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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채씨(仁川 蔡氏)는 인천광역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인천 채씨 (仁川 蔡氏)
관향 인천광역시
시조 채선무(蔡先茂)
주요 인물 채보문, 채수, 채소권, 채무택, 채무일, 채무적, 채무, 채락, 채종길, 채이항, 채헌징, 채기중, 채응언, 채문식, 채명신, 채재억, 채이식
인구(2015년) 43,387명
인천채씨 대종회

목차

기원편집

『인천채씨문헌고(仁川蔡氏文獻攷)』에 따르면 순(舜)임금의 사도(司徒) 설(契)의 후손인 채림(蔡琳)이 기자(箕子)를 따라 고조선에 들어온 것이 채씨의 연원이 되었다.

역사편집

인천 채씨(仁川蔡氏)의 시조 채선무(蔡先茂)는 고려 중엽 벼슬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에 이르렀는데 인천에 세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인천을 관향으로 하게 되었다. 대구광역시 도곡동에 그의 묘소가 있다.

채선무의 아들 채신징(蔡愼徵)은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대장군(大將軍)을 지냈고, 손자 채보문(蔡寶文)은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내고 금성백(錦城伯)에 봉해졌다.

분파편집

12세에 이르러 채기(蔡耆)로부터 직장공파(直長公派), 채륜(蔡倫)으로부터 필선공파(弼善公派), 채우상(蔡遇祥)으로부터 판서공파(判書公派), 채승(蔡昇)으로부터 참의공파(參議公派), 채징(蔡澄)으로부터 군수공파(郡守公派), 채연(蔡淵)으로부터 생원공파(生員公派), 채호(蔡灝)로부터 배천공파(白川公派), 채이(蔡怡)로부터 복순공파(福順公派)가 분파되었다.

인물편집

  • 채보문(蔡寶文) : 1163년(의종 17) 문과에 급제하여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병부시랑(兵部侍郞), 추밀원사(樞密院事), 예부상서(禮部尙書), 태자빈객 지제고(太子賓客知制誥),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였고, 금성백(錦城伯)에 봉해졌다. 『동문선(東文選)』 권13에 칠언율시 3수가 전한다.
  • 채수(蔡壽, 1449년 ~ 1515년) : 14세손. 1469년(예종 1) 식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대사헌, 충청도관찰사, 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군되었다. 저서로 《나재집》 2권이 있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 채소권(蔡紹權) : 채수의 아들. 1504년(연산군 10) 진사가 되고, 150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1511년(중종 6) 정언이 되었다. 1520년 홍문관부응교와 장령을 거쳐 사간·사헌부집의·홍문관 전한과 시독관(侍讀官)·동부승지가 되고, 1523년 좌부승지에서 승지가 되었다. 다음해 대사간에서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다. 1528년 청주목사, 1531년 경기도관찰사, 1533년 대사헌·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다음해 한성부좌윤·형조참판이 되었으며, 1535년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 채무택(蔡無擇, ? ∼ 1537년) : 1524년(중종 1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부교리·장령·응교 등을 거쳐 1535년 대사간, 1536년 부제학이 되었다.
  • 채무일(蔡無逸, 1496년 ∼ 1556년) : 채수의 손자. 전생참봉(典牲參奉) 채윤권(胤權)의 아들. 1540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좌랑을 지냈다. 1544년 부안현감으로 있을 때 중종이 사망하자 선화(善畵)로 천거되어 중종의 화상을 그렸다. 이로써 이조정랑에서 헌납이 되었고, 왕명을 받아 간의(簡儀)를 수리하였다. 경사(經史)와 역(易)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서화·음률·의학·복서(卜筮)에도 뛰어나 명성이 높았다. 벼슬이 한성서윤에 이르렀다.
  • 채무(蔡楙, 1588년 ~ 1670년) : 1633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로 기용되고, 1636년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1645년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이 되어서는 부당한 제도를 개혁하고 세금과 부역을 감면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다. 1648년 성균관전적을 지냈으며, 이어 병조좌랑이 되었다. 저서로는 『백포문집』이 있다.
  • 채이항(蔡以恒, 1596년 ∼ 1666년) :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활동하고, 청(淸)에 대한 복수책을 상소하였다. 그 뒤 척화신으로 청나라의 미움을 사 1640년 심양(瀋陽)에 잡혀갔다가 1643년에 돌아왔다. 1648년 그의 충의를 높이 사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제수되었고, 1661년(현종 2) 석성현감(石城縣監)이 되어 치적과 진휼(賑恤)에 힘쓴 공으로 포상되었다. 그 뒤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를 거쳐 평시서영(平市署令)에 이르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 채헌징(蔡獻徵, 1648년 ∼ 1726년) : 167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조·병조의 낭관(郎官)을 거쳐 사간원의 정언·헌납, 사헌부지평, 시강원필선 등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진주목사·인동현감·영해부사 등을 지냈다. 1719년 통정(通政)에 올라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저서로는 『우헌문집』이 있다.
  • 채문식(蔡汶植, 1925년 ~ 2010년) : 제8·9·10·11·12·13대 국회의원. 제11대 국회 의장.
  • 채명신(蔡命新, 1926년 ~ 2013년) : 육군 중장
  • 채재억(蔡載億, 1938년 ~ ) : 제9대 공업진흥청장
  • 채이식(蔡利植, 1949년 ~ ) :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채희봉(蔡熙奉, 1966년 ~ ) : 청와대 산업정책비서관

