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수 (1853년)

안경수(安駉壽, 1853년 6월 29일 ~ 1900년 5월 1일 (음력))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개화파 정치인으로 독립협회의 초대회장이다.

안경수
安駉壽
前 조선국 병조 사복시 경무사
(前 朝鮮國 兵曹 司僕寺 警務使) , 군부대신
임기 1896년 1월 31일 ~ 1897년 2월 10일
군주 고종
섭정 김홍집(前)
신상정보
출생일 1853년 6월 29일(음력) ~ 1900년 5월 1일(음력)
출생지 조선 경기도 안성군
사망일 1900년 (48세)
사망지 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 한성부
본관 죽산(竹山)
경력 무신, 정치가-독립협회초대회장, 사업가, 시인, 저술가
독립협회 회장
정당 온건개화파
부모 부 안광묵(安光默)***족보 安光逸로 변형됐다.
친인척 안기(할아버지)
안국선(이복 조카)
안회남(이복 종손자)
안막(이복 종손자)
별명 자(字)는 성재(聖哉)
시호(諡號)는 의민(毅愍)

본관은 죽산(竹山)으로 자(字)는 성재(聖哉)이며 시호는 의민(毅愍)이다. 1893년 전환국방판으로 일본의 화폐 주조를 시찰하고 돌아와 조선에 신화폐를 주조하는 사업을 주관하였다. 전형적인 출세주의 인간형이라를 평가를 받는다.[1]

생애편집

안광묵(安光默)의 서자(庶子)로 출생하여 일본을 왕래하다가 1887년 주일 공사 민영준의 통역관으로 출세하였다. 안경수는 武官출신으로 고종13년 무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였고 죽산부사 부평부사 장위영 영관으로 진급하여 경기좌영(仁川)해군사령관으로 京畿右營(강화도)사령관 安瑞鉉將軍 11년상 조카와 함께 나란히 재임하였고 전환국방판으로 신화폐주조 활약에는 사촌형 通政大夫 安鼎壽(안정수)와 함께 활약하였고, 좌,우포도대장(경무사)직을 거쳐 형조판서 한성판윤 경기관찰사 선혜청당상 군부대신직에 올랐다. 위키백과의 종전의 기록과 몇권의 석박사 논문의 안경수에 관한 논술은 人格卑下와 人身攻擊性 오류가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 출세지향적인물이란 필설과 <한미한 가문의 상민에 가까운 서자 출신>이란 딱지가 바로 그 일례이다. 그는 황헌의 매천야록이란 객관적기록에 의거하면 <문명의 이기에 진보된 뛰어난 인물>< 재물을 불리는데 능한자>라고 論評하였다. 武科出身 인천지방(京畿左營)수군통제사 장군이라기 보다는 사업가로 더 적절한 인물이고 일찌기 1884년 일본 오까야먀현(岡山縣)에 가서 방적기술을 직접 배우기도 했던 선진적 개화파 인물이며 한때 伊藤朴文(이또오 히로부미)사랑채에 일시 기거할 정도로 외교수완도 뛰어 났던 인물로 부하철도회사.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은행장이자 주식회사 설립자인 것이다. 인천~서울간 馬車가 오고 가는 운송회사대표이자 인천~ 일본간 오고가던 국제海運會社도 경영하였다. 대조선저마제사회사 방적공장을 설립추진했고 현재의 방위산업체인 총포화약을 생산하던 사업체를 경영하기도 하였던 친일정객이자 선구적 사업가였던 것이다. 부친 안광묵의 官報記錄과 변질된 죽산안씨 현감공파 족보에 의거하면 부친의 이름이 安光逸로 등재됐고 독자 아들의 기록만 나타난다. 틀린 기록인 것이다. 安光默이 부친이다. 왜 安光逸로 관보기록 增吏曹判書의 기록이 나타난 이유는 朝鮮이 大韓帝國 국호를 변경할때 안경수와 김홍집은 사돈댁 먼 친척인 관계였고 선대인 김홍집총리 부친 예조판서 김영작과 安門댁 安喜壽란 통정대부 동부승지 권력가의 집안끼리 대를 이은 인척관계였던 것이며 갑오개혁(갑오경장)의 주도적 인물이었기 때문이며 안경수의 출사에는 20년쯤 前시대 대선배이며 아버지격의 친족 대형님인 바로 죽산안문 현감공파 安喜壽란 문과(을과)에 장원급제한 인물과 安鼎壽(안정수)란 사촌형을 배제하고 현시대적 종친관계로 직계로만 따져서 올라가서 조사하니 큰 오류가 생긴 것이다. 김홍집총리대신의 부친 金泳爵(김영작)이란 분과 일본유학 장장15년간 수학한 안희수란 분과 사촌형 안정수는 일본정통파외교관이며 통정대부를 거쳐서 성균관 교리를 지낸 충청권의 현감 현령을 지내신 관록의 사내이며 동부승지, 도승지를 역임한 순조말에서 헌종 철종 고종시대期初 흥선대원군 정치기까지 권력가의 한 인물 安喜壽란 분은 현감공파보에 이름석자만 남기고 족조수단을 하질 않았다는 사실이 나타났고 안경수장군 사형을 집행한 李裕寅이란 평리원재판장이 안경수 사형집행의 악역을 담당한 자가 안경수의 부인 이영자와 安國善의 정식재판청구로 안경수가 無罪사면복권되자 충청권에 초호화판 저택에서 살던 범법자 李裕寅은 고종의 체포령을 받들은 경무사 安慶善이 이유인을 체포하려 저택에 들어서자 심장정지로 사망한 역사적사건에 등장한 경무사 안경선이 안희수의 係子로 입적된 기록이후 전혀 기록이 없다. 종가집 큰 줄기 족보가 사라진 것이다. 그런고로 죽산안씨 현감공파보는 상당히 변형 누락됐음이 여실히 증명되고 안경수 獄死事件 이듬해 황성신문기사에 宰相身分僞造罪(재상신분위조죄)란 노락질 당한 閔氏 척신중에서 閔泳煥과 동격의 장군인 閔應植의 여주자택에 천주교도 30여명 끌고 가서 담장을 넘어 들어가 협박하고 돈 3萬兩을 약탈한 安石鉉이란 사람의 罪名이 도적질 약탈행위가 아니라 바로 재상신분 위조혐의로 징역3년을 언도받고 징역 2년간 살았던 명백한 역사적 기록이 신문. 관보기록에 남았는데 이는 바로 犯人이 안경수의 조카였고 안서현장군의 형제였기에 安氏문중의 빼앗긴 돈을 일부 받아내려고 벌렸던 일인데 취재 조사과정에서 재상인 安駉壽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허위자백으로 <宰相身分僞造罪>로 징역을 살았단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43세 단발령직후 李榮子와 재혼시 잘라진 독사진

