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중광

대한민국의 가수 겸 뮤지컬 배우 (1945–2020)

차중광(車重光, 1945년 2월 9일 ~ 2020년 8월 27일)은 대한민국의 가수뮤지컬 배우이다. 가수 겸 미술가 차중락(車重樂)은 그의 셋째 형이고 록 음악가 겸 영화배우 차승우는 그의 아들이다.

차중광
車重光
기본 정보
출생1945년 2월 9일(1945-02-09)
미 군정 조선 서울
사망2020년 8월 27일(2020-08-27)(75세)
대한민국 서울, 건국대학교병원
성별남성
직업가수, 작사가, 뮤지컬배우
장르록 음악
재즈
팝 발라드
리듬 앤드 블루스
활동 시기1968년 ~ 2020년
학력서울 성동고등학교 졸업. 성균관대학교 야구부 투수 (졸업여부 미상)
가족부모 슬하 8 남 3녀 중 4남
첫째 친형 차중경車重慶
둘째형 車重德
셋째형
차중락(車重樂)
차중용(車重用)
6남 車重成
7남 車重和
8남 車重培
사촌형 차도균(車道均)
이종사촌 형 김수영(金洙暎)
막내아들 차승우(車承宇)
종교개신교

생애 편집

주요 이력 편집

  • 장충초등학교 졸업
  • 성동중고등학교 야구부 투수
  • 성균관대학교 야구부 투수
  • 1969년 가수 첫 데뷔.
  • 1971년 뮤지컬배우 데뷔.
  • 음악 활동 이후 1986년을 전후하여 미술가와 아마추어 골퍼로도 활동.
  • 2020년 8월 27일 사망.


  • 출생년월일 * 1945년 2월 9일생(중구청 호적기록)으로 서울시 중구 신당동 304번지 603호에서 아버지 車駿達(차준달)과 모친 安小順의 4남으로 출생하였다. 모친은 민주공화당 성동지구 여성위원장과 어머니회장직을 오랫동안 활동하시다가 큰형 차중경 둘째형 차중덕씨가 재미사업가로 성공하여 LA로 영주권자인 고로 양친부모님은 末年에 美國서 타계하시었다.출생한 중구 신당동 넓직한 150~200평 가까운 신축양옥집에서 태어났다. 70년전 초가집 판자집도 많던 그 시절에 고가의 대리석으로 외부를 마감한 집이라면 가히 부유층집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었다. 정원앞뜰 연못에 비단금붕어가 놀았던 호화로운 주택에서 태어났다.유소년기에 불렀던 初名(초명)은 明鐘(명종)이라 호칭했고 손위형 차중락은 華鐘(화종)으로 사촌형 차도균은 창종(昌鐘)으로 불리다가 1953년 12월 28일 서울지방법원 행정절차(개명처리)로 明鐘에서 重光으로 셋째형 차중락 사촌형 차도균도 동년동월 같은날짜에 改名됐으며 부친(車駿達)은 해방직전까지 京城市廳 (서울시청)공무과장직으로 건축과 토목관련 공무원이었다 해방직후 면직하고 신흥인쇄소 자본주로 사업을 시작하였다. 동업자 처남은(安長根)사장이고 부친은 자본주로 1963년까지 신당동에서 인쇄소를 운영하다 사업을 확장하여 명동(개성여고)정문 앞에 주식회사 新興印刷所(신흥인쇄소)를 경영하였다.
 
모친-신당동 304번지 자택사진 장녀 차선희 6.25전쟁 1.4후퇴 직전

現서울특별시 中區가 행정구역 편제 전엔 城東區였고 서울시의회 의원선거에 1950년대 후반과 1960대 초반까지 부친(車駿達)은 연거퍼 두 번씩 낙선하는 바람에 상당한 재산이 감소하였던 중에 불행한 일은 겹친다고 선거에 뛰어들어 운동하는 바람에 사업장 관리가 소홀한 틈에 공장장과 문서의 교정(오타수정)작업자의 치명적 활자선정인 문선작업실수로 서울시청, 육군본부,조달청 등 정부기관에 들여놓을 공문서에 한두 글자에 오타가 있었는데, 근 한 달이상 주야로 활판인쇄기로 철야작업까지 강행하여 찍었던 수 십 만장도 넘는 공문서가 휴지조각이 되어 자동적으로 파산하고 말았다.