과거 급제자편집

인천 채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1명, 무과 급제자 11명, 생원·진사 85명을 배출하였다.[1]

고려 문과

채보문(蔡寶文)

문과

채락(蔡洛) 채륜(蔡倫) 채명보(蔡命寶) 채명운(蔡命運) 채무(蔡楙) 채무두(蔡無斁) 채무일(蔡無逸) 채사흠(蔡思欽) 채소권(蔡紹權) 채수(蔡壽) 채수(蔡壽) 채용(蔡容) 채일상(蔡一祥) 채임소(蔡任紹) 채장오(蔡章五) 채장헌(蔡章獻) 채재(蔡載) 채정린(蔡廷麟) 채지연(蔡之沇) 채헌징(蔡獻徵) 채희범(蔡希範)

무과

채광익(蔡光益) 채락(蔡洛) 채몽익(蔡夢翼) 채봉일(蔡奉日) 채성린(蔡聖麟) 채시한(蔡蓍漢) 채정순(蔡廷順) 채지반(蔡之潘) 채지청(蔡之淸) 채진(蔡津) 채후영(蔡後榮)

생원시

채광우(蔡光禹) 채구강(蔡九江) 채구장(蔡九章) 채구징(蔡耉徵) 채규섭(蔡奎燮) 채락(蔡洛) 채명보(蔡命寶) 채명원(蔡命元) 채무이(蔡無易) 채무일(蔡無逸) 채무적(蔡無敵) 채무태(蔡無怠) 채문징(蔡文徵) 채백휴(蔡百休) 채범곤(蔡範坤) 채복휴(蔡復休) 채붕(蔡鵬) 채상락(蔡相洛) 채석규(蔡錫圭) 채선견(蔡先見) 채송길(蔡宋吉) 채수(蔡壽) 채술선(蔡述先) 채시간(蔡蓍幹) 채시광(蔡蓍光) 채시방(蔡蓍邦) 채시창(蔡蓍昌) 채시풍(蔡蓍豊) 채영걸(蔡瀛傑) 채영휴(蔡永休) 채용(蔡容) 채응린(蔡應麟) 채응상(蔡應祥) 채이복(蔡以復) 채이휴(蔡以休) 채익하(蔡翊夏) 채인복(蔡仁復) 채주욱(蔡周郁) 채준헌(蔡俊獻) 채지면(蔡之沔) 채지연(蔡之沇) 채지함(蔡之涵) 채지호(蔡之湖) 채하징(蔡河徵) 채헌(蔡瀗) 채형락(蔡亨洛) 채홍수(蔡弘壽) 채홍조(蔡鴻祚)

진사시

채구몽(蔡九夢) 채구연(蔡九淵) 채구운(蔡九雲) 채무(蔡楙) 채무강(蔡無彊) 채무외(蔡無畏) 채무일(蔡無逸) 채무회(蔡無悔) 채무휼(蔡無恤) 채복휴(蔡復休) 채상섭(蔡商燮) 채석주(蔡錫疇) 채소권(蔡紹權) 채수(蔡壽) 채순묵(蔡純默) 채순억(蔡淳億) 채승권(蔡承權) 채시숭(蔡蓍崇) 채식(蔡㵓) 채용덕(蔡龍德) 채원검(蔡元儉) 채유검(蔡有儉) 채윤권(蔡胤權) 채응룡(蔡應龍) 채일규(蔡一揆) 채장한(蔡章漢) 채재(蔡載) 채정린(蔡廷麟) 채준식(蔡駿植) 채준원(蔡俊源) 채지경(蔡之經) 채지숙(蔡之淑) 채필흠(蔡弼欽) 채헌징(蔡獻徵) 채홍수(蔡弘壽) 채희(蔡禧) 채희범(蔡希範)

집성촌편집

인구편집

  • 1985년 8,515가구 34,838명
  • 2000년 11,415가구 37,391명
  • 2015년 43,387명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