바로 아관망명 당시 성난 군중들에게 물매 맞아서 절명한 부왜 괴뢰내각 總理大臣 김홍집과 안경수는 사돈지간의 친척이었던 것이고 부친 안광묵이 <百姓侵怒罪>라 罪名으로 징역살이한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나타나므로 부득불 부친의 성함을 바꾸었을 가능성을 거론하는바 입니다. 여기서 이화여자대학원 석사논문의 작성자 송경환의 논문 내용중 출세지향주의자란 논리전개와 <한미한 가문 출신>이란 말은 가족관계사를 모르는 상황하에 잘못된 논술인 것이다. 死者名譽毁損(사자명예훼손)에 관한 비하발언은 잘못이다. 역사적 인물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배후로 흐르는 정확한 인적관계를 심도깊게 조사해서 기록해야 된다. 죽산안씨 현감공파는 안경수 獄死사건후 안경수의 부친 안광묵의 본가 4명의 아들들 기록은 없고 독자로 나타난다. 종가집족보가 사라진 것이다. 이에 관한 심대한 부작용은 바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성악가이며 작곡가 지휘자인 安聖鉉에게 나타난다. 성악가 안성현은 죽산안씨 현감공파 34대 종가집 종손이며 안경수 옥사사건 이후 종가댁 손주가 연좌제에 따라 함경도로 추방됐기에 생겨난 일이며 전남 나주에서 출생한 이유는 바로 韓末 羅州牧使 , 정 4품 郎廳(낭청)을 지낸 洪在應이란 사돈댁이 있기 때문이고 대한제국 원년인 1897년 光武元年 관보기록에 의하면 서두에 洪淳七이란 南部令(납부령)이란 軍國機務處(군국기무처)법부서기관으로 등장한다. 90세 언저리까지 장수한 자로 1970년 초까지 조선맥주(크라운)사장이었다. 洪淳七의 아들이 바로 오늘날 洪斗杓 (前 KBS사장이며 現TV조선회장)입니다. 안경수장군은 庶子출신 막내입니다.핵심적 관건은 바로 헌종임금의 後妃인 효정왕후가 바로 남양홍씨 남양군파에서 분적된 <석벽공후 3파>라는 것이다. 정독도서관 족보기록에 바탕하면 바로 총리대신 김홍집이 안경수의 사돈이며 일본수신사로 파견될 당시 書狀官(서장관)비서관이 부친 안광묵이였고, 효정왕후가 外家 친척인고로 안경수는 귀족(계급)인 것이다. 고종 13년 무과에 급제한 것도 아버지 安光默 영향과 조대비에 이은 후임 대비(효정왕후)가 지원하지 않았다면 안경수는 인천의 별기군 영관(대령급)으로 끝날 인물이지 결코 중앙정계의 핵심관료로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안경수에 관한 < 한미한 가문 상민 잔반출신 > 이란 논술은 사자명예훼손격 범죄행위이며 역사기록 오류인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안경수장군이 한때 왜당이란 별칭이 붙을 정도로 열렬한 친일정치인이였지만 서재필과 독립협회를 운영하면서 친미파로 정치적입장을 바꾼 사람이며 장조카 안서현장군과 함께 천주교도 였는데, 태양신을 숭배하는 일본 토속 종교 <黑主敎>신자라고 단정하는 정신나간 역사학자도 있다. 나는 방계혈족 간신히 살아남은 후손으로 증언한다. 안경수의 장조카 안서현장군이 천주교도였던 것은 명백히 증언하며 참조할 필요성은 있고 毅憫公(의민공) 안경수가 아들이 없고 딸만 둘만 남아 손이 끊어지어 훗날 계자로 들어간 安國善과 그의 장자 안회남 신소설가가 월북하였기에 논술로 반박할 인물들이 없다고 함부로 筆을 휘두르는 행위는 범법행위인 것이다. 안경수는 효정왕후의 친정집 외가친척이자 귀족이며 천출은 아닌 것이다. 王家의 외척이고 민영준과 동급인 셈이고 통역관으로 출세했다는 기록은 크게 틀린것이란 역설적 이론은 심도깊게 7년간 조사한 역사자료가 이를 입증하고 증명한다.

