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단군조선

마지막 의견: 4년 전 (Tol6560님) - 주제: 근거 없는 편집을 삭제하였습니다.

전조선, 후조선은 조선시대 때에 생긴 것입니다. 편집

김종서, 정인지가 고려 때 사람입니까 ... jtm71 2006년 12월 31일 (월) 17:43 (KST)답변

제왕운기에도 나오는데요

그건 당시의 일반적인 명칭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승휴의 시기에서부터 조선 세종 때에 이르기까지 전조선, 후조선을 언급한 다른 사서가 있습니까 ... jtm71 2007년 1월 2일 (화) 00:20 (KST)답변

추측인 듯한 내용 ... 편집

조선의 이름 때문에 단군조선을 연구했다는 설명은 근거가 있는 것인가요 ... jtm71 2007년 1월 2일 (화) 00:18 (KST)답변

그런것 같지는 않는데요. 근거 없는것 같습니다.--Breathejustice 2007년 1월 3일 (목) 19:17 (KST)답변

출처 없는 내용 삭제 편집

“일부 주장에서는 지금의 북경 근처인 낙양으로도 추측한다.{{출처}}”

출처가 없으며 사실 관계도 불분명하므로 삭제하고 토론 란으로 옮겼습니다.

근거 없는 편집을 삭제하였습니다. 편집

사용자:Mewto121.147.106.137 사용자가 4월 초부터 지속적으로 같은 편집을 반복 수행하고 있습니다. 해당 내용은 근거도 전무하며, 대부분 명백하게 잘못된 내용이므로 제가 계속해서 삭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편집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에 삭제 사유와 내용의 오류를 이곳에서 밝혀 놓습니다.

  • 단군조선(고조선)의 유물로 추정되는 미송리형 토기비파형 동검을 통해 추측되는 강역은 만주 및 한반도이다. 그러나 단군조선의 유물이 두 유물인 것은 확실시되고 있으며, 주요 발견지역은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남부, 한반도 전역이다. 하지만 고대에 있던 나라라서 이고 문헌기록도 일제감정기에 사라져서 알 수 있는 길이 부족하다. 그래서 비파형동검으로 살펴볼 수 밖에 없다.

→ 출처도 없으며, 일단 내용 자체가 명백한 오류입니다. 비파형동검 및 미송리형 토기의 출토 지역은 랴오닝 성과 한반도 북부가 주된 곳이며, 한반도 중남부 지역이나 지린 성, 헤이룽장 성 지역에서는 극히 일부만 출토되고 있을 뿐입니다. 또한 문헌기록이 일제강점기에 사라졌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며, 비파형동검은 그 양식과 출토 양상에 따라 고조선 계 유물로 보는 것과 아닌 것이 폭넓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주와 한반도 전체를 포괄한다는 해당 주장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역사학계에서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를 토대로 추측하는 강역은 랴오닝 성 및 한반도 북부입니다.

