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취동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윤취동(尹取東, 1798년 7월 18일 ~ 1863년 12월 21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효자, 문신으로 윤두수의 7대손이며 증조는 돈령부사 윤세겸(尹世謙)이고 조부는 낭청을 지내고 호조참의 비서원승에 추증된 윤발(尹潑)이다. 가선대부 의정부참찬에 추증된 윤득실(尹得實)의 셋째 아들이었다. 관직은 중추부지사에 이르렀고 사후 증직으로 의정부찬정추증되었다. 前 대한민국 4대 대통령인 윤보선의 증조할아버지이다.

윤취동
출생1798년 7월 18일
사망1863년 12월 21일
(향년 65세)
성별남성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국적조선
부모아버지 윤득실
어머니 남양 홍씨
형제첫째 형 윤교동
둘째 형 윤우동
누이동생 해평 윤씨
배우자본처 고령 신씨
이처 안동 김씨
자녀장녀 해평 윤씨
차녀 해평 윤씨
장남 윤웅렬
차남 윤영렬

몰락 양반가 출신이었으며 어려서 고아가 되었지만 그 자신의 근면성으로 아산군 둔포면 일대에 재산과 농토를 축척했고, 이는 후손들의 출세의 발판이 되었다. 본관은 해평. 자(字)는 사임(士任), 호(號)는 신덕제(新德齋)이다. 충청남도 천안군 출신.

생애 편집

출생과 가계 편집

윤취동은 충남 천안 출신으로 1798년 통덕랑을 지내고 사후 통정대부 이조참의 가선대부 의정부공찬추증윤득실(尹得實)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조 때의 형제 정승인 윤두수·윤근수 형제의 후손이었다.

6대조 윤흔은 임진왜란 때 호성공신이고, 벼슬은 자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사후 의정부 좌의정에 증직되었다. 5대조 윤취지음서 제도로 출사하여 가의대부 중추부동지사에 이르렀고, 고조부 윤채는 세자익위사사어를 지내고 사후 이조참판추증되었으며 증조부 윤세겸은 순흥부사, 성주목사, 사도사첨정 등을 지내고 동지돈녕부사에 이르렀다. 그러나 할아버지 윤발은 서자였고, 관직에 오르지 못하다가 수원부 행궁을 짓는데 집이 편입되면서 1791년부터 1794년까지 잠깐 낭청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794년 낭청직에서 물러나면서 더이상 벼슬에 임명되지 못했다.

당숙 윤득우동래부사, 병조참판, 광주부윤을 지냈으나 소론 신치운의 문인이라 하여 여러번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1] 할아버지 윤발(尹潑)은 관직이 없다가 집이 수원부 행궁으로 편입되면서 1791년부터 1794년 잠시 낭청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현직에 임용되지 못했다. 아버지 윤득실은 수원부의 유생, 무사들을 상대로 취재를 했지만 번번히 낮은 등급을 받았다. 아버지 윤득실은 생전 관직이 통덕랑에 올라갔지만 을 좋아하다가 38살의 나이로 일찍 사망하였다.[2] 윤보선에 의하면 그 일 때문에 훗날 윤취동의 둘째 아들 윤영렬은 자신의 자손들에게 술을 조심할 것을 거듭 당부했다 한다.

젊은 시절 편집

그러나 그의 가계는 몰락했고, 선대에 경기도 수원 이궁터에 거주하다가 그의 조부 대에 충청남도 천안 모산면(毛山面)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동유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친히 나무 짐을 지는 등으로 양친에 힘썼다. 부모의 병환을 적극적으로 구완하였다.[3] 그의 아버지 대에까지만 해도 천안군 모산면 가장동(可長洞)에 살았고, 천안 모산면과 일북면 일대에는 그의 일가들의 분묘가 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맏형을 섬기기를 아버지처럼 하고 조카를 친자처럼 양육하였다. 그 후 흉년이 당하여 가난한 이의 관납미를 모두 대신 납부해 주어 주민들은 그의 송덕비까지 세우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 조부의 원사(寃死)를 누차 상언하니 그 효성에 감동되어 쾌히 신원하고 증직까지 내렸다 한다.[3]

형으로는 윤교동윤우동이 있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그는 맏형 윤교동을 어버이처럼 섬겼다고 한다. 또한 그는 아산에 정착한 뒤 일찍 죽은 자신의 맏형 윤우동의 손자 윤치중(尹致仲)과 윤치석(尹致奭) 등을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에 와서 정착하게 했다.

 
손자 윤치호
 
둘째 아들 윤영렬 내외

셋째 아들이던 그의 대에 충청남도 천안군 모산면에서 근처 충남 아산군 삼북면(三北面) 신항리로 이주했다. 후일 천안군의 모산면과 일북면의 일부가 아산군에 편입되어 아산군 삼북면과 합쳐져서 아산군 둔포면이 되었다. 관직은 중추부지사에 이르렀다.

자수성가 편집

윤취동은 천안에서 살다가 아산으로 이주한 뒤 근면히 일해 부(富)를 축적했다.[4] 그의 집안은 서서히 충남 아산의 부호로 자리 잡았다.[4] 가난한 몰락 양반 출신 농부의 셋째 아들이었던 그는 부지런히 일하여 농토를 마련했고, 그의 후손들은 그가 쌓아 올린 부를 기반으로 다시 출세할 수 있었다.