안경수는 1898년 光武 2년 초봄에 황제양위를 주도한 사항은 분명한 사실이나.승정원일기를 보면 고종황제는 10년 동안 안경수에게 온갖 벼슬이란 벼슬직책을 너무도 많이 하사했고 부서의 일을 제대로 처리할 겨를도 없이 연속적으로 高宗皇帝는 보직 자리를 이리 저리 바꾸어서 임명하였던 것이다. 안경수는 軍部大臣은 자신이 감당키 어렵고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과분한 자리로 하소연 장장 7 회나 고종에게 사직상소를 올리기도 했으나 번번히 允許(윤허)치 않은 기록은 <승정원일기>로 남아있다. 차기엔 따로 안경수가 단 시간내에 역임한 많은 벼슬관작을 정리하여 년도별 일자별로 정확히 기술할 예정이다.

...안경수장군은 문명에 이기에 일찍이 눈을 뜬 뛰어난 선구자였던 것이며 대한민국역사상 최초의 주식회사 설립자인 것이다. 청년기 이승만의 독립협회 활동 후원자였고 지도자였다. 이승만의 (독립정신)책자 서두에 정치적 동지인 "안경수의 아들" 로 安國善을 기록된 증언을 토대로 구한말 巨富 (돈 많은 거물급)였기에 고종은 안경수의 돈이 필요했고 자꾸만 이런 저런 감당키 어려운 많은 官職을 하사하며 돈을 뜯어 갔었던 것인데 국가발전에 장애물이 된 皇帝를 두고서 정신나간 학자는 *계몽군주* 운운하는데 틀린진단이다. 계몽군주가 어찌하여 평안북도 운산금광에서 금을 캐어 내어 부자가 됐던 이용익이란 함경도 천민출신이 바친 금괴를 뇌물로 받고서 고위관료직을 주었는가? 개화파의 행정실무책임자 한성판윤(李采淵)을 막후에서 독살시킨 살인교사자가 이용익인데 흉악한 범죄자를 고위직에 앉혀 놓았는가? 왕가의 황실내탕금 자금이 필요해서였다. 20년 세월을 국가안보를 위한 국방력을 증대하고 군비를 증강할 시간 20년 세월만 낭비했던 무능한 王이 바로 고종이었다. 황제 스스로가 대한제국의 걸림돌(적폐)이 됐던 것이다. 첨단기술을 습득하고 조선인 힘으로 경인 경부선 철도를 가설하려고 사력을 다했던 안경수가 일본 영국 프랑스의 기술진과 차관을 빌려와서 新設하려는 안경수의 입장과 고종황제와 사이에 매국노 이완용과 선교사들의 농간에 자국의 이익 추구만을 노렸던 복음장사꾼 알렌은 의사신분에 美國 自國의 이권인 운산금광채굴권 산림채굴권 석탄채굴권등에 관한 막후협상을 이완용을 앞잡이로 내세워 모종의 암약거래한 시기였고 철도부설이권에 관련된 줄다리기를 하였던 안경수를 따돌렸고 이미 1898년은 경인간철도가 한창 공사 완공단계였는데 나머지 경부선 철도공사를 부하철도회사를 통한 신설문제로 고종황제와 안경수 사이에는 큰 이권문제가 남았었고 고종은 안경수를 완전히 배제하였다. 아관파천 이후 선교사들에게 생명을 의탁한 고종은 이완용이 츨세하는데 막후 역할을 자행한 선교사들은 말을 적극 추종하고 따랐는데 그들은 복음전파의 본업을 떠나고 있었다. 주한미국공사관 서리직에 발탁된 선교사(알렌)는 정치적 내정간섭 인사권까지 농단하는 월권행위까지 자행했던 것이다. 황제가 러시아공사관으로 망명한 아관망명 때, 신변보호를 구실로 권총을 옆구리에 차고 다녔던 언더우드는 경호업무도 자행하였다. 대한제국의 정치는 그야말로 봉숭아학당 코메디극화로 흘러버렸다. 황실내탕금 확보만 필요한 고종에게는 안경수가 큰 장애물인 것이다. 권력의 큰 장벽 앞에선 안경수는 간절히 황제의 양위를 바랐고 閔皇后에게 배척받아 남대문 밖 초가집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했던 귀빈 장상궁(張貴嬪)을 모친으로 둔 비운의 황태자 기골이 장대한 똑똑한 義親王(이강)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박영효와 협의하에 구테타를 모의한 혐의는 개혁을 간절히 염원하는 愛國愛族 정신의 결과로 자연발생적인 불가피한 사건이며 목적은 입헌군주제 중립국가로 나아가자고 독립협회회원의 200명 가까운 서명이 실린 상소문을 올리기도 하였던 기록을 보아 단말마적 몸부림이었던 것이며 박영효 안경수 박정양 이상재 유길준 윤효정 이채연등 개화파동지들의 간절한 바램인 개혁의 길이며 최종목적지로 가는 이정표였던 것이었다. 대원군손자 이준용의 역모계획을 눈감아 주었다는 구실로 高宗이 죄를 뒤집어 씌운 부당한일인 것이며 안경수가 벌려놓은 대조선은행 부하철도회사 방적공장등 많은 주식과 재산을 노린 고종과 왕당파들의 합작으로 선구자 안경수장군을 고문에 이은 단심재판에 의한 교수형으로 비극의 소용돌이로 몰아갔고 당시의 법전인 대전회통에도 극악한 죄인이라도 형식은 三審制度 재판였는데 단심재판에 의한 교수형집행으로 李裕寅이란 평리원재판장을 내세워 고종에게 상주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사형을 집행했다는 것은 사전에 짜여진 계획대로 巨富 안경수는 청운의 푸른꿈을 제대로 펼쳐 보이지도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었다.