부친은 처남(妻男)을 먼저 독립(분업)시켜 왕십리 중앙시장입구 건너에 별도 인쇄소를 개업 분업한 직후, 발생된 사건이었다. 가세가 너무 기울어지다 시피하여, 성동갑부란 소리들었던 부유층이 파산하여 중하층으로 전락하였다.당구장 탁구장이 있었던 차중광이 부른 <영원한 나의집> 바로 그집은 외사촌형 김수영이 설계 감독하에 신축한 소규모 빌딩 신당동 294-11번지 지금의 청구역부근 문화동사거리 도로변의 빌딩은 물론 150여평의 자택은 압류당하고 수천리고개(금호동)를 넘어서 금호동로터리 수도국산으로 불렸던 배수펌프장 뒷문쪽 옆에 붙었던 30평 미만의 언덕위에 적은 집을 장만하고 손위형 차중락은 수학하던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중퇴하고 작곡가 손목인의 친족 후랭크 손이라는 유명인과 외신상담 끝에 渡日한다는 계획이 무산됐는데 법무부에서 여권이나 비자발급이 거의 어려운 시대상황하에 밀항을 결심하고 일본진출을 기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었다. 중락형의 손위 사촌형 차도균이 라디오방송국(스타탄생)이란 신인가수선발전에 장려상으로 입상하여 먼저 가요계에 첫발을 들여 놓았다가 바로 그룹사운드 키보이스 활동을 시작하게 됐고 그림이나 그리면서 이화여대메이퀸 출신 **玉珠**란 여성은 兄 차중락이 첫사랑 했던 미모의 애인이었다. 가세가 기울어지자 애인은 미국으로 훌쩍 떠나 가버렸다. 이 사건은 故人된 차중락이 남긴 노래제목대로 영화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이란 영화가 제작되어 상영됐으나 흥행에는 성공하진 못했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20대 초반의 청년 차중락은 가택에서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렀을 정도로 두문불출하고 실연의 아픔을 묵묵히 이겨내던 시간을 보내던 중에 차도균이 차중락을 끌어들여 키보이스란 5인조 그룹사운드 원조보걸이 시작됐고 美 8 군 용산무대의 오디션을 보고 최고 등급의 그룹이 되었다.

그리고 키보이스의 정든배란 노래가 대 히트하자 작곡가 이봉조와 가수 현미가 차중락에게 솔로로 데뷔해 보라는 권고를 했고 차중락은 키보이스를 떠났는데 차중락이 떠난 키보이스 보컬 멤버에 차중광이 일시멤버로 자리를 채우기도 했다. 차중광의 외사촌 동갑 누이인 해방둥이 안광순(安光順)과 매부이자 명지병원 진료부원장 신혁재 박사의 부친 신일상은 박근혜 대통령과 정몽준 회장이 다녔던 장충국민학교를 나왔다.

학력 편집

그의 히트곡 편집

  • 《내 사랑아》
  • 《낙엽 따라 왜 갔나》
  • 《사랑은 줄당기기》
  • 《내 사랑 미 나》

출연작 편집

뮤지컬 편집

  • 1971년 《아가씨와 건달들》 ... 베니 사우드스트릿 역(남자 조연)
  • 영화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영화1편 外 제목미상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하였다.

