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거조사 영산전
영천 거조사 영산전(永川 居祖寺 靈山殿)은 경상북도 영천시 거조사에 있는, 고려 시대에 지어진 불교 건축물이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14호로 지정되었다.
대한민국의 국보 | |
종목 | 국보 제14호 (1962년 12월 20일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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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 | 1동 |
시대 | 고려 우왕 원년 (1375년) |
위치 | |
주소 |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 622 |
좌표 | 북위 36° 1′ 12.86″ 동경 128° 45′ 52.19″ / 북위 36.0202389° 동경 128.7644972° |
정보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정보 |
거조사 정보
편집영산전이 있는 거조사는 신라 효성왕 2년 원참조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혹은 경덕왕 때 건립되었다고도 한다. 이후, 은해사의 말사로 편입되면서 거조암이라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2021년 3월 23일 문화재청이 다시 거조암을 거조사로 명칭을 바꾸기로 했다.[1] 거조사는 팔공산 동쪽 기슭에 위치하며, 아미타불이 항상 머문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영산전의 특징
편집영산전은 거조사의 본전이다. 옛날에는 현존하는 유일한 신라시대 건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해체 보수할 때 발견된 묵서명에서 1375년(고려 우왕 원년) 8월 20일에 건립되었다고 밝혀졌다.[2]
이후 영산전은 여러 차례 고쳐 지어졌다고 한다. 안에 526분의 각기 다른 표정의 석조 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영산전의 건축 기법
편집영산전(靈山殿)은 전체 모양은 불규칙하게 채석된 장대석과 잡석으로 축조된 높은 기단위에 선 길죽한 형태이다.
소박하고 간결한 주심포계 형식으로 정면 7칸, 측면 3칸, 5량 구조의 맞배집으로 공포, 보의 단면, 솟을합장, 포대공 등에서 일부 고식을 볼 수 있다. 형태 및 구성 기법에 있어서는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고쳐 지으면서 많은 부분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가구(架構)는 간결한 수법으로 되어 측면 중앙 칸을 형성하는 두 고주(高柱)와 그 앞뒤의 평주(平柱)에는 뚜렷한 배흘림이 있다. 고주와 평주는 퇴보로 연결되어 평주 위의 공포에 의하여 퇴보 안 끝이 받쳐져 이것이 주심도리(柱心道里)를 받게 되고 출목(出目)으로 된 첨차는 퇴보 끝을 받으면서 외목도리(外目道里)를 받쳤다.
고주머리에는 뜬 창방(昌枋)을 돌리며 기둥 뒤에는 주두(柱頭)를 두고 포작으로 대들보 끝을 받고 끝은 중도리를 받쳤다. 대들보 중앙에는 키가 큰 제형(梯形)의 부재(不在) 위에 2중으로 된 포작을 올려 마루도리를 받치게 하였다. 마루도리는 내반(內反)된 소슬합장으로 받쳐 지고 천장가구(天障架構)는 없이 연등천장으로 되었다.
이 건물의 세부를 보면 주두나 소누(小累)가 다포집과 같은 형태로 된 것 이외는 주심포 양식의 초기적인 형태를 나타내는 중요한 가구이다. 평 주위에 놓인 공포 형태와 마루도리 위에 놓인 일종의 포대공(包臺工) 형태는 이 건물의 특징적인 양식이다. 첨차 밑에 겹쳐 헛초공으로 이 첨차를 받쳐 키가 큰 첨차처럼 되어 있는 것은 출목 첨차의 길이가 보통 보다 길게 나와 이를 보강하는 것으로 특이한 처리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또 대들보 중앙에 놓여 일종의 포대공으로 된 마루대공은 높직한 제형주(梯形柱) 위에 2중으로 된 포작이 있다. 아래 포작의 첨차는 퇴보 끝 보머리를 거꾸로 한 것 같은 형태이고 위쪽 포작의 첨차는 역제형(逆梯形)의 판장(板狀)이다.
사진
편집-
내부
각주
편집- ↑ 정, 주연 (2021년 3월 23일). “‘은해사 거조암’ 대신 ‘거조사’라 불러주세요”. 《법보신문》. ㈜법보신문사. 2023년 3월 26일에 확인함.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3월23일 “국보 제14호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을 ‘영천 거조사 영산전’으로 변경했다”고 밝혔다. 출처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
- ↑ 김, 찬영. “영천 거조사 영산전”. 《디지털영천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년 5월 5일에 확인함.
영산전은 고려 말인 1375년(우왕 원년) 8월 20일 거조사 주 본전(本殿)으로 건립
외부 링크
편집- 영천 거조사 영산전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