    • 만주지역에 비파형동검 나타나는 시기는 BC2333년부터 쓰인 것인가요? 시기별 흐름은 생각하지도 않고, 그것이 없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생각하는 것도 우습고, 유물과 문화는 불과 얼마전까진 같은 형식으로 살던 조선족과 우리가 전혀 다른 것을 보면, 전체의 일부분인 그것에만 매달리는 것은 집착이고, 다른 요소는 모두 무시하는 것은 거만스러운 행동입니다. 성씨의 경우, 한국은 분파로 구분하면서 더이상 바뀌지 않고 있지만, 중국의 경우는 일정한 시대까진 끊임없이 성에서 씨로 바뀝니다. 그 성씨 계통에 위만조선 위만은 주나라 위강숙 후손인것이 명백한데, 그것을 무시하는 오만함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요? 단군조선 자체가 한국 역사는 고려 시대 이후에 작성된 기록 연대가 늦기 때문에 추정에 불과한 소설일 수 밖에 없는데, 세빠지게 기록 찾아서 거지같은 편집기로 어렵게 밤새 기록한 것을 바보같은 논리로 삭제하는 것은 정말 오만한 편견입니다. 그런 오만하고 무례한 삭제 덕분에 이 위키는 곳곳에 자기 스스로 모순인 역사 정보를 진열하고 있습니다.성씨가 무엇을 의미하는진 알고 있나요? 연구해보면 느끼겠지만, 성씨들에는 혈족, 종교, 권력, 역사, 많은 정보가 숨어 있습니다. 위키 정보 하단에 참고적으로 연구한것을 기록할 수 있는 부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당신처럼 오만한 편집성 지식인이, 독단적으로 순간 결정, 폭넓은 지식을 독자로부터 차단하는 것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단군조선은 BC2333년에 평양에 건국했다고 한다부터, 거의 1500년이나 후에 쓴 삼국 사기나 삼국 유사는 출처를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 기록한 모든 것들은 당신이 삭제하는 논리에 의하면 쓰레기에 지나지 않습니다.출처가 되는 사서라는 것들이 고려이전 역사는 모두 후대 사람들이 쓴 것으로, 중국사관이 담겼던 안담겼던 BC1600~BC1122년 상나라 갑골 문자 해독이나, 죽서기년, 사기 보다 기록이 정확할 순 없습니다. 사기는 적어도 위만조선 망한 10년후에 쓴 기록이고, 상서는 그 보다 더 오래전 사람이 쓴 기록입니다. 역사는 주관이 개입되면 쓰레기가 되는 것으로, 주관이 담긴 한국사관 역시 중국사관과 마찬가지로 쓰레기입니다. 수천년간 인식하고 있던 기자조선을 불과 100년도 안되는 현대 시기에 깡그리 삭제하는 자체가 자폐증 시작되기전 편집성 오만입니다.--Tol6560 (토론) 2019년 6월 24일 (월) 11:29 (KST)답변
현재 우리는 한반도 절반 남한에 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 조선, 한반도에 갇혀있다. 단군조선은 전조선과 후조선으로 나눠서 봐야 하고, 기자조선(箕子朝鮮)은 후조선에 해당된다. 위만조선(衛滿朝鮮) 왕 위만(衛滿)은 주(周)나라 위 강숙(衛 康叔) 후손 중국인인 것을 희성 위씨(姬姓 衞氏) 성씨(姓氏)에서 알 수 있다. 신단수(神檀樹) 태백산은 고조선(古朝鮮) 활동 반경이 만주 지역인 것을 참고하면, 현재 태백산(太白山)이 될 수 없는 대륙에 있는 산이다. 고대 중국인 주류는 하(夏)나라와 주(周)나라에 뿌리가 있고, 하(夏)나라 영역은 황하(黃河) 중류 지역으로 지금보다 협소했고, 4 방향 이민족을 서쪽 서융(西戎), 남쪽 남만(南蠻), 북쪽 북적(北狄), 동쪽 동이(東夷)로 불렀다. 동이(東夷)가 있던 산동성 지역에 있는 산은 태산(泰山)이 유일하고, 박달나무 단(檀)이 주로 북경, 요하, 만주, 한반도 북부 일대에서 자생하는 것을 고려하면,태행산맥(太行山) 주변에 북적(北狄)이 분포한 것을 참고하면 그 지역 어딘가에 있는 산, 둘 중 하나다. 수(樹)는 목(木)나무, 주(尌)세울, 나무를 세우다, 자연림이 아닌, 박달나무 정원을 꾸밀 능력 있는 지역, 신(神)은 호족(豪族)을 뜻합니다. 상(商)나라는 하(夏)나라를 멸망시켰고, 주(周)나라에 망했다. 선(單) 내용에 있는 정 여공이 약(櫟)땅을 지키는 단백(檀伯=단족 수장)을 약(櫟)나라 사람 도움으로 처죽인 맹진(孟津) 부근 역시 상(商)나라 영역에 있었고, 정 여공(鄭 厲公)은 주(周)나라 후손으로, 중국이 동이계 상(商)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전조선은 중국 대륙 북적+동이 지역에 존재했을 가능성 있고, 후조선은 주(周)나라 반란으로 상(商)나라가 망하면서 상나라 왕족인 기자 서여는 백적족 지역에서 기(箕)족을 이끌고 평양(平壤)=양평(壤平) 요하로 이동했습니다. 