TV 프로그램 편집

가족 및 친척관계 편집

* 8남 3녀 중 4남으로 출생

  • 첫째형 : 차중경 (1937년 12월 5일~ ) 역도선수 출신, 파독광부 2년간 경력, 미국으로 이민감.
  • 둘째형 : 차중덕 (1940년 3 월 9일~ ) 연세대학교 야구부주장 4번 타자 한양대 야구감독. 미국이민--**최불암(텔런트)과 중앙고동기동창**
  • 셋째형 : 차중락 (1942년 3월 2일 ~ 1968년 11월 10일)
  • 본 인 : 차중광 (1945년 2월 9일 ~ 2020년 8월 27일)
  • 다섯째 : 차중용 (1947년 2월 1일 ~ ) 대한화재보험사 상무이사역임 마케팅회사 대표이사
  • 여섯째 : 차중성 (1950년 1월20일 ~ ) 조선업설계기술사 (인하대학교 대학원 조선과(학사,석사)졸업
  • 일곱째 : 차중화 (1953년 10월14일~ ) 서라벌고등학교 나훈아(최홍기) 후배
  • 여덟째 : 차중배 (1955년12월22일 ~ ) 홍익대학교졸업 - 서울중심부 종로 명동클럽에서 <A to Z>란 락밴드 보컬
  • 사촌형 : 차도균 (1940년 6월17일 ~ ) 1960년대초 라디오방송 <스타탄생>이란 가수선발전에 등단하여 장려상을 받고 가수로 활동을 시작함.
  • 이종사촌형 :김수영 (1921년 11월 27일 ~ 1968년 6월 16일)詩人-김대중정부(금관문화훈장)수혜자

군사정권시절 <풀뿌리> 민주주의란 말을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진보적 참여시인으로 <거대한 뿌리>란 시집 外 유작시집을 남기었는데 부친의 성함 한자에 제적본상 오류가 있었다. 김수영부친(김태욱-金泰郁[원호적])<金泰旭>종로구청-제적본)은 승정원일기를 토대로 구한말 황해도, 충청도, 경기도 별기군 해군사령관[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하였고 高宗皇帝를 모셨던 비서원승(비서관)황제의 비서관일을 하였다. 사돈댁 軍部大臣 안경수는 퇴역한 장군들과 쿠테타(고종폐위운동)를 주동하였다.아무런 연관성 없던 김씨문중은 연좌되어 도봉구 선산땅만 남기고 모든 재산은 적몰되어 국가로 환수조치 삭탈관작, 강화도에 1000석 쌀 생산되던 논까지 국가로 적몰조치되었다. 일생을 야인의 삶을 사셨던 진보주의자..울화통이 터져서 오죽하면 <김일성 만세>란 시귀를 남기었다. 이 빗나간 사상이 바로 서울시장 박원순에게 영향력을 끼쳐서 광화문사거리에서 김일성만세를 외쳐야 진정한 민주주의국가란 괴변을 늘어놓았다. 김대중대통령이 옥중생활중 읽었던 김수영의 책자는 야당의 거두 김대중의 맘을 크게 흔들어 놓았고 DJ가 대통령취임 초기시 금관문화훈장의 문화체육인으로는 가장 높은등급의 훈장수혜자가 됐지만 실제적으로 방랑시인이 적격이신 분이며 술을 즐기시며 후배 최불암 모친이 운영했던 대포집 단골이었다. 이종사촌 둘째동생 차중덕(중앙고등학교)동문이며 절친 친구라서 문인들을 자주 만났던 명동대포집에서 큰 소리로 목청을 높혔던 일도 잦았다. 서울태생임에도 일부러 이북사투리를 사용했고 음성이 상당이 큰편, 탤런트최불암과 고은이란 시인에게 때론 욕설도 하며 핀잔과 꾸지람도 종종 주었다. 김동길박사의 연세대학 선배이자 같은 영문과 출신인데 김수영의 일본유학의 학자금은 삼촌(안장근)이 8.15 해방 후, 서울 충무로 회현동 동회장의 천거로 손쉽게 취득된 회현동 2층집 적산가옥을 팔아 유학자금의 근원으로 사용했던 것이였다.

