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노덕

일제 강점기의 기독교운동가
(윤정숙에서 넘어옴)

윤노덕(尹老德, 1889년 9월 19일 ~ 1979년 10월 23일)은 일제강점기의 기독교운동가, 사회사업가이다. 조선고아구제회의 창립 발기인이자 고아구제회 여자부회장을 역임했다. 감리교회의 초기 여자 장로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윤치오, 윤치소의 여동생이며 윤치영국회부의장의 누나이다. 해위 윤보선대통령, 윤일선서울대학교 총장의 고모이고, 좌옹 윤치호의 사촌 여동생이기도 하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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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렬한진숙의 7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1] 일찍이 사촌 윤치호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으며, 1904년 이병도의 6촌 형 이병림과 결혼, 1907년에는 정동교회 전도부인에 의해 다시 정동교회에 입교하고, 시집 가족들을 전도하여 교회로 인도하였다. 이후 정동감리교회의 장로로 장립되었는데 그는 한국교회의 초기 여자 장로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그 후 활발한 교회활동을 했으며 '화생보육원' 사업을 뒷받침해 주는 등 사회사업에도 힘썼다.

또한 조선고아구제회가 창립될 때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고아원 구제, 지원 활동을 하였다. 1939년 고아구제회에 부녀부를 설치할 때 그가 직접 주도하여 70여 명의 부녀회원을 모집하였다. 1935년에는 고아구제회 여자부회장에 선출되었다. 그해 1월에는 모금운동을 하여 경성 답십리동에 있는 경성고아원의 신축 자금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1950년 6ㆍ25 전쟁으로 피난갔을 때는 피난지인 경상북도 경주에서도 교회에 다니며 경주감리교회를 설립하는데 예배당 건립에 재산을 희사하였고, 이후 휴전 후에도 경주에 체류하며 경주감리교회에서 장로로 봉직하다가, 1957년 경기도 수원으로 이주하여 수원종로감리교회 장로로 활동했다. 만년에 다시 서울로 되돌아와 정동교회 원로장로로 추대되어 공로 표창을 받았으며 노환으로 별세했다. 훗날 서울 정동제일교회는 그녀의 공적을 기려 특별히 강당 이름을 윤노덕 홀이라 이름붙이기도 했다.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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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취동
(尹取東)
1798~1863
윤씨
(尹氏)
1835~1920
반계 윤웅렬
(磻溪 尹雄烈)
1840~1911
윤웅렬 가계도
연구 윤영렬
(蓮龜 尹英烈)
1854~1939
한진숙
(韓鎭淑)
1851~1938
동암 윤치오
(東庵 尹致旿)
1869~1950
동야 윤치소
(東野 尹致昭)
1871~1944
악연 윤치성
(岳淵 尹致晟)
1875~1936
간송 윤치병
(澗松 尹致昞)
1880~1940
남강 윤치명
(南岡 尹致明)
1885~1944
동산 윤치영
(東山 尹致暎)
1898~1996
윤활란
(尹活蘭)
1884~1967
윤노덕
(尹老德)
1889~1979
이름 미상


  • 서모: 이름 미상[4], 아버지 윤영렬의 첩
    • 이복 여동생: 윤씨(이름 미상, ? ~ ?)
    • 이복 동생: 윤치정(尹致晶)
    • 이복 동생: 윤치일(尹致日)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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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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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영렬의 9남 4녀 중에서도 차녀에 해당된다.
  2. 윤치영 《윤치영의 20세기: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 40페이지
  3. 정지환 (2005년 3월 11일). “역사에 대한 모독”. 바른지역언론연대. 2007년 10월 31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4. 윤치호, 《윤치호 일기 (1916-1943)》 (김상태 편 번역, 역사비평사, 2001) 617페이지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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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일보 1931.04.29 7면 사회면
  • 동아일보 1935.01.01 25면 사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