...안경수 本家 큰형 安載壽의 子--(安瑞鉉 將軍)은 연좌형으로 안경수 교수형집행 다음날 1900년 음력 5월2일(양력 5월29일)청년 이승만 안국선이 구금된 종로 한성감옥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漢城判尹 이채연의 오른팔 역할로 군인생활을 오랫동안 일했던 장군출신이 漢城右尹직에 1898년 광무2년 반년쯤 함께 활동하였다. 京城電機 (한국전력 전신)사장겸 서울시장신분으로 독힙협회회원으로 활약하다 안경수사형집행 얼마 지나지 않어 누군가의 지시로 똑똑한 40살 젊은청년 한성판윤 이채연은 독살이 됐다. (위키백과 기록은 금광으로 큰 돈을 벌어 매관매직으로 금괴를 바치고 벼슬은 샀던 천출관료 이용익이 이채연의 독살 교사자로 지목한 기록이 나온다) 곁길로 선구자 안경수가 살던 헌법재판소 우측 뒷쪽에 서있는 백송나무는 이또오히로부미로 부터 안경수가 가져다 심어놓은 일본백송(소나무)는 주인을 잃고 만고풍상 험안 나라의 흉악한 꼴을 묵묵히 지켜만 보고 있는데 역사적 진실을 모르는 어떤 역사학자는 이 나무를 청나라(중국)에서 얻어다 심은 <중국산소나무>라는 필설을 기록한 학자가 있었다. 매천야록의 객관적기록은 倭,白松 안경수가 일본에서 직접 배로 실어다 심은 나무라고 확실한 증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똑똑한 선구자 안경수장군과 韓城判尹 이채연과 韓城右尹, 安瑞鉉 將軍은 개회기 실무담당 관료로 근대사회로 발전하고 입헌군주제 중립국가를 지향하는 개화파들의 희망의 등불을 들었던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개혁을 바리지 않는 수구보수 왕당파들은 독립협회활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오직 황권강화에 매진한 國家犯罪에 의해서 안경수와 총리대신 김홍집, 이채연, 안서현등의 선각자들은 대한제국의 잘못된 국가정책의 희생자들로 짧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실은 왜제가 심은 부왜 괴뢰들이다.) 국가(?)를 살리려는 애국자들은 모두 죽고 인재풀이 줄어든 대한제국은 13년을 채우지 못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518 년 조선왕조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던 것이다.