 
1987년 미국서 일시귀국한 모친 안소순여사와 와가댁누이들 외삼촌 매부 신일상

한국전쟁(6.25사변) 당시 김수영 밑에 두 친동생 김수경, 김수강등 인민군에 징집돼 전쟁터로 끌려가서 행방불명됐고 생사가 불명한 상태로 아직도 사망신고가 안된 상태로 남았다.시인 김수영도 함께 징집되었다가 거제도포로수용소 생활도 하였다. 방랑시인 김삿갓 동무! 무슨죄가 있는가? 로열패밀리 삼도수군통제사 通政大夫 대장군의 장남의 신분이 하루아침에 역적이된 슬픈내력이 존재하였고 그의 시에 간락히 선대의 일을 짧게 서술만 되었다. 빙랑시인 김병언(김삿갓)처럼 恨 많은 일생을 살았다. 친족 남양홍씨 님양군(석벽공후3파)효정황후는 19세 어린 나이에 헌종임금의 後妻가 됐다가 조대비의 이어서 대비 왕가의 큰 어른이지만 과부격 독처 창덕궁에서 별세하시였다. 車重光의 모친은 황제의 外家 친척인 손녀 신분으로 탄생한 것이다. 현존하는 안경수장군에 관한 역사적 논문과 책자들에 나타난 서술 <신분에 관한 기록>들은 오류정보는 괁직경력0외엔 개인적서신분기록은힌다. 은 석,박사 논문으로 인정해 줄 수가 없다. 안씨문중은 이씨조선 위대한 세종대왕의 부마(사위)안맹담을 배출한 역대 명문의 王家의 친적이었다. 고려의 마지막 왕비도 바로 안씨인 것이다. 朝鮮王朝시조 이성계에게 옥쇄를 넘겨준 사람이 공민왕비 안씨이며, 王家 친족인 것이다. 죽장에 삿갓만 안썼던 이종사촌형 김수영은 삼도수군통제사 사령관 고관대작의 후손이고 차중광의 외가,증조부님 역시 漢城右尹에 강화삼별초사령관, 궁궐수비대장 출신인 安瑞 숙군군이며 손녀가 바로 차중광님의 모친이었다. 구한말 큰 巨富였던 軍部大臣 안경수(安駉壽)將軍<독립협회초대회장>의 친족이자 남양홍씨댁 효정황후의 친척인 (로열패밀리)외척이었던 것이었다. 부연하여 8.15 해방직후 한반도엔 자유민주주의 사상보다 소위 좌익이라 칭했던 좌파(진보주의)성향의 정당들이 유행했던 시절이었다. 종묘사직인 묘동 171번지(종묘)앞이 본래의 출생지였고 선대가 이

家의 재산을 관리하고 돌보고 해군사령관으로 때론 비서실장으로 황제를 지척에 모시고 종묘사직을 지키고 살았던 중앙정부에서 멀어진 김수영 일가는 역적아닌 역적되어 삶의 기초적 근원이 소멸되자 몇명의 金氏內 친족들은 차중광의 부친이 운영하던 신당동 294의 11호 구옥 한옥집 문전에서 우동, 만두집을 운영하던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외삼촌에 사촌, 6촌 형제들이 (ㄷ)자 형태의 舊 한옥집에서 삥 둘러가며 모두 살았는데 차중광의 부친은 부자이자 능력자였고 온 친족 집안의 족장같은 중심적 위치였고 장모님되신 남양홍씨 洪聖禮 (기미상궁출신) 어른은 정신적 족장인 셈이고 친족들 살림살이를 책임지고 일자리를 만들어 끌어와서 먹이고 살린 사람이 바로 차중광의 부친 車駿達(차준달)인 것이다. 신흥인쇄소 정문앞 좌측 영업장소엔 우동 만두집이 있었고 김수영과 큰 이모 安亨順(안형순)님 장사하던 가게이고 중앙 대문을 들어서면 신흥인쇄소공장이 있었고 우편 사랑채엔 가수 차도균의 누이, 남편 洪淳基도 함께 지지고 볶고 복잡하게 살았다. 한국전쟁당시 피난도 함께했고 살아남기 위해서 함께 경기도 수원 조암리로 또 부산진으로 함께 피난생활을 하였다. 차씨 문중은 다행히 정부기관인 육군본부에서 내준 군용트럭에 인쇄소 기계장비들 모조리 실어 부산으로 옮겨지기도 하였다. 해방전후엔 자진월북 또는 북조선 김일성의 권고, 선전에 의해 월북한 인사들이 많었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조선프로레타리아연맹 간부 安莫(안막)의 妻, 최승희 <동양의 舞姬>란 유명한 예술인은 숙명여고출신이며 최승희는 강원도 출생이나 남편 안막과 함께 시집인 죽산군(경기안성) 남양홍씨와 안씨문중의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던 경기도 안성에서 살다가 월북한 것이다.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정치적 동지인 安國善은 日本 게의오의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최초의 정치학자로 귀국했다가 친족 안경수장군의 조카란 이유로 탄압받아 이승만과 함께 종로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전남 진도로 유배되었다. 안국선의 養父 안경수장군은 을미망명객으로 일본으로 일시적 망명갔다 조기귀국한 사유는 바로 朝鮮[대한제국]에 설립한 부하철도회사, 대조선은행, 대조선저마회사(방적공장)등 해운운송업 사업체정리와 구금된 안씨문중의 사람들의 보석문제, 구출이 목적이었다.

