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김 (성씨)

마지막 의견: 4년 전 (InternetArchiveBot님) - 주제: 외부 링크 수정됨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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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부족 편집

전체적으로 많이 부족합니다.

신라 김씨에는 경순왕 계열만 있는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저의 본관인 광산 김씨는 경순왕 이전의 신무왕(김우징)의 아들 김흥광을 시조로 하고, 인구가 83만이나 되어 신라 김씨중 경주김씨 다음으로 큰데도 누락되었습니다. —이 의견을 쓴 사용자는 Zaqqazzzz(토론 | 기여)이나, 서명을 하지 않아 나중에 추가하였습니다.

관련 분야에 지식이 있으시다면 직접 편집해주시는 것은 어떤가요? --S7 Ta.】【Con. 2010년 11월 28일 (일) 21:02 (KST)답변


한국의 김(金)씨는 흉노족의 후손인가? 편집

2008년 11월 22일과 29일 두 차례에 걸쳐 KBS는 ‘역사추적’ 방송을 통해 한국의 김(金)씨가 흉노족의 후손이라는 내용을 방송했다. 김씨라면 한국의 성씨 중 21%를 차지하고 있는 1위의 성씨인데, 흉노족의 후손이라는 주장이다. 게다가 어머니, 할머니 등 모계가 김씨인 경우까지 포함하면 한국인 중에서 흉노족의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KBS의 방송 내용은 사실일까? 편집

김씨의 뿌리가 흉노족이라는 주장은 신라 문무대왕릉비에 적힌 비문에 나와 있다. “秺侯祭天之胤傳七葉”(투후제천지윤전칠엽), 즉 ‘투후’의 후손이 7대를 전하여 신라 김씨의 시조인 성한왕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투후 김일제는 기원전 134년 흉노의 번왕인 휴도왕의 아들로 태어나 14살 때 전쟁포로로 한나라에 끌려와 노예로 일하다가 한 무제의 신임을 받아 말년에 투후라는 제후가 된 사람이다. 흉노족 김일제의 7대 후손이 신(新)나라의 외척이 되었는데 나라가 망하자 신라로 건너와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김씨의 뿌리가 흉노족이라는 주장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도 있다. 찬란한 신라의 금관은 흉노족의 금관과 유사하고, 신라 ‘기마인물형토기’에 있는 ‘동복’이라는 청동솥은 흉노족의 것과 동일하다. 게다가 ‘적석목곽분’이라는 무덤 양식도 비슷하고, 머리뼈를 눌러 뾰족하게 세우는 ‘편두’라는 독특한 풍습도 동일하다.

흉노족은 누구인가? 편집

지금은 사라진 북방 민족이지만, 기원전 5세기부터 약 1천년간 세계를 호령하던 민족이었다. 특히 전성기였던 ‘묵돌선우’ 때에는 한나라 고조 유방을 크게 무찌르고 매년 공물을 상납 받고 형의 나라로 섬기게 했다. 또한 동호를 무찌르고 월지국을 점령하여 동서에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심지어 로마제국의 몰락을 가져온 훈족의 ‘아틸라’도 흉노족이라는 주장이 있다. 흉노족은 서기 5세기경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그 후손인 몽골족은 ‘칭기즈칸’ 때 대제국을 건설하여 흉노의 영광을 재현했다는 해석도 있다.

김씨는 흉노족의 후손인가? 편집

현재 역사학계의 정설은 한국의 김씨가 흉노족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학계는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의 김씨 왕조가 가계를 미화하기 위해 시조를 중국에서 찾은 것으로 보고 있다. 문무대왕릉비나 대당고김씨부인묘명 등에 따르면 흉노족 김일제는 중간 시조일 뿐이고 최초의 시조는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로 되어 있다. 소호금천씨는 중국 신화에서 한족의 시조로 추앙받는 황제헌원씨의 아들이다. 김씨의 시조가 흉노족에서 갑자기 ‘한족’의 아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완전 뒤죽박죽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학계는 김씨의 흉노족 후손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KBS 방송에서 제시한 고고학적 유물 등으로 볼 때 당시 신라와 흉노족 사이에 문화적 교류가 활발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아사달 (토론) 2012년 2월 20일 (월) 03:48 (KST)답변

비판 편집

1. 고고학적으로도 흉노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적석목곽분은 경상도 일대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그 발전 단계도 속속 나타나고있습니다. 그리고 설사 외부의 영향을 받았다고 치더라도 그것이 흉노가 될 수는 없습니다. 흉노는 적어도 3세기 이후로 거의 소멸되었고 신라의 적석목곽분계 유물들은 4세기 이후에나 나타나므로 둘 사이의 연결고리는 매우 약합니다.

2. 금관 역시 흉노의 금관을 신라와 비교하는 예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 흉노의 금관이 발굴된 것을 보면 그냥 투박한 투구 형태라 아무리 눈이 삔 사람이라도 신라 금관과 비슷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신라와 비슷한 금관은 중앙아시아 지역의 박트리아와 사르마트 유적에서 출토된 금관입니다. 이들은 흉노와 동시대에 존재한 국가-종족입니다.