한일합방문서를 조인한 직후(*고종은 조인한 적이 없다. 고로 불법) 高宗은 근대화폐, 환율계산에 근거하여 황제는 나라를 넘겨주는 문서를 내어주고 개인적으로 私費(비자금)25억원 뇌물을 받았으며 이또오히로부미가 국가단체 차원에서 건내준 450억원 상당의 별도의 뇌물성 큰 돈을 받아서 챙겼으니 결국은 매국노 이완용과 함께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를 팔았던 것이며 이에 관한 정확한 자료는 2020년 10월 인터넷일간지에 자세한 발표로 보도되었다.<계몽군주>란 논설로 고종황제를 뛰우기에 바쁜 前국사편찬위원장 李모란 서울대학교수는 실사구시에 의한 정확한 역사를 서술해야 될 것이다. 참고로 마지막 皇孫 李錫 총재의 모친은 洪貞順여사인데 효정황후의 친족이 창덕궁 전화교환수로 일을 하시다 19세에 의친왕의 후처가 되어 황손을 낳으셨으니 筆者와 개인적으로 먼 친척인 셈이다. 의친왕비 洪여사가 근무할 적에 경무청主事 창덕궁관리자 洪鐘翊(필자-外祖父) 관보기록있고 필자의 할머니 祖母(洪聖禮)는 황제를 모신 기미상궁출신이고 큰 어머니도 全州李氏 李何只(이하지)상궁이었다. 창덕궁관리자 홍종익은 효정왕후의 혈족입니다. 筆者祖母 친정아버님이 바로 洪在應(나주목사)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부왜 100년의 역사, 두산그룹 모체인 조선맥주(크라운)에 대표이사직으로 장수한 자가 바로 대한제국기 書記職 일을 했던 洪淳七의 아들 現在 TV조선회장 홍두표이고 나주목사 홍재응의 曾孫이며 前 KBS사장인데 마지막 황손 李錫 총재와 筆者와 安駉壽(안경수)장군과 洪斗杓 회장은 李氏皇室 外家 사돈댁 친척인 것이다.명동과 왕십리에서 대포집을 의친왕 부인 홍씨왕후가 경영했다는 이석총재 모친 홍여사는 친척들이 살고있는 동네를 따라서 옮기신 것입니다. 명륜동에서 사신것과 왕십리도 그랬습니다. 筆者 큰 고모(安亨順)님이 바로 2000년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던 詩人 金洙瑛 모친인데 親母 남양홍씨들과 일생동안 긴밀한 왕래가 잦았던 일로 황손 이석총재와는 外家사돈댁 친척인 것이다. 경무청주사(창덕궁관리자)-洪鐘翊, 비서원승 洪鐘億, 모두 친척일가입니다. 부연하여 누구든지 ** 안경수장군에 관한 자세한 질문이나 이기록에 대한 이의가 계신분은 토론장에 글을 남겨***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안경수는 교수형, 장조카 안서현장군은 비밀리에 참수형을 당했고 일성록(고종일기장)에 안서현장군은 1888년 민영환 兵曹判書 휘하 강화삼별초 別將<京畿右營>사령관이란 일성록기록만 존재하지 모든 승정원일기, 관보기록은 증거인멸로 삭제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별단기록인 <증건도감의궤> 훈장기록인 賞典에 嘉善大夫, 中軍이란 기록이 4회 기록이 나타난다. 尹容善 內閣시절 기록은 남있다. 