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왕
신무왕(神武王, ? ~ 839년 음력 7월 23일, 재위 : 839년 음력 1월 또는 4월~ 음력 7월 23일)은 신라 제45대 국왕이다.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우징(祐徵)이다.
신무왕
神武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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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신무왕릉 | |
제45대 신라 국왕 | |
재위 | 839년 1월 또는 4월 ~ 7월 23일 (음력) |
전임 | 민애왕 |
후임 | 문성왕 |
이름 | |
휘 | 우징(祐徵) |
시호 | 신무(神武) |
신상정보 | |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839년 7월 23일 (음력) |
부친 | 김균정 |
모친 | 진교부인 박씨 |
배우자 | 정계부인 |
자녀 | 문성왕, 김흥광 |
아버지는 원성왕의 손자인 김균정(金均貞, 후에 성덕왕(成德王)으로 추봉)이고, 어머니는 헌목태후(憲穆太后) 박씨(朴氏)인데, 혹은 정교부인(貞矯夫人)이라고도 한다.
생애
편집즉위 전
편집흥덕왕의 3년(828년) 1월 대아찬(大阿飡)과 시중(侍中)에 발탁되었지만, 831년 1월 수도 금성(金城, 경상북도 경주시)에 일어난 지진이 결국 원인이 되면서 시중이 면직되었다. 834년 1월에 다시 시중이 되었지만, 835년 2월에 아버지 김균정(金均貞)이 상대등(上大等)으로 취임하면서, 우징은 시중직을 사임했다. 이 때에 후임 시중이 된 사람은 김명(金明)였다.
흥덕왕의 사후, 상대등 직에 있던 아버지 균정과 조카 김제륭(金悌隆)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란이 일어났다. 내란 중에 균정이 죽어 희강왕이 즉위하였고, 우징 등은 청해진 대사 장보고에게 무사히 달아났다. 그 후, 희강왕을 옹립한 김명이 반란을 일으켜, 희강왕을 죽이고, 838년 1월 왕으로 즉위 하였고, 우징파는 동년 3월부터 민애왕을 토벌하기 위한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결과적으로 우징의 장군 김양(金陽)이 왕도에 도착하여, 839년 1월 23일에 민애왕을 시해했다. 우징은 왕의 의례로 민애왕의 시체를 매장하였고, 또, 고례에 준거하고 즉위식을 거행하여, 왕위를 계승했다.
즉위 후
편집즉위 후에 왕의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를 추봉했다. 아들 김경응(金慶膺)을 태자로 삼았다. 또, 민애왕을 물리치는데 공적이 컸던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에 임명하였고, 식읍 2,000호를 받는 것과 동시에 장보고의 딸을 태자비로 맞이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839년 7월에는 희강왕 대로부터 보내지 않았던 당나라에 사자를 파견하여, 치청(淄青, 산둥성) 절도사에게 노비를 보냈다. 당의 문종은 이것을 듣고, 먼 곳에 온 사람인 것을 불쌍히 여겨 신라에 귀국시켰다. 같은 달(7월) 신무왕은 병에 쓰러져 23일에 사망하였다. 「삼국유사」왕력에서는, 동년 11월 23일에 사망했다고 한다. 즉위한 지 181일만이며 신라 역사상 가장 짧다. 제형산의 서북쪽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그 왕릉은 경주시 동방동의 사적 제185호로 비정되고 있다.
가계
편집기타
편집신무왕이 등장하는 작품
편집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김해김씨 족보
전 대 민애왕 |
제45대 신라 국왕 839년 |
후 대 문성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