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 (교육자)

대한민국의 교육자 (1909–1951)

윤치호(尹致浩, 1909년 6월 13일 - 1951년 1월 26일)는 일제강점기한국의 교육자, 개신교 선교사이자 사회사업가이다. 목포에서 보육원인 공생원(共生園)을 설립했다.

윤치호(尹致浩)
출생1909년 6월 13일(1909-06-13)
대한제국 전라남도 함평군
사망1951년 1월 26일(1951-01-26)(41세)
대한민국 전라남도
성별남성
본관파평
직업교육인, 종교인, 사회사업가, 목수
종교개신교
배우자윤학자
자녀2녀 2남

생애 편집

1909년 6월 13일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 상옥리 옥동부락에서 윤영대와 권채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옥동부락에 정착한 파평윤씨 종손으로 태어났으나, 몰락하여 소작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환경으로 전락했다. 어린 시절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고 1923년 14세에 아버지 윤영대가 사망하면서 소년가장이 되었다.

미국선교사의 주선으로 1924년 함평의 개척교회인 옥동예배당의 미국인 기독교 여선교사 줄리아 마틴(Jullia Martin, 한국어명 마율리)이 그를 받아들여 곧 자신의 조수로 채용하였다. 그녀의 후원으로 경성부의 피어선기념성경학원(현 평택대학교)에 입학하였다. 피어선 성경학당을 마치고 1927년 목포로 내려와 학당에서 배운 목공 일을 발판으로 나사렛 목공소라는 목공소를 차려 목수 일을 하면서 전라남도 최초의 개척교회인 양동교회에 다니며 전도사로도 활동했다.

1928년 여러명의 불우한 고아들을 데려와 양자, 양녀로 키우다가 보육원인 공생원을 설립했다. 1938년 일본 여성 타우치 치즈코(田内 千鶴子[1])를 만나 그녀의 청혼을 받고 그해 10월 15일 결혼하면서 그녀는 이름을 윤학자로 고쳤다. 그들은 2녀 2남[2]을 낳았다. 윤치호는 해방 뒤에도 계속 보육원을 운영했으며, 1950년에는 6.25 전쟁이 터졌는데 1951년 1월 26일 식량 지원을 요청하러 광주의 전남도청으로 갔다가 실종되었다.

타우치 치즈코는 일제강점기 후반 일본인에게 가해지던 편견을 인내하며 남편의 사업을 도왔다. 그녀는 남편 사후에도 보육원을 운영하며 고아들을 돌보았고, 목포 고아들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받았다.[3]

각주 편집

  1. 목포의 일본인 교회를 다니던 개신교 신자인 타우치는 목포의 선교사들이 세운 정명여학교의 음악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2. 장남 윤기(1942~) 및 그 부인 윤문지(일본명: 후미에 1949~)는 윤학자의 일생을 담은 《어머니는 바보야》를 1985년 출간했다.
  3. 고아와 불우이웃을 도운 점이 평가되어 그녀가 1968년 폐암으로 사망하자 목포시 최초의 시민장이 거행되고 3만 명의 조문객이 몰렸다.

같이 보기 편집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