이승만 청년 안국선 이상재선생이 갇혔던 한성감옥 투옥됐던 대장군 안경수는 독힙협회부활과 정계복귀를 기도했다는 학자들의 기록은 적절치 않은 편견적서술이며 안경수의 타고난 재능은 장군보다는 사업이 잘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을미망명객에서 일찍 조기귀국한 이유는 바로 조선에 벌려놓은 국내사업체 문제와 안씨문중의 구금된 이복조카 安國善과 장조카 安瑞鉉 將軍을 구출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을미망명객대표 박영효의 일본의 망명생활의 지속권고(만류)도 뿌리치고 조기귀국 고종과 주한일본공사(林勸助-하야시곤스케)의 중재로 황실과 선의적 담판을 지으려다 안경수의 막대한 재산을 몰수하고 가로챈 고종황제와 왕당파들의 속임수에 넘어갔던 것이다.1900년 양력 5월28일(음력 5월1일)새벽시간에 고문으로 빈사상태인 안경수를 로프줄에 의한 교수형이 아니었다. 주한일본공사관 기록에 의하면 끊어지는 새끼줄을 올가미로 걸어서 2번 줄이 끊어졌고 3 번씩이나 목을 매달아 잔혹한 교수형에 죽었던것이다. 이에 관한 일본국 외무성에서 파견한 일본인의사가 안경수와 함께 교수형 당한 前,경무사 권형진의 시신부검을 철저히 검시하여 적어 놓은 기록에 의하면 안경수는 두번씩 떨어지는 바람에 무릎 한쪽이 많이 다쳤고 또한 특이한 점은 음낭(고환)한쪽의 피부가 으깨지어 많이 벗겨져 있었고 된똥을 한줌 배설했다는 기록으로 보아서 묶어놓고 가랭이 사이에 긴막대를 걸어 주리를 틀어대는 심한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받아던 것이다. 惡疫을 담당한 자는 李裕寅(이유인)평리원재판장이며 황제께 상주하지 않은채 교수형을 집행하였다 기록됐으나 새빨간 거짓말 기록임은 여실히 증명되었다. 犯法行爲者 이유인에게 일시적 징계조치를 하는척 하고 십년유배형은 거짓이고 음흉한 고종은 한달도 못되어 殺人者이유인을 비서원승으로 발령한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을미사변당시에 군부대신인 안경수가 광화문에 집결한 일본군대가 경복궁을 향한 조총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경복궁주변을 철저히 방어하여 황후를 지켜내지 못했던 안경수가 늘상 미웠고 원망하던차 분풀이로 고문에 이은 만행이 자행됐던 것이다.

  • 사진 설명***상기에 올린 안경수장군의 사진은 장장 7 년에 걸친 면밀한 조사 결과입니다. 개화기 구한말 인물 사진들을 분석하고 이복조카 安國善이 이승만 이상재와 함께 찍힌 한성감옥사진과 인천 중구 전동의 안경수별장집 내부에서 찍힌 3 장의 대형사진을 대조 분석하여 안경수장군이 틀림없음을 확인하였다.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서재필박사와 찍은 독립협회회원기념사진 중앙 오른쪽 앉은 인사가 바로 안경수였기에 얼굴형 안경테 가장 두드러진 판독은 바로 귀테두리 모양형태는 빼도박도 못하는 100% 완벽한 안경수사진이 확인된다. 급변하는 국내사태로 바빴던 안경수는 30대 초반에 년상의 정실부인이 病死하여 홀아비로 전처 딸 한명을 데리고 10년을 불쌍하게 혼자 살았다 안경수가 43세 1895년 단발령직후 초겨울철 사진이며 18년하의 李榮子란 後妻가 혼인전 姙娠(임신)으로 서둘러서 해를 넘기지 직전에 知人, 7쌍의 부부들 초대로 조촐한 결혼식 날의 사진내용입니다. 당시 인천지역엔 벌써 적산가옥들이 하나 둘씩 들어섰고 전환국방판 안경수와 친밀한 일본은행관계자 외무성파견 직원들 知人들 일본인의 기모노차림새 인물들 등장으로 전체사진으로 부적합하여 韓服이 아니라서 18년하 後妻 李榮子사진을 배제하고 안경수만 짤라서 올린것이다. 안경수의 족보에 의한 결론은 前妻 曺氏 딸 1명, 再妻 李榮子 딸1명, 딸만 둘로 기록을 남기고 경기, 안성, 고삼면 무덤가엔 안경수와 부인 2명 < 3인 합장묘>가 남았습니다.