3. 극단적으로 말해 해당 KBS의 방송 역시 일부 사실을 침소봉대해서 뻥튀기한 음모론에 해당합니다. 신라의 무덤이나 유물은 북방 민족과의 문화적 유사성을 지적할 뿐, 그것을 흉노로 특정짓는 학자는 없습니다. 적어도 역사학과 고고학을 전공한 학자라면 말이죠. 해당 주장을 하는 사람들 역시 대부분은 학자가 아닌 그저 재야사학자이거나 음모론자일 뿐입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2월 20일 (월) 09:24 (KST)답변

답변 편집

좋은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비판을 수용하여 다음과 같이 고쳐보았습니다. 고친 부분을 굵은 글씨로 표시했습니다. 잡지에 실릴 흥미 위주의 글이라는 점은 좀 감안해 주시구요... (^_^)

김씨의 뿌리가 흉노족이라는 주장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도 제시한다. 찬란한 신라의 금관은 중앙아시아의 금관과 유사하고, 신라 ‘기마인물형토기’에 있는 ‘동복’이라는 청동솥은 흉노족의 것과 동일하다. 게다가 ‘적석목곽분’이라는 무덤 양식도 비슷하고, 머리뼈를 눌러 뾰족하게 세우는 ‘편두’라는 독특한 풍습도 동일하다는 것이다.

김씨는 흉노족의 후손인가?

현재 역사학계의 정설은 한국의 김씨가 흉노족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학계는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의 김씨 왕조가 가계를 미화하기 위해 시조를 중국에서 찾은 것으로 보고 있다. 문무대왕릉비나 대당고김씨부인묘명 등에 따르면 흉노족 김일제는 중간 시조일 뿐이고 최초의 시조는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로 되어 있다. 소호금천씨는 중국 신화에서 한족의 시조로 추앙받는 황제헌원씨의 아들이다. 김씨의 시조가 흉노족에서 갑자기 ‘한족’의 아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완전 뒤죽박죽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학계는 김씨의 흉노족 후손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KBS 방송에서 제시한 고고학적 유물도 신라와 북방 민족 사이에 문화적 유사성이 있다는 증거는 될 수 있어도 그것을 흉노족으로 특정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아사달 (토론) 2012년 2월 20일 (월) 10:28 (KST)답변

덧붙이자면, 김일제 선조설흉노족 문화는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도 추가할 수 있겠지요. 김일제는 아사달 님께서 직접 문서를 편집해서 잘 아시겠지만 10대의 어린 나이에 한나라로 끌려와 궁궐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 과연 흉노의 문화가 어떻게, 얼마나 이어지고 남아있었을까요? 게다가 그의 후손이 100년이 넘도록 중국 땅에서 중국인으로 살았는데, 그들에게 어떤 흉노 문화가 남아 있었을까요? 투현에서 흉노족이 모여 살았다는 식의 말도 들어보았습니다만, 그것을 증명하는 근거는 없고, 한나라 시대의 제후라는 것은 수조권만 받은 채 실제 정치는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관리가 하는 체제입니다. 게다가 김일제의 후손들은 왕망의 외척이 되었을만큼 중앙 정계에 밀착된 일족이니 그들이 투현에 내려가서 살았을리가 없죠. 한마디로 김일제와 그 후손들은 그냥 흉노 출신 중국인일 뿐, 흉노의 문화 따위는 가지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김일제를 진짜 선조라고 주장하려면서 흉노와의 문화적 유사성을 근거로 드는 것은 완벽한 논리적 오류입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2월 20일 (월) 17:15 (KST)답변
그런 점이 있군요. 이번에도 날카로운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Xakyntos 님, 제가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를 몇 편 써야 하는데요. "한자는 동이족이 만들었나?" 이런 제목으로 하나 써 보려고 합니다. 또 하나는 "삼족오는 고구려의 상징인가?" 이것도 한 번 써 보려고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둘 다 "아니다"인데요. 좀 흥미진진하게 써야 해서, 이것저것 자료 좀 수집하고 있습니다. 당장은 아니지만, 나중에 초안이 나오면 미리 검토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의견 많이 부탁 드립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2월 21일 (화) 01:16 (KST)답변
한자, 정확히는 갑골문자가 지역적으로 차이가 많이 납니다. 즉, 한자에서 같은 대상을 지칭하지만, 소리도 모양도 다른 글자가 존재합니다. 소 우(牛)와 소 축(畜)은 전체적으로 다르지요. 이는 한자뿐만 아니라 갑골문자에서도 나타나며, 출토 지역의 차이도 보여줍니다. 즉, 여러 지역에서 생성된 문자가 진시황의 문자개혁으로 "진문"으로 통합되었다가, 한나라가 들어서면서 "한문"(한자)로 바뀌어 굳어진 것입니다. 즉, 지역적으로 일부 한자는 동이족이 만들었을 수 있으나, 한자 전체를 동이족이 만들었을 리는 절대 없습니다. (황하-장강 유역 전체가 동이족 문화권이 아니므로, 절대 불가능합니다.) --211.253.124.74 (토론) 2016년 1월 16일 (토) 11:09 (KST)답변

외부 링크 수정됨 (2019년 10월)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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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InternetArchiveBot (버그를 제보하기) 2019년 10월 30일 (수) 01:59 (KST)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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