 
초대 독립협회장 안경수(의민공)징군 45세 사진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곤스케(林權助)의 중재로 자수하면 생명에 危害는 주지 않는다는 정부측과 약속이 어그러지어 1900년 양력 5월28일 새벽 고문에 의한 빈사상태에서 교수형 당한 毅憫公(의민공)독립협회장 軍部大臣 안경수장군의 조카이자 死後 손이 끊긴 안경수의 養子가 安國善이고,조선총독부 경북,청도군수 2년 일한 기록된 근거로 친일인명사전에 기록을 남김. 안국선의 養子가 안장근- 차중광님의 외삼촌이다.본래 안씨문중의 본관은 죽산안씨인데 역적집안으로 간주된 형편상 시인 김수영家系와 안씨문중은 목숨을 부지하는 불가피한 상황하에 신분을 숨기는 삶을 살아야만 했었다.호적부(제적본)상 祖父, 曾祖父 시대의 기록상 本官이 변경되었다. 김수영시인의 본관은 본래 경주김씨에서 김해김씨로 됐고 안씨문중은 죽산안씨에서 순흥안씨로 바뀐 큰 이유가 가계의 큰 슬픔이고 秘史가 되었다.홍두표회장의 큰 할머님이 車重光의 外祖母(외할머니)洪聖禮씨 고종황제를 모셨던 기미상궁출신이며 아버지 洪在應은 전남 나주목사직을 역임하였다가 노년에 왕십리 감리교회장로 남은 재산을 교회로 헌납하고 생을 마감하시었다. 차씨문중도 그렇지만 대단하신 정력적 활동가들 이었습니다. 옛 어른들은 자식들 정말 생기는 대로 많이들 낳으셨습니다. 남양홍씨 잘 나가는 TV조선 홍두표 회장의 집안 역시 10 남매(형제)가 되니 친형제 삼촌들 고모,이모님들 책자를 봐야 제대로 인지될 정도로 많습니다.

가수 차도균의 누이가 낳은 아들이 두 명인데 洪承杓(승표)란 1945년생 중광님과 동갑 나이의 6촌이 있고 洪元杓 <원표> 1950년생 성남시 개인택시기사로 일하는 차도균의 조카이자 차중락 차중광님의 사촌누이에 당숙모도 동시에 되는 사람이 낳은 아들이 2 명 있으니까 호칭상 웃기는 현상이 발생되기도 했습니다. 1950년생 홍원표란 성남시에 거주하는 친척은 7남인 자충화에겐 아버지족보로 따지면 홍원표가 6촌형인데 모친의 남동생 차도균에게 삼촌이라고 불렀던 습관대로 일곱번째 아들인 중화군에게 삼촌이라고 칭해서 정말 웃겼답니다. 아버지(홍씨)댁 족보로 따지면 6촌형도 되는 동시에 차도균씨가 외삼촌이니 차중화의 조카뻘도 되는 셈이니 진짜로 요즘시대로 봉숭아학당격 읏겼습니다. 신당동 294-11호 번지에서 유년시절 다들 함께 살았습니다. 겹사돈을 맺고 양가에서 서로 시집가고 장가 들고 하다보니 자연적 생겨난 현상이었습니다.

