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발[1](張勃, ? ~ 기원전 47년)은 전한 후기의 제후로, 경조윤 두릉현(杜陵縣) 사람이다. 대사마 장안세의 손자이자 태복 장연수의 아들로, 증조부 장탕 이래로 고관을 배출한 명문가 출신이었다.

생애 편집

감로 3년(기원전 51년), 장연수의 뒤를 이어 부평(富平侯)에 봉해졌다.

초원 2년(기원전 47년), 원제는 조서를 내려 열후들로 하여금 수재를 천거하게 하였는데, 장발은 평소 친분이 있었던 진탕을 천거하였다. 그러나 진탕이 임용을 기다리던 중 죄를 지었고, 장발은 책임을 물어 식읍 2백 호를 깎였다. 얼마 후 죽었고, 시호(繆)를 받았다. '유'는 '명성과 실상이 어긋났다'라는 뜻으로, 생전에 진탕을 천거하였기 때문에 이런 시호를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진탕은 훗날 서역에서 공을 세웠고, 사람들은 장발에게 사람 보는 눈이 있었다고 칭송하였다.

출전 편집

  • 반고, 《한서
    • 권18 외척은택후표
    • 권59 장탕전
    • 권70 부상정감진단전

각주 편집

  1. 외척은택후표에서는 장창(張敞)이라고 하는데, 전대흔은 勃의 옛글자 㪍을 敞으로 잘못 적은 것으로 보았다.
선대
아버지 부평애후 장연수
전한의 부평후
기원전 51년 ~ 기원전 47년
후대
아들 부평공후 장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