상(商)나라 왕실 성(姓)은 자(子) 왕족인 것을 표시하는 성씨(姓氏) 기자(箕子), 이름 서여(胥餘)와 부여(扶餘), 여(餘)는 우연히 쓴 이름일까요? 부(扶)도울, 받칠, 부여(扶餘)는 여(餘)를 부(扶) 돕고 받친다는 뜻입니다. 은력(殷曆=상(商)나라 달력)을 그 시기에 부여(扶餘)가 사용한 것도 우연일까요? 부여(扶餘)는 BC500년 경 쑹화강(松花江송화강) 유역에서 시작된 고리국(槀離國)에 뿌리가 있고, 기자(箕子)가 주나라 반란에 이주한 시기는 BC1122년~BC1046년 삼감의 난 평정 후 상(商)나라 유민 중국 각지에 분할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 실행했고, 상나라 왕족 기자 일족이 먼저 이동한 요하로 800여 성씨 많은 유입 발생하면서 세력이 커졌습니다. 주(周)나라는 삼감의 난, 상(商)나라 반란 겪은 후라, 주공 단(周公 旦)은 동생들 중, 젊은 강(康)나라 후(侯) 희(姬) 봉(封)을 위(衛)나라 후(侯)로 봉하면서, 주공 단(周公 旦)은 강고(康誥)=동생 강(康)에게 조언한다. 상(商)나라 유민 반란 감시 당부했고, 위 강숙(衛 康叔)은 둘째 아들을 감시자로 요하 기자(箕子)에게 보냅니다. 그로부터 600년 이상 경과한 후, BC 600년 경 강국(康國)중앙아시아 유목 지역에서 확장 또는 상업 교류로 확장 영향받은 것이 부여(扶餘) 전신인 고리국(槀離國)으로, 강국(康國) 왕실 성(姓)은 온(溫)으로, 온조(溫祚), 온달(溫達), 온군해(溫君解) 성씨(姓氏)로 한반도에 나타납니다. 부여(扶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기자(箕子) 서여(胥餘)를 돕고 받친다는 뜻인데, 현재 한국인 대다수는 부여(扶餘) 계통으로, 기자(箕子)와 함께 온 상(商)나라 유민은 절대 다수가 아니지만 후손 유전자 비중 낮지 않습니다. 기자(箕子)는 북적족 지역에 있던 혈족으로, 그 이전 산동성 지역에 있던 동이족이 상(商)나라가 망하기 이전에 먼저 선주 했기 때문에, 상(商)나라 왕족인 기자(箕子)가 요하에 도착했을 때 수도를 이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북적과 동이는 하(夏)나라중심 중국 입장에서 볼 땐 북쪽 맥족(貊族)과 동쪽 예족(濊族)으로 구분하겠지만, 상(商)나라 땐 같은 테두리 안에 있었고, 용산문화(龍山文化)가 황하 중류 지역에 있던 하나라 문화, 북적족 맥족(貊族)으로 보이는 상(商)나라는 요하문명(紅山文化)에 뿌리가 있고, 단군조선(檀君朝鮮)으로 생각되는 동이 예족(濊族)은 태산(泰山)아래 대하구문화(大汶口文化)에 뿌리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주(周)나라 반란을 계기로 2 + 1 = 3 계통이 만주(滿洲) 지역에서 혼합되면서 후조선을 구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자 글자 자체 뜻이 그렇게 나와있는데, 출처가 어디냐고 묻는 것은 바보아닌가요? 전조선 후조선 구분은 제왕운기에서 했고, 3조선이 아닌 것은, 위만조선은 성씨에서 주나라 문왕 계통 희성위씨 왕실이란 것이 나타나는데, 출처가 필요 있습니까? 희성위씨에 대한 위키 설명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고, 위는 옛문자와 바뀐 문자 2가지가 있습니다. 위만조선은 중국사, 상나라는 한국사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한반도와 산둥성 요하 일본에 분포하는 한국인 주요 유전자가 있습니다. 사마르칸트 스키타이 계통이 확장한 것은 KBS에서도 방영했던 내용이고, 강국 왕실 성씨 온씨 공통점이 출처가 아니면, 역사 유물 출토 검증 한번 단어 하나마다 일일히 따지면 위키 등재 가능하다 생각하세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소수 학자들 지식이 진실이 될 순 없습니다. 역사학자는 언론사 기자와 동일하고, 언론이 주관을 갖고 사실에 접근했을때 어떻게 사실을 외면 왜곡하는진 세월호 보도에서 충분히 경험했습니다.기자조선에서 기국과 부여는 같은 혈족이 아니라, 다른 혈족이지만 상나라 기자와 문명적 공동체 형성했을뿐입니다. "상나라는 중국사다" "한자는 중국 문자다" 고정관념 갖는 순간 막힐 수 밖에 없고, 기자(箕子)는 중국 사람으로 전락합니다. 옛 조선(朝鮮)이나 동이(東夷)가 우리를 우리 스스로 지칭했던 호칭이 아닌, 중국 사람이 중국 관점에서 아침해가 뜨는 동쪽 조선, 동쪽에 있는 이족, 지칭한 타칭인 것처럼, 상나라 역시 단군조선 단국(檀國)역사를 중국인 관점에서 해석한 역사 일 수 있습니다.--Tol6560 (토론) 2019년 6월 24일 (월) 13:01 (KST)답변

