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먼 데 벌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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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먼 데 벌레라(아일랜드어: Éamon de Valera [e:mˠɔn̪ˠ dʲɛ vʲal̪ʲɛɾʲa], 영어: George de Valero 조지 데 벌레로[*], 1882년 10월 14일 ~ 1975년 8월 29일)는 아일랜드의 교사, 정치인이다. 미국 뉴욕 출신인 그는 영국에 대항해 아일랜드 독립에 힘썼으며 아일랜드 임시정부의 수반을 맡았다.
에이먼 데 벌레라
Éamon de Valer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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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제3대 대통령 | |
임기 | 1959년 6월 25일~1973년 6월 24일 |
전임: 산 토마스 오 켈라(제2대) 후임: 어스킨 해밀턴 칠더스(제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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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 |
출생일 | 1882년 10월 14일 |
출생지 | 미국 뉴욕 |
사망일 | 1975년 8월 29일 | (92세)
사망지 | 아일랜드 더블린 |
정당 | 아일랜드 공화당(피나 폴) |
배우자 | 시네아드 벤 드 발레라 |
종교 | 로마 가톨릭 |
서명 |
그는 아일랜드 자유국의 대통령, 아일랜드 공화국의 대통령을 역임했다. 또한 아일랜드 제헌의회의 의장이었으며 아일랜드의 총리(티셔흐)를 3번(1937년 12월 29일 ~ 1948년 2월 18일, 1951년 6월 13일 ~ 1954년 6월 2일, 1957년 3월 20일 ~ 1959년 6월 23일) 역임했다. 데 발레라는 20세기 아일랜드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부활절 봉기
편집문학도의 길을 걸은 그는 1904년 더블린 대학을 졸업했다. 교사에 임용되어 아일랜드어 부활운동에 참여했다. 게일어 연맹에 가입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쳤는데, 이 단체에서 수많은 미래의 아일랜드 독립운동가와 정치인들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할 무렵인 1913년 데 발레라는 아일랜드 의용군에 가입했고 1916년 발생한 부활절 봉기를 주도했다. 봉기 당시 패트릭 피어스와 체포되어 처형될 뻔했으나 미국 시민권자라는 이유로 풀려났다. 그러나 패트릭 피어스는 총살당했다.
정치 활동
편집부활절 봉기의 다음 해 신페인당 총재가 되어 1918년 아일랜드 총선을 승리로 이끈다. 아일랜드 의회를 구성 후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21년 영국-아일랜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아서 그리피스와 마이클 콜린스가 주축이 된 사절단을 영국으로 파견하였다. 아일랜드 대표단은 비공식 협상을 통해 조약을 체결한 뒤 더블린에 돌아왔다. 조약 내용을 살펴본 데 발레라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조약의 내용이 일방적으로 영국에 유리한 내용들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피스와 콜린스의 입장은 이 조약이 더 나은 자유를 위한 조약으로 이 조약으로 자치의 발판을 마련한 뒤 완전한 아일랜드의 독립을 달성하는 데 있었다. 데 발레라는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다.
영국-아일랜드 조약 체결 후 그는 대통령직을 사임한 후 신페인당과 함께 반정부노선으로 돌아섰다. 재선을 노렸으나 실패했다. 아일랜드 내전 이후 그는 당적을 옮겼다. 그는 신페인당에서 탈당한 뒤 아일랜드 공화당을 창당했다.
아일랜드 공화당은 1932년에 있었던 아일랜드 총선거에서 승리하여 집권정당이 되었고 데 발레라는 윌리엄 토머스 코즈그레이브의 뒤를 이어 아일랜드 자유국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듬해부터 영국과 관세협정에 들어갔다. 데 발레라는 이 협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영국의 식민통치에 체계적으로 저항하여 새 헌법을 세우고 영국의 해군기지를 폐쇄시켰다. 1951년과 1957년 아일랜드의 총리를 맡았다. 1959년과 1966년 아일랜드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외부 링크
편집
제3대 아일랜드 대통령 | ||
전 임 산 토마스 오 켈라 |
1959년 6월 25일 ~ 1973년 6월 24일 | 후 임 어스킨 해밀턴 칠더스 |
더글러스 하이드 · 숀 T. 오켈리 · 에이먼 데 벌레라 · 어스킨 H. 칠더스 · 케어벌 오덜리 · 패트릭 힐러리 · 메리 로빈슨 · 메리 매컬리스 · 마이클 D. 히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