안경수 미남형의 인물이었고 한국최초의 은행장이자 부하철도회사 사장이고 방적회사를 설립한 선구적인물였던 것이다.재벌급 인물이었고 "財物을 불리는데 능한자" 매천야록 황헌은 증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안경수의 본집 고향은 안성이지만 서울의 집은 선교사 알렌으로부터 巨金을 지불하고 사들인 自宅이 지금의 <헌법재판소>이며 전환국방판시절 건립한 인천시 중구 전동에 있었던 솟을대문이 웅장하게 서있었던 안경수의 별장이 있었다. 인터넷으로 조회가 된다. 인천사 역사박물관에 안경수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다. 종로구 제동 헌법재판소 안경수의 최종 거주지였던 종로구의 호적(제적본)기록은 모두 폐기처분했고 폐기된 안경수의 호적의 근원지를 마련한 분은 바로 安國善이며 안경수 친형이 살았다 적몰되고 폐가된 서울시 中區 茶洞 (다동)-茶房井, 三番地 이복 큰형님 安載壽 주소지(역시 폐기된 호적지)에 탁지부 고등판무관이던 안국선 본인이 직접 가늘은 붓글로 호적본을 손수 만들었던 기록이 현재까지 중국청 제적관리실(지하)에 보관 돼있는 것이다. 안국선의 필체를 확인하려고 정신문화연구원에 소장중인 안국선의 친필싸인이 남은 (政治原論 )책자를 열람하고 대조하여 친필임을 확인하였다. 정치원론 책은 훗날 안국선의 사위가 되는 오모란 학생이 휘문고등학교 재학중 담임선생 안국선에게 받았던 부상품이었고 붓필로 기록된 필체와 중구청에 호적기록이 동일인의 親筆임이 확인된다. 이러한 역사적 진실인 안경수장군에 관한 국가의 國家犯罪行爲는 여실히 증명되며 행정일체의 기록조차 없앤 大韓帝國의 犯罪行爲 고의적 직권남용 직무유기가 확인된다.적몰된 안경수의 자택 헌법재판소는 매국노 이완용의 養父, 이호준 명의로 편법등록했다가 親子 이윤용이 정부에 돈을 받고 매각한 기록이 남았다. 헌법재판소 땅의 크기는 흥선대원군이 살던 운현궁 크기를 육박하는 수천평의 땅, 합법적 이땅의 소유주(원주인)는 안경수인 것이다. 인천시 중구 錢洞 안경수의 별장릉 일본인 고타니 마스지로(小谷益次郞)란 사람이 거주하다가 한국전쟁후 박순정이란 여의사가 산부인과(내과)의원으로 사용한 기록이 남았으며 지금은 연립주택(다세대주택)이 신축되었다. 인천역사전문가 강모씨는 妾이 살다가 귀신이 나온다 자살했다는 말은 카더라 엉터리 필설인 것이다. 後妻 李榮子는 만60세됐던 일제강점기 1937년 別世했으며 1910년 한일합방은사금으로 3萬圓을 받아서 챙겼으니 남편은 없었도 남은 여생을 딸 두명 데리고 살아가려면 돈은 필요한 것이다. 110년전 三萬圓이란 돈은 목수가 100년동안 일해 모아야 되는 큰 돈이며 금세 한국화폐로 30억원에 해당하는 큰 돈이다.매국노 李完用은 15萬圓 합방은사금으로 받아챙겼으니 소규모빌딩 한 채값인 150억원 고종황제란 인물은 이또오히로부미(伊藤博文)가 국가단체차원에서 준 뇌물성 돈 환율계산상 450억원 추정된 거금을 받아 매국대신 3~4명과 나눠 챙긴 기록이 남아있다.筆者는 안경수란 인물이 정말 아까운 인물이란 생각이 자주든다.1880년 중후반 넘어가면서 갑신정변실패로 일본땅을 떠돌던 배정자란 여자를 伊藤博文, 야마구치(山口縣)저택에서 김옥균의 부탁으로 배정자를 소개시킨 안경수는 이또오히로부미 東洋平和論은 거짓이란 이면속성을 간파하였던 시기였는데 大韓帝國軍隊 훈련대해산 통보하러 주한일본대사관에 갔던날 일본과는 실질적 이해상충 입장차이로 이별을 고한 결론이 난다. 늘 안경수에게 따라다녔던 <日本黨>이란 딱지가 떨어지니 일본외무성측에선 안경수를 <비겁한 배신자>란 프레임에 가두는 언론플레이했던 것만 봐도 만약 안경수가 李完用처럼 정치적입장을 바꾸어서 親日政客에서 親美派 서재필과 손잡지 않고 더욱 親日的 입장을 고수하여 日本黨의 先頭走者 자리를 유지했더라면 안경수개인은 더 화려하고 안락한 평생의 삶은 보장됐을것이다. 일제강점기 大政親睦會란 어용단체 회장된 박영효나 윤치호처럼 구차한 인생으로 비겁하게 결말이 났겠지만 先驅者 안경수장군은 정말로 아까운 인재였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부디 역사는 실사구시에 입각한 사실적 기록만 남겨야 된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는 개화 친일 정객으로 협상과 사태 수습에 나섰다.

