 피마골 풍물기행②”. 프레시안. 2008년 6월 28일에 확인함.
전임 장헌식 |
제4대 전라남도 지사 1926년 8월 14일 ~ 1929년 1월 19일 |
후임 김서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