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의 기증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라틴어, Constitutum Donatio Constantini 또는 Constitutum domini Constantini imperatoris) 은 750년에서 850년 사이에 조작된 로마 황제의 칙령문서로 중세 유럽의 유명한 사기 문서로 간주된다. 8세기 경에 작성된 이 조작된 칙령문서는 13세기 부터 시작하여 중세기간 동안 세속의 황제에 대한 기독교교황의 우위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교황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었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인문학자인 로렌초 발라는 이 문서가 문헌학적(philological)으로 역사적 배경을 가진 특수한 용어들을 역사적 문법적인 방법으로 분석한 결과 8세기 경에 조작된 것임을 밝혀냈다.[1]

실베스터 1세가 콘스탄티누스에게 위증문서를 기증하고 있는 것을 묘사한 프레스코화, 13세기경 프레스코

기원과 내용편집

이 문서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면서 로마 도시와 서방 제국교황 실베스테르 1세[2]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넘기고 자신은 동방 제국의 황제권을 보유한다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을 문둥병 치료를 구하고[3] 회심하고 세례를 받아(a cure for his leprosy, was converted and baptized) 기독교인 된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4]

따라서 교황은 황제보다 더 우위에 있으며 신성한 권력의 대표자로 교황이 세속의 황제를 결정하고 심지어 교체할 수도 있다고 해석된다. 이 문서가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은 8세기 중엽으로 교황 스테파노 2세프랑크 왕국의 궁재 피핀 단신왕의 협상과정에서 나왔다.[5] 당시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피핀을 만나 메로빙거 왕조를 대신해 피핀의 카롤링거 왕조를 새로운 왕조로 세웠고 그 대가로 피핀은 롬바르드족이 점령한 이탈리아 영토를 되찾아 교황에게 주었다. 그 영토는 이후 약 11세기 동안 지속된 교황령의 기초가 되었다.

교황권의 우위편집

중세 동안 내내 이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라는 문서의 존재는 거의 의심없이 세속의 양쪽 (서방 황제동방 황제) 황제에 대한 교황의 우위권에 대한 근거 문서로 사용되었고 역대 교황들은 물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등 성직자들이 자신들과 교회의 이익을 위해 황제권과 충돌할 때마다 이 문서를 내세웠다. 심지어 로마 교황의 적들까지도 이 문서의 진위를 의심하지 않았는데 황제의 권리를 지지하는 단테도 그의 《신곡》에서 다음과 같이 개탄하였다.

아! 콘스탄티누스여, 진정으로 큰 악은 그대의 개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가장 부유한 사제가 그대에게서 받은 그 선물에게서 나왔도다! 단테,《신곡〈지옥편}》xix. 115~117쪽

교황 하드리아노 4세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장한 바대로 황제의 제관 소유자는 교황이며 단지 황제에게 사용토록 위임한 것에 불과할 뿐이며, 교황은 이미 콘스탄티누스 대제로부터 서방세계 전체를 기증받았고 따라서 제국은 교황이 황제에게 수여한 봉토라는 이론을 세우고자 하였던 것이다.

조작문서의 폭로편집

그러나 르네상스가 시작되고 고전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면서 차츰 이 문서의 진위에 대한 의문이 늘어났다. 1440년 이탈리아인문주의자 로렌초 발라는 이 문서에 표기된 조잡한 라틴어가 4세기경 즉,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절의 로마 황제들이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해 내었다.[6] 발라는 〈증서 Declamatio〉(1440,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에 대한 로렌초 발라의 논문〉으로 1922년 영역)에서 그는 익명의 저자가 쓴 '증서'에 나타난 조잡한 라틴어 문체를 밝혀내고,또한 인용된 문서와 문서 자체의 연도가 불일치 한다는 점도 밝혀내었다. 이에 대하여 교황청은 발라의 논증을 부정하고 발라의 책을 16세기 중반까지 금서목록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이미 이 문서의 권위는 의심받게 되었고 결국 교회도 위조된 문서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교황의 노여움을 산 로렌초 발라는 종교재판소의 심문을 받았으나 곧 복권되었다. 1448년 친인문주의 성향의 니콜라오 5세는 그를 수사학 교수이자 교황청 비소로 임명했다.[1]

평가편집

중세 시대의 교회는 교황령 형성에 큰 공헌을 한 이 기증 행위를 공식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황제들이 대관식 전에 이 문서를 인준하게 했다. 또한 이 문건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자는 이단으로 간주했다. 사료 위조는 오늘날에는 매우 불순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중세의 자료 위조는 경우에 따라서 다른 평가를 받았다. 이는 혼돈스러운 세계를 신이 원하는 올바른 질서 속으로 이끌고 가려는 의도를 보여준다고 보았던 것이다.[7]

프리츠 케른과 같은 현대의 역사가는 중세 몇몇 위조자들의 사고를 이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문서가 진본이든 혹은 위본이든, 그것은 신이 정해 놓은 질서라고 생각되는 그림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것이다.[7]

중세역사 전문가인 호르스트 푸어만은 중세가 근대와 달리 법과 진실을 이해했다고 점을 환기시켰다. 중세 사람들에게는 어떤 사안에 대한 사실이나 정당함을 결정하는 것은 형식적 기준이 아니라 신이었다. 인간의 이성보다 신이 더 위대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콘스탄티누스 기증장'이 표명한 교회의 지배권은 신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기에 이성에 의해 절대 문제가될 수 없었다.[8] 따라서 중세에는 위조범이 재판을 받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각주편집

  1.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교황들> 동화출판사 2009.6.5 p48
  2. 호르스트 푸어만 <교황의 역사> 도서출판 길 2013.9.25 p43
  3. 류형기 <기독교회사> 한국기독교문화원 1990.4.20 p200
  4. [네이버 지식백과] 콘스탄티누스의 기부장 [Donatio Constantini]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5. J모랄,W몰란 <중세 유럽의 정치사상> 혜안 2016.1.25 p236
  6. 호르스트 푸어만 <교황의 역사> 도서출판 길 2013.9.25 p325
  7. 호르스트 푸어만 <교황의 역사> 도서출판 길 2013.9.25 p45
  8.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교황들> 동화출판사 2009.6.5 p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