파일:안진환,중광,중용형 큰누이,큰누이 고모님,은재-재정이


차중광님이 부른 노래 <영원한 나의 집>이란 노랫말엔 "여기에다 당신의 사랑을 두고 가리라!" 이 노래말은 바로 차중락형의 맘을 대변하는 동생 차중광님의 노랫말입니다. 차중락형의 첫사랑 애인은 바로 성은 모르지만 이름은 옥주란 미모의 여성이었고 2층에서 부모님과 함께 전세살이를 했습니다. 차중락형과 오고 가다가 한 집에서 자즌 접촉으로 愛人 사이로 발전한 것입니다. 부친의 사업실패와 서울시의원선거 2번 낙선에 큰 돈을 선거비용으로 날렸고 사업체 마저 파산했습니다. 이종사촌형 김수영이 감독하에 지어진 아주 견고하고 튼튼히 잘 건축된 집을 남겨두고 사랑을 잃어버리고 떠나는 상황하에 (영원한 나의집)이런 가사말이 나온것 입니다. 지은지 60년 되어가는 이 건물은 外裝만 보수된 채 형태는 여전히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외사촌동생 筆者도 태어난 집 호적상 본적지가 같습니다. 나에게도 <영원한 나의 집> 옛날이 그립습니다. 지금의 금호동고개를 흔히들 옛날에는 무쇠막고개 또는 수천리고개라 불렀습니다. 지금은 이 고개 높이를 20 여미터 깍아서 낮추고 지금의 5호선 금호전철역이 들어선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기록으로 남기는가 하면 차중광님은 1973년 외삼촌이 가파른 금호동 고개를 넘어 걸어가고 있는데 옆을 지나치던 차가 크락숀을 울리면서 서더랍니다. 차에서 내린 차중광님이 외삼촌! 차창넘어 부르면서 그 당시 비교적 큰 돈인 수표 한 장을 삼촌의 윗주머니에 찔러 넣어주면서 빙그레 웃으면서 저 바빠서 그냥 갑니다. 이런식으로 차중락 차중광님은 부모님과 윗 어른들께 정말 효자들 이였다.

  • 여 동 생  : 차선희 재미교포
  • 둘째여동생 : 차순영 유튜브 동영상에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히트곡을 오빠를 추억하며 부르고 있다.
  • 셋째여동생 : 차선미
  • 외조카 : 신혁재 박사- 고양시 명지병원 진료부원장 유방,갑상선쎈터장 교수(安光順의 장남)
  • 외사촌弟 : 안혁준 兒名-대장 (安賑煥) 改名 : 안혁준 (대한예수교장로회 목사)
  • 외사촌누이 : 안광순 동갑 장충초등학교 동기동창
  • 외사촌매부 : 申一相 장충초등학교 동기동창 한양대학교 기계공학과 졸업. 외국회사-테니쉬턴키 컴패니 식품공업자동화기계 설계감독
  • 외가 5촌 숙부 : 洪淳文 (株)동부고속 화물영업본부 전무이사,법정대표이사 역임(강남구 논현동 거주)
  • 외가 4촌 조부 : 安國善 조선총독부 경북청도군수,탁지부고등판무관 (1926년 한성감옥 고문휴유증으로 조기사망)외삼촌 安長根의 養父
  • 외가 5촌 숙부 : 洪淳七 대한제국기 광무원년 1897년,관보(南部令)황제비서관 李王職財産管理人, 해방후, 동양맥주(크라운)대표이사로 1970년대 중반까지 역임.TV조선회장 홍두표 부친
  • 외가 6촌 형님 : 홍두표 洪斗杓 前 KBS 사장, 現在 TV조선회장 차중광과 홍두표회장은 6촌지간
  • 외가 숙모 : 최승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예술인 세계적 무용가(舞姬)-숙명여고 출신.일본유학 --안씨문중 종가집 테너가수 안성현은 종가집종손으로 북한엔 해방 전부터 이미 살알던 거주지가 있었고 6.25때 월북한 안막과 최승희 부부는 안성현과 동시기에 일본에 유학하였다. 종가집 후손인 안성현의 족보가 있어야 정확한 촌수를 알 수 있으나 차중락과 차중광의 외가집 숙모가 최승희란 것은 사실임.