일본 문물 수용을 적극 찬성하면서 화약 생산을 위한 제약소(製藥所)를 설립하고[1], 신식 화폐 발행에 주력했다. 갑오경장 때 핵심적 친일 관료로 활약[1] 했으나, 1895년 삼국 간섭 뒤 근왕파로 변신하여 경무사, 군부 대신을 지내고, 을미왜변춘생문 사건에 가담하여 그 계획을 당시 외부대신이었던 운양 김윤식에게 누설하였다.[1]

2․3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에서 각각 탁지부협판(度支部協辦)․군부대신을 지냈다. 을미왜변(乙未倭變)에 연루되어 한때 파면되었으나 곧 중추원 의관(議官)에 복직하였다.

그러나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의 주동자로 3년 징역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1896년 아관망명 뒤 경무사가 되었고, 1897년 독립협회가 설립되자 초대 회장이 되었으며, 대조선저마제사회사 사장을 지냈다. 1898년 다시 반황제파로 변신하여 그해 김재풍(金在豊) 등과 함께 황제 양위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주동자들이 체포되면서 그는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0년 귀국하여 재판을 받고 이준용(李埈鎔)의 모역사건을 눈감아준 혐의로 사형에 처해졌다. 1907년 신원(伸寃)되었다.

가족 관계편집

  • 祖 父  : 안 기(安棋)
  • 아버지 : 안광묵(安光默)
  • 叔 父  : 안길묵(安吉默)
  • 이복형 : 안재수(安載壽)
  • 장조카 : 안서현(安瑞鉉)장군 1888년 강화삼별초(京畿右營)수군통제사(별기군)--안경수장군 종로 한성감옥 구금중 함께 장조카의 신분으로 연좌되어 비밀리에 참수형 당함.
  • 종조카 : 안석현(安石鉉)-여주 閔應植(軍總司令官)집에 안경수獄死 사건 이듬해 천주교인 수 십명을 끌고 여주 민응식가에 들어가서 빼았겼던 안씨문중의 재산을 돌려 받으려고 三萬량을 약탈한 일로 구속됨 罪名(재상신분위조)징역 3년언도에 2년간 감옥생활한 기록은 法部大臣 申箕善(신기선)에게 보고하던 문서와 官報기록과 舊경향신문 기록인 1901년 4월의 기록이 존재한다.
  • 系 子 : 安國善(안국선)---생전에 여식만 둘있고 혼외자 安國泰란(황헌의 매천야록기록) 사람이 있었으나 후손이 끈긴 안경수의 系子로 안국선 이복조카가 등록됨(중구청제적본)
  • 장조카 : 안서현(安瑞鉉)장군 1888년 강화삼별초(京畿右營)수군통제사(별기군)1898년 한성부윤--종로 한성감옥 구금중 함께 장조카의 신분으로 연좌되어 1900년 5월29일 비밀리에 참수형 당함.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한영우 (2001년 10월 20일).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초 1쇄판. 서울: 효형출판. 65쪽 본문 및 각주 59쪽. ISBN 89-86361-5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