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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원(金命元, 1534년 ~ 1602년 12월 13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응순, 호는 주은, 시호는 충익, 본관은 경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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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편집

왜란 당시 한양 방어선을 치고 있었던 자로, 승지 김만균의 아들이자 이황의 문인으로 1558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1년 식년문과에 급제해 1569년 종성 부사가 되고 내외직을 거쳐 1587년 좌참찬으로 의금부지사를 겸했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수습해 평난공신 3등에 책록되고 경림군에 봉해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검사로 임명되었고, 이어 음력 4월 29일 도원수에 임명되어 한강에 주둔하였다.[1] 그러나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의 정예군인 경군 기병대가 전멸하고 도순무사 신립이 자살한 것이 이미 하루 전인 음력 4월 28일이었는 바, 김명원과 부원수 신각, 도검찰사 이양원의 한강 배치는 선조를 비롯한 조정이 한양을 포기하고 몽진할 때까지 한강 방어선에서 시간을 끌기 위함이었다.

불과 1천여 명으로 4만명의 일본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고, 방어선이 무너지는 가운데 김명원, 신각, 이양원은 모두 흩어진다.[2] 이때 김명원은 임진강까지 후퇴해 거기에 방어선을 치기로 하고 다른 지휘관들에게 음력 5월 18일까지 집결하라 명했다. 그러나 전쟁 와중의 혼란으로 인해 양주 쪽으로 후퇴했던 신각, 이양원과의 연락이 두절되어 버렸고,[3] 이일, 김억추 등의 장수들도 행방이 불명인 상태에서[4] 김명원은 혼자 임진강에서 싸우다가 음력 5월 17일 다시 패배(임진강 전투), 부장 신길, 유극량 등이 전사하고 겨우 북쪽으로 도망간다. 이 와중에 신각은 적전도주자로 오해를 받아 비변사에 의해 참형에 처해졌다가,[5] 나중에 무슨 이유에선지 복권되었다.[6]징비록》에 따르면 이때 조정에서 신각의 참수를 주도한 것은 우의정 유홍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거짓된 장계를 올린 사람은 역시 김명원이었다. '한강 방어 의 책임을 맡았다가 도주한 김명원 같은 자들'이라 하여 도주도망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김명원이 유성용을 서폿하는 직분이었는데도 말이다.

이후 김명원은 몽진한 조정에 합류하였고, 명나라 원병을 지휘한 조승훈, 순찰사 이원익과 함께 평양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7] 평하자면 한양방어-평양성방어에 전부 패배하고 부하가 참형되었으며 유극량 등이 어이없게 전사하였다. 평북 일대에서 징용은 머릿수대로 잘 했으나 왜란 때 곳곳에서 패배한 장수. 장계는 일부러 그랬는지 권율로 교체하자는 의론에서도 처절하게 시간낭비만 하였다.

1593년 송응창, 이여송이 지휘하는 명나라 원병이 오자 명나라 장수들의 자문에 응하고 이후 체직되어 도원수직을 권율에게 넘겨주었다.[8] 이후 호조판서, 예조판서, 공조판서를 역임했다. 판서 재임 중이었던 음력 7월 14일, 임진왜란 초기의 패전 책임을 지고 사간원에게 탄핵을 당했는데, 이때 실록을 보면 “김명원은 사람됨이 지나치게 순후하여 원수에는 적임자가 아니었다”는 주석이 달려 있다.[9] 선조는 김명원이 공을 세우지는 못했으나 고생을 많이 했다는 주장을 꺼내며 탄핵을 기각했다고 한다.[10]

1597년 요시라의 공작으로 파직된 이순신이 감옥에서 풀려나자 정탁, 유성룡, 심희수, 노직 등과 함께 그를 위로하였다.[11] 같은 해 칠천량 해전으로 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전멸하자 비변사의 여러 신하들이 당황하여 대답할 바를 모르는데 김명원과 이항복만이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자 왕이 이에 따랐다.[12] 이후 병조판서, 유도대장을 겸했고 좌찬성, 이조판서, 우의정을 거쳐 1601년 부원군에 진봉되고 좌의정에 이르렀다가 이듬해 음력 11월 1일 죽었다. 졸기에서는 때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부침이 심하다는 비방을 받았으나 풍도가 뛰어나 재상의 그릇이라고 평가받았다.[13] 정승에 오른 뒤에도 이룬 것은 없었으나 마음이 아름다워 남을 해치려 하지 않았다 한다. 한양-평양에서 연속으로 도망도주한 뒤 한강-임진강에서 튀는 와중 장계를 올려 신각을 모함하는 일도 빼놓지 않았으니 같이 도주도망한 신각이 평양근방에서 700여명을 잡았음에도 그 모함으로 비변사에 의해 참수당했다. '방무도부차귀언치야'의 전형. '나라에 도가 없는데 관직이 계속 올라가면 천치이다'

평가편집

민중들에 알려져 있기로, 한강 방어선에서 피한방울도 흘리지 않은 채 튄 실력자. 군사행정에서는 열렬히 징용하여 물자를 대는 건 좋았다고 한다. 특히 정여립 난과 같이 전면에서 빠져있을 때에는 또 낮은 직급으로 고분고분 당했을 때에는 위기를 잘 당해내었다고도 평해지기도 하였음.

묘소편집

가족 관계편집

  • 할아버지 : 김천령(金千齡)
    • 아버지 : 김만균(金萬鈞)
    • 어머니 : 순흥 안씨, 안준의(安尊義)의 딸
      • 형제 : 김경원(金慶元)
      • 부인 : 청주 한씨, 한관(韓綰)의 딸
        • 장남 : 김수개(金守愷)
        • 차남 : 김수인(金守仁) - 형님 김경원에게 양자로 감
          • 손자 : 김남정(金南挺)
          • 손녀 : 황곤재(黃坤載, 장수 황씨)에게 출가
        • 삼남 : 김수인(金守仁)
          • 손자 : 김남헌(金南獻)
        • 사남 : 김수렴(金守廉)
          • 손자 : 김남중(金南重)
          • 손녀 : 심동귀(沈東龜, 청송 심씨, 심집의 아들)에게 출가
        • 장녀 : 남복시(南復始, 의령 남씨)에게 출가
        • 차녀 : 문성군(文城君) 이건(李健, 전주 이씨)에게 출가
        • 삼녀 : 최상진(崔尙鎭, 삭녕 최씨)에게 출가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각주편집

  1. 선조실록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4월 29일(무오) 2번째기사
  2. 선조실록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5월 3일(임술) 9번째기사
  3. 선조실록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5월 23일(임오) 3번째기사
  4. 선조실록 27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23일(신해) 3번째기사
  5. 선조실록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5월 18일(정축) 4번째기사
  6. 선조실록 58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2월 21일(갑자) 2번째기사
  7. 선조수정실록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8월 1일(무자) 1번째기사
  8. 선조수정실록 27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6월 1일(갑신) 4번째기사
  9. 선조실록 40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7월 14일(병인) 1번째기사
  10. 선조실록 40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7월 15일(정묘) 4번째기사
  11. 《난중일기》정유년 1권
  12. 선조수정실록 31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7월 1일(경인) 3번째기사
  13. 선조수정실록 36권, 35년(1602 임인 / 명 만력(萬曆) 30년) 11월 1일(무오) 3번째기사

출처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