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 (전국)
이신(李信, ? ~ ?)은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의 장군이다. 진 시황제 휘하의 전국통일 당시에 활약하였다. 연나라 · 제나라를 정벌할 당시에 공을 세웠으나, 초나라에서 크게 패한 일로 유명하다.
생애편집
연나라 정벌편집
기원전 227년(진시황 20), 진나라의 명장 왕전이 연태자 단의 진 시황제 암살 시도를 보복하기 위하여 연나라를 공격하였으며, 기원전 226년에는 연나라의 도읍인 계성을 공격하여 연왕 희(喜)를 요동(遼東)으로 몰아냈다.[1] 《사기》 백기왕전열전에 따르면, 당시 이신은 연수(衍水)에서 연태자 단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를 사로잡는 공로를 세웠다.[2] (다만 연태자 단의 최후에 대해서는 계성이 함락될 당시 죽었다는 설[3]과 아버지인 연왕 희에게 살해당하고 그 수급이 진나라에 바쳐졌다는 설[4] 등이 따로 전해진다.) 이 일로 인하여 젊고 용맹했던 이신은 진 시황제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2]
초나라 정벌편집
기원전 224년(진시황 23) 경, 진 시황제가 이신에게 "초나라를 격파하려면 얼마나 되는 군사가 필요한가?"라고 묻자, 이신은 "20만 명을 넘지 않아도 됩니다."라 하였다. 그러나 백전노장이었던 왕전은 "60만 명이 아니면 안됩니다."라 하였다. 진 시황제는 왕전이 늙어서 겁이 많아졌다고 여기고는 이신과 몽염에게 20만 군사를 내주어 초나라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후 이신과 몽염은 각기 평여(平與)와 침(寢)을 공격하여 초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그러나 이신은 언영(鄢郢)을 격파한 후 성보(城父)에서 몽염과 합류하는 과정에서 사흘 밤낮으로 추격해온 초나라 군대의 반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달았지만 이신은 다시 군을 모아 초를공격해 항연을죽이고 초나라는 완전히 멸망하였다.[5]
제나라 정벌편집
기원전 221년(진시황 26), 이신은 왕전의 아들인 왕분과 함께 제나라를 공격하였다.[6] 제나라의 마지막 왕인 제왕 건은 상국인 후승(后勝)의 말을 듣고 싸우지 않고 항복하였다. 이로써 제나라가 멸망하고 전국이 통일되었다.[7]
가계편집
그의 후손으로는 전한의 장수인 농서현 사람 이광(李廣)이 있다. 이광의 집안은 대대로 궁술을 익혔는데, 이광은 특히 기마술과 궁술에 능하여 한 무제 때에 이르러 흉노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자결하였다. 이광에게는 이당호(李當戶) · 이초(李椒) · 이감(李敢) 등의 세 아들이 있었다. 이당호와 이초는 모두 이광보다 빨리 죽었고, 이감은 아버지가 자결한 일에 원한을 품고 이광의 상관이었던 대장군 위청을 폭행했다가 그 외조카인 곽거병의 보복으로 사냥터에서 화살을 맞고 죽었다.[8]
이감에게는 딸이 하나 있어서 한 무제의 태자로부터 총애를 받아 중인(中人)이 되었는데, 그 덕분에 이감의 아들인 이우(李禹) 또한 태자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이우는 사익 만을 탐했기 때문에 도리어 이씨 가문을 쇠락케했다.[8]
이당호에게는 아들인 이릉(李陵)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일찍 죽어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는 훗날 이광리를 따라 흉노 원정에 나섰는데, 불리한 여건에서 적을 맞아 싸워 큰 공을 세웠으나 식량이 떨어지고 구원병도 오지 않자 결국 흉노에 항복했다. 이 일로 인하여 이릉의 모친과 처자는 모두 처형당했고, 이씨 가문의 명성은 크게 쇠락했다. 농서 일대의 사대부들조차 이씨 가문을 수치스럽게 여겼다고 한다.[8]
후대의 족보에 따르면 이신은 농서 이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서량의 건국자 이고도 농서 이씨이며, 당 황실 또한 이고의 후손을 자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