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수 (1937년)
장덕수(1937년 - 2008년 1월 2일)는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이자 4·19 혁명 유공자이다. 그는 4·19 혁명 직전 혁명의 도화선이 된 선언문을 최초로 낭독한 인물이다. 호는 해암[1]으로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인 장덕수와 구분을 위해 해암 장덕수로 부른다.
생애
편집1960년 3월의 3·15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전국적인 집회가 발생했다. 그러나 집회에 참가한 학생 김주열[2]이 실종되었고, 그는 실종 한달 뒤인 4월 11일에 얼굴이 일그러진 시신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다.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김주열 군의 시체가 떠오르자, 4월 12일 장덕수는 정부 당시 시국선언문을 낭독했다.[1] 당시 장덕수는 4·19 의거 때 해인대학(현 경남대학교) 정경학과 학회장이었다.[1]
그 뒤 1961년 5·16 군사 정변 때 전국에 지명수배돼, 같은 해 5월 투옥되었으나 동년 7월에 석방됐다. 이후 그는 1977년까지 요시찰 대상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1]
그 뒤 사회활동에도 투신하여 1989년 경남대학교 총동창회 회장, 1992년 3·15 마산민주의거협의회 회장, 1993년 3·15 의거기념사업회 수석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2008년 1월 2일에 사망하니, 사망당시 나이는 향년 71세였고, 김해 장유 e-좋은중앙병원에서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평가
편집"지역사회에서 오늘의 민주사회를 이룬 근간이 됐던 분이셨다"는 시각이 있다.
가족 관계
편집각주
편집같이 보기
편집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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