* 외가 6촌 형님 : 안성현 테너가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성악가,작곡가,지휘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부용산"의 작곡가이자 공연연출가 지휘자로 혈족을 모른채 남북으로 헤여져 살았다. 차중광님 外曾祖父(외할아버지)전남 나주목사였던 洪在應 官職재임시 호남 나주에서 안국선의 宗孫子로 출생함.성악(테너가수)전공자 전남지방에서 잠시 교편을 잡다가 8.15 해방전 북한에서 거주하였다가 6.25사변당시 최승희 안막부부와 김수영의 두 동생 김수강 김수경등 나이가 엇비슷한 친척들이 함께 월북하였다. 북한의 작곡가,성악가.지휘자로 2002년까지 활동하였다. 2006년에 사망한 안성현은 바로 대한민국 정치학도 제1호인 안국선 종가댁 孫子이며 죽산안씨 현감공파 31대손 高祖父 安光默은 김홍집이 通政大夫로 일본수신사로 출장 나갈적에 書章官(비서진)을 역임,安光默(청풍부사)은 文官出身 정4품의 벼슬아치로 妾이난 막내아들 안경수장군은 서자출신이라 안선달이란 이름자를 청년기 사용하였다. 명성황후의 신임과 효정황후 친척의 천거로 군부대신에 이르렀는데 고종13년 武科에 급제하고 仁川地方 별기군 장위영 영관을 거쳐 전환국방판, 京畿左營(인천)의 해군사령관이 되었다, 지금의 재정경제부(탁지부협판),警務使(경찰청장),漢城判尹(서울시장)민비의 총애를 받아 軍部大臣으로 출세하였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하자 官職에서 면직당하고 독랍협회활동만 주력하고 국내사업에 투신 대조선은행을 설립했고 은행장에 대조선저마제사(방직회사)를 설립했고 부하철도 회사를 설립하여 경인 경부선을 외국자본과 합작하여 철도를 가설하려는 추진과정에 일본과 大韓帝國 사이 利權에 관련되어 高宗皇帝의 미움을 받아 역적으로 체포령이 떨어지자 仁川을 통해서 일본망명 일년 후, 歸國하여 황제폐위<애국청년회샤건> 주동자로 警務使출신 권형진과 함께 단심재판으로 광화문 삼엄한 경비속에 비밀리에 교수형을 받았다. 1907년 안경수 後妻 李榮子의 정식재판청구로 無罪 판결로 신원이 회복되어 毅憫公(의민공)이란 시호를 하사 받았다.(주한일본공사관,국사편찬위원회)그러나 연좌형집행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金洙暎家와 차중광母親 本家인 安瑞鉉將軍에 관한 국가차원의 적절한 보상이나 선처 없이 대한제국은 일본과 합병되었는데 갑오개혁기 폐지된 연좌형 피해를 입힌 대한제국은 官報와 모든 행정적 기록은 증거인멸,은폐하였다 오직 高宗皇帝의 일기장(일성록)에 딱 한 줄의 기록과 누구도 함부로 손댈 수없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조선왕조실록> 별단 <증건도감의궤> 賞典(훈장격)기록 3회 강화,삼별초,해군사령관으로 임명했다는 일성록 기록과 경복궁 덕수궁 재건축(보수)공사에 감독관 嘉善大夫 中軍(종2품)의 장군이란 기록 또 또 임오군란 당시 全軍의 *가을추수감독관*으로 안서현장군을 급히 파견 내려 보내 달라는 청원문서가 남았다. 中軍,嘉善大夫 안서현장군 外家宅은 풍지박산 滅門之禍(멸문지화)부활된 연좌제로 개화파 정치적 탄압으로 몰락하였다. 멸족한 안씨문중의 종가집의 손주는 함경도로 추방됐고 안성현은 宗家 종손이며 8.15해방 전부터 함경도에 거주터전이 있었다. 안씨문중 가운데 叔父(숙부)長男家역시 후손이 죽어 손이 끊긴 상황에 둘째 손주가 간신히 살아남아 서울에 기거하며 명륜동에서부터 이리저리 옮겨가면서 목숨을 부지하며 살았다. 正憲大夫-안경수,嘉善大夫-안서현 대장군의 孫女 안소순여사가 낳은 차중락과 차중광님은 외택을 많이하여 모친쪽 유전자를 물려 받았고 미남형의 인물인 한말 大韓帝國 거물정치인 軍部大臣 안경수장군을 흡사하게 닮은 늠름한 모습인 차중락, 차중광님의 생전의 건장한 모습이었다.