  • 단군조선의 강역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견이 많다. 주로 강단사학자들은 평안도에 있는 소국이라는 주장을 제시하지만,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만주와 요동반도, 한반도에 걸쳐 있는 대제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 역사학계의 기본적인 주장에서 평안도에 있는 소국이라는 것은 사실무근입니다. 또한 해당 강역에 대한 내용은 해당 카테고리의 첫번째 문단에서 학자들 사이의 이견을 모두 서술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일부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을 많다는 표현으로 과장해서 표현하고 이에 대한 출처도 없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유로 해당 사용자의 편집을 취소 및 삭제합니다.--Xakyntos (토론) 2009년 4월 30일 (목) 10:40 (KST)답변

만주와 요동반도는 후조선에 해당되는 것으로, 그 이전 시기는 상나라 시기는 중국 황하 중상류 지역을 제외한 황하 북부와 산동반도 지역엔 전조선 상나라가 있었고, 상나라는 성씨와 역사 파편 흔적들을 종합하면 단군조선이란 결론이 나오고, 단군조선=상나라 만주 화련 자치구 환인현 에서 갈라져 내려갔고, 태행산맥 동쪽인 요하문명지에서 시작, 황하 북쪽과 산동성 지역으로 영역을 넓혀간 것으로 보입니다.--Tol6560 (토론) 2019년 6월 24일 (월) 13:19 (KST)답변

근거 없는 편집.. 편집

중국의 한서지리지에는 왕검성이 험독에 있다고 나옵니다. 사기조선열전에는 하북성 창려에 험독현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걸 다룬 도서는 없지만, 근거가 되는 고지도는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http://www.coo2.net/files/wang031222-2.gif —이 의견을 쓴 사용자는 Dkssuddksgody(토론 | 기여)이나, 서명을 하지 않아 나중에 추가하였습니다.

문맥을 봐 주시기 바랍니다. 해당 문장은 밑도끝도 없이 본문에 존재하지도 않는 험독을 꺼내 놓고 있어 문맥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해당 내용은 왕검성 문서에 서술되어 있으니 이쪽에서 논해 주시기 바랍니다.--Xakyntos (토론) 2010년 4월 20일 (화) 18:37 (KST)답변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이 의견을 쓴 사용자는 Dkssuddksgody(토론 | 기여)이나, 서명을 하지 않아 나중에 추가하였습니다.

하나라 역대 수도를 일일히 위치 찾아서 구글어스 편집해보니, 한반도 크기 작은 지역 형성되더군요. 아직 상나라 수도 8차례 이전 모두 확인해 보진 않았지만, 하나라를 멸망시킨 탕왕 첫수도는 황하 남쪽 태산 서쪽 먼 지역으로, 태산 아래에 대하구문화가 있었고, 요하지역 많은 문명유적지를 고려하면 북적과 동이는 탕왕 시키엔 이미 공동체를 형성했을 가능성 있고, 상나라가 주나라에 망할때 기자 기족이 살던 지역이 태행산 오른쪽 아래 백적족 지역인 것에서 상나라가 북방에서 내려온 이민족임을 알 수 있습니다. 태행산맥을 고려하면 북방종족이 내려올 곳은 요하 밖에 없습니다. 상나라는 탕왕 이전 상계 조상도 많은 지역을 이전했습니다. 단군 조선 지리 기록은 현재 중국 지역 지리에서 찾아야 합니다. 산동성 지역에 있던 성씨중에 소호 금천씨(少昊天氏), 김(金)씨 아닙니까? 성씨 관련 한국과 중국 내용을 보면, 산동성 지역은 한국과 전혀 문관하지 않고, 은허 동쪽에 있는 청하 최씨(淸河 崔氏)와 한국 최씨(崔氏)는 생성이 다르다는데, 유전적으로 다른지 확인은 해 보셨습니까? 그것이 추정 소설에 불과한 유물분석보다 확실한 Fact=사실이 될 것입니다. 언어와 문화는 선교사 2 달이면 다 배우고, 생활유적은 미국에 사는 한국인 모두 김치만 먹지 않습니다. 무엇이다, 특정할 수 없는 겁니다.--Tol6560 (토론) 2019년 6월 24일 (월) 12:43 (KST)답변

"단군조선"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