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왜변
정해왜변(丁亥倭變)은 1587년 음력 2월 왜구들이 전라도 남해안을 범한 사건이다. 1587년 4월 3일(음력 2월 26일) 한양에 보고가 접수되었다. 왜구와 싸우던 녹도권관(鹿島權管) 이대원(李大源, 1566~1587)이 전사했다. 조정에서는 신립(申砬, 1546~1592)과 변협(邊協, 1528~1590)을 방어사(防禦使)로, 김명원(金命元, 1534~1602)을 전라도순찰사로 삼아 방어하게 했다.
정해왜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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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지휘관 | |||||||
이대원† 신립 변협 김명원 심암 원호 이필 |
사을화동 신사부로 긴지로 마고지로 | ||||||
병력 | |||||||
해적선 18척 | |||||||
피해 규모 | |||||||
포로 130여명 |
녹도(鹿島)와 손죽도(損竹島, 오늘날 巽竹島)에 왜적 18척이 들어와 행패를 부린다는 급보가 들어오자[1] 당시 전주 부윤으로 있던 남언경(南彦經, ?~?)은 전주에 낙향하여 있던 정여립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정여립은 옛 정을 생각하여 남언경을 도와 대동계원들을 데리고 출병하였다.[2] 당시 왜구는 별로 수가 많지 않아 대동계원이 녹도에 도착하였을 때 이들은 이미 퇴각한 뒤였다.[3] 그러나 손죽도에 정박하고 있던 왜구를 발견하여 기습 공격, 미처 떠나지 못한 왜구들을 전멸시켰다.[4]
사태가 종료된 뒤 4월 17일(음력 3월 10일) 비변사에서는 전라좌수사 심암과 전라우수사 원호에게 책임을 물어 두 사람을 국문하였다. 이때 일본군의 앞잡이를 선 자가 조선인 사을화동(沙乙火同)이다. 3년 뒤인 1590년 4월 2일(음력 2월 28일) 조선 통신사를 파견하는 조건으로 사을화동과 함께 왜구 두목들인 신삼보라(信三甫羅, 신사부로)·긴요시라(緊要時羅, 긴지로?)·망고시라(望古時羅, 마고시로) 를 조선으로 송환, 모두 처형하였다.
'손죽도'(損竹島)에는 정해왜변에서 전사한 이대원 장군의 사당이 있으며, 주민들은 해마다 3월 3일에 제를 지낸다.[5]
각주
편집- ↑ 김재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99페이지
- ↑ 선조수정실록 23권, 선조 22년 10월 1일 乙亥 5번째기사.....丁亥倭變, 列邑調兵, 全州府尹南彦經, 踈迂不知所爲。 請汝立分軍, 汝立當之不辭, 一號令間, 軍兵皆會, 部分調遣, 不日而辦。 其將領則汝立皆用大同禊中親密武士。 賊退散軍,
- ↑ 김재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100페이지
- ↑ 김재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101페이지
- ↑ [네이버 지식백과] 손죽도 [巽竹島]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