차씨문중에서 외사촌 큰형인 安奎煥이 평상시 술을즐겨 마셨기에 코 끝이 빨개서 <딸기코>란 별명이 붙었고 성악가 안성현의 모습을 닮은 작은집 동생은 거의 빼다박은 모습이다. 안성현-테너가수 故人은 북한 양강도 국립교향악단 지휘자로 2006년 생을 마감하였다. 안성현이 전라도에서 교편을 잡았던 그 시절을 추억하는 제자들은 노인들 되어서 안성현선생은 피아노 잘치고 노래 잘하던 인품이 자상한 미남선생으로 기억하고 있다. 전남 나주시에선 안성현음악제는 물론 안성현탄생 100주년 기념식을 열었고 출생가를 문화재로 지정하고 단장할 계획을 추진중에 있다. (안성현의 20대 사진과 작은집 동생 15년 어린 작은집 동생 1935년생 안규환의 21세 사진을 이곳에 올릴 방법을 간구중이다. 안성현과 판박이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만 7년간 역사추적결과 詩人 김수영의 선대가 김홍집총리대신의 후손인지 밝히려고 舊,現代文學 代表 김수영의 여동생 金洙鳴(김수명)누이를 만나서 잘못된 祖父의 이름과 본관에 관한 국사편찬위원회 별관에 보관중이 대한민국 최초의 원적부(호적)의 기재사항을 알려주고 본관정정에 관한 논의차 김수명 누님을 만나려 수 차례 시도했으나 누님은 외면하였다. 집안의 선대가 광화문에서 고종황제의 척살명령을 받들어 군중들에게 물매맞아 客死(객사)한 總理大臣 金弘集(김홍집)의 후손이 아닌가? 집요한 추적을 하였고 秘史를 밝히려고 필자의 장장 7년간의 역사추적, 비극으로 끝난 김씨가문의 秘史를 밝히기 싫어 거부하였다. 안광묵의 曾孫子 安長根氏가 차중광 외삼촌이니 안성현은 친척 형님이 진실인 것이다. 최승희 남편 안막(安弼承)은 숙부(아저씨)인 것이다. 상호지간에 얼굴도 모르고 친척이 남남으로 남북으로 흩어져 갈라져 살아온 悲劇的 외가 家族史이다. 인터넷 조회가 가능한 ***舞姬(무용가)최승희가 출신교 숙명여고 방문시 기념촬영사진 맨 앞줄 최승희 좌측에 앉으신 안경쓴 노인이 바로 安光默(청풍부사)-일제강점기 안씨문중 큰 어른이 며느리와 함께 찍힌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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