아들이 없던 맏형 윤교동은 먼 일가의 아들 윤팽렬(尹彭烈)을 양자로 들였으나 윤팽렬 역시 형 윤교동이 사망하고 4년만인 1833년 9월 23일에 사망하였다. 그는 둘째 형 윤우동의 아들 윤봉렬을 친 아들처럼 거두었으나 윤봉렬은 1850년 7월 3일에 사망한다. 그는 조카 윤봉렬의 두 아들을 거두어 양육하였다. 윤봉렬의 아들들인 종손 윤치중, 윤치석은 신항리 신촌부락에서 가까운 곳으로 분가했는데, 윤치중은 신항리 방곡(芳谷) 바락에, 윤치석은 신항리 방이골 부락에 각각 정착하였다.

나이 40이 넘도록 오랫동안 아들이 없다가 40세가 넘어서 후취 안동김씨(安東金氏)로부터 아들 윤웅렬윤영렬을 얻었다. 생전 관직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사후 아들 웅렬, 영렬 형제의 영귀로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대한제국 수립 이후 다시 자헌대부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에 추증되었다.

일화 편집

그가 둔포장을 다녀오는 길에 쓰러진 스님을 발견해 극진히 보살펴 줬더니 명당자리를 알려줬다 한다.[5] 그 후 부친 묘를 이곳으로 이장했고 아들대에 출세하게 되었다 한다.[5] 그는 처음에 스님이 일러준 이순신 장군 묘역 근처에 아버지 윤득실의 묘를 매장했는데, 만약 이순신의 후예들에게 드러나게 되면 실수로 했다고 하라고 지시받았다. 그 뒤 이순신 묘소 근처에 평토로 암장했다가 현재의 자리(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산 34-2)로 옮겼다고 한다. 그가 잡은 산소에는 부친 윤득실 내외, 형 윤교동 내외, 첫 부인 고령 신씨 등이 안장되어 있다.

그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석곡리 선영하에 있다. 그의 묘소 뒤편 북쪽 방향에 할머니 전주이씨 묘와 그 위에 할아버지 윤발의 묘소가 있고, 그의 둘째 부인 안동 김씨 묘소는 그 아래편 아들 윤웅렬의 묘 북쪽 건너편에 있다.

가계 편집

윤취동
(尹取東)
1798~1863
전주이씨
(全州李氏)
1844~1936
반계 윤웅렬
(磻溪尹雄烈)
1840~1911
김정순
(金貞淳)
1879~1959
연구 윤영렬
(蓮龜尹英烈)
1854~1939
윤영렬 가계도
한진숙
(韓鎭淑)
1851~1938
윤씨
(尹氏)
1835~1920
친 누이동생 (花峴妹)

좌옹 윤치호
(佐翁尹致昊)
1865~1945
남포 윤치왕
(南圃尹致旺)
1895~1982
윤치창
(尹致昌)
1899~1973
손진실
(孫眞實)
홍정욱 가계도 참조


윤취동
(尹取東)
1798~1863
윤씨
(尹氏)
1835~1920
반계 윤웅렬
(磻溪 尹雄烈)
1840~1911
윤웅렬 가계도
연구 윤영렬
(蓮龜 尹英烈)
1854~1939
한진숙
(韓鎭淑)
1851~1938
동암 윤치오
(東庵 尹致旿)
1869~1950
동야 윤치소
(東野 尹致昭)
1871~1944
악연 윤치성
(岳淵 尹致晟)
1875~1936
간송 윤치병
(澗松 尹致昞)
1880~1940
남강 윤치명
(南岡 尹致明)
1885~1944
동산 윤치영
(東山 尹致暎)
1898~1996
윤활란
(尹活蘭)
1884~1967
윤노덕
(尹老德)
1889~1979
이름 미상
  • 처: 고령신씨([6] 高靈申氏, 1797년 - 1827년 3월 17일)
  • 처: 안동김씨(安東金氏, 1810년? - 1900년 10월), 김기건(金驥健)의 딸
    • 딸: 해평윤씨(1835년 - 1920년)
    • 사위: 이원시(李源始, 본관은 용인), 2남 2녀
    • 딸: 해평윤씨
    • 사위: 이인서(李寅恕, 본관은 전주)

같이 보기 편집

참고 편집

기타 편집

오랫동안 아들이 없다가 후처인 안동 김씨에게서 나이 40이 넘어 아들을 두었다. 이 때문에 다른 친척들과 항렬, 나이 차이가 많이 나게 되었다.

둘째 부인인 안동김씨에게서도 아들이 없자 그는 아산 근처 웅달산에 기도를 한 후 첫 아들 윤웅렬을 얻게 되었는데, 그 뒤 둘째 아들을 얻으면서 영웅에서 이름을 따서 윤영렬이라 하였다. 늦게 산에 기도하고 아들 둘을 얻었다고 믿은 그는 기도드린 산을 집웅달산이라 이름붙였다. 그의 부인 안동김씨가 기도를 드리던 곳은 염수대라는 지명이 붙게 됐다.

그의 형 윤교동은 아들이 없어 생전에 양자 윤팽렬을 들였지만 윤교동 사후 윤팽렬도 후사 없이 요절했고, 둘째 형 윤우동과 윤우동의 아들 윤봉렬도 일찍 죽었으므로, 셋째 아들인 윤취동이 어린 종손자들의 양육과 함께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

각주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