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

1866년 발생한 조선 천주교인 박해

병인박해(丙寅迫害)는 1866년(고종 3년)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정권에 의해 벌어진 대규모의 천주교 탄압을 말한다.[1]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고도 하며, 1872년까지 6년간 진행된 탄압으로 당시 8천여 명이상의 평신도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의 선교사 등이 처형되었다.

흥선대원군은 본래 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없었기 때문에 탄압을 하려는 계획이 없었다.[2][3] 오히려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하여 프랑스의 도움을 이끌어 내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으려고까지 했었다. 그러나 대내외적인 변화로 인해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가 흔들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 정책을 실시하였다.[4]

1866년 봄부터 시작된 박해는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년 8월), 병인양요(1866년 10월),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1868년)이 발생하자 더욱 거세졌고[5] 아울러 흥선대원군쇄국정책도 강화되었다.[6]

원인 편집

대원군과 천주교 편집

1831년 교황청이 조선을 독립교구로 선정하여 앵베 샤스탕 신부를 조선에 파견해 몰락한 양반을 중심으로 천주교를 전파했다. 그러나 조선의 양반들은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기독교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려하여 천주교를 금지하였으며, 1839년에는 천주교 박해사건 중 하나인 기해박해를 일으켜 3명의 프랑스 천주교 신부를 처형했다. 하지만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은밀히 천주교는 확장되었다.

흥선대원군 자신은 본래 천주교를 탄압할 생각은 없었고,[3] 반감도 없었다.[7] 오히려 서양에서 전래된 서학인 천주교를 통해 프랑스 등의 서구 열강들과 교류할 생각을 했고, 개인적으로도 천주교는 부인 여흥부 대부인 민씨의 종교이기도 했다.[2] 천주교를 이용해서 프랑스와의 주선을 통해, 남하하는 제정 러시아를 막으려고 하였던 것도[2]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를 묵인한 이유 중 하나이지만 국외 정세에 의해 천주교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프랑스군이 청나라의 베이징을 점령한 사건으로 청나라에서 천주교를 탄압한다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다.[8] 이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천주교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교역없는 외세 수용의 좌절 편집

1864년(고종 1년) 당시 러시아인이 경흥부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였을 때, 대원군 이하 정부 요원들의 놀람과 당황은 대단하였지만, 이에 대한 대책 강구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이 반면에 몇몇 천주교인들은 이 사건에 대해 중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대책을 스스로 생각하여 이를 대원군에게 건의하였다. 즉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업고 한·불·영 3국 동맹이라도 체결할 수 있다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고, 그들은 그들대로 이것이 성사되면 종교의 자유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대원군으로부터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게 해달라는 청을 받는 데까지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모처럼의 이러한 대원군의 태도에 응하지 않는다.

대원군의 입장변화 편집

더구나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사실상 외교적인 이용 가치가 없었고, 그동안 조정에서 그렇게도 시끄럽던 러시아인의 월경 행위와 통상 요구도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지나친 기우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배층들이 “천국지옥을 주장하며 혹세무민하는 사학(邪學)”으로 여기던 천주교의 교세 확장에 대한 반발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천주교도의 굼뜬 조치·무능한 주선(周旋)과 무책임한 발설로 “운현궁에도 천주학쟁이가 출입한다.”라는 소문만 장안에 퍼지니,[4] 대원군도 소기의 성과는 도저히 거둘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그의 출세를 적극 지지해 준 조대비 이하 요로(要路) 대관들도 천주교의 책동을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청나라에서도 천주교 탄압이 다시 고개를 들어, 대원군으로서도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위태롭게 하는 모험은 하고 싶지 않다는 심정에 이르렀다.[4] 이리하여 천주교도에 대한 일체의 기대를 포기하고 목전의 여론에 솔선 순응함이 상책이라고 결심하게 되었고, 초기의 묵인 정책에서 탄압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갈수록 심해지는 서구 열강들의 중국 침략 행위도 중화사대적인 사상을 갖고 있던 조선인들에게 천주교 탄압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에 따라 천주교 탄압령이 단시일 내에 준비되고, 이것이 전국을 휩쓸게 되었다.

경과 편집

천주교 탄압 편집

1866년(고종 3) 정월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교령(敎令)이 포고되자,[4] 이로써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에서 9명이 처형된 것을 필두로 불과 수개월 동안에 국내 천주교 신도 8천여 명이 처형되었다.[7] 산속으로 피신하여 쫓겨 다니다가 병으로 죽고, 굶주림에 쓰러지는 부녀자와 어린이가 부지기수였으며, 이 통에 신도도 아닌 자들이 박해당한 예도 허다하였다. 다블뤼 등 세명의 프랑스 신부는 충청도 수영에서 참수당했다.[9]

배교자가 속출했고 천주교 관련 서적을 압수하여 불태웠으며 십자가와 마리아상이 짓밟혔다. 1866년 10월에 병인양요가 벌어지고[10] 1868년 5월에는 독일인 오페르트에 의해 흥선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분묘 도굴 사건이 일어나자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11] 천주교 탄압은 6년간 지속되었으며[12] 탄압이 심했던 곳은 서울 합정, 황해도 옹진, 풍천, 장연, 충청남도 내포[13]와 서산 해미면 주변이었다.[9]

절두산 순교 편집

 
절두산 순교 성지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1830~1884)는 텐진에 있던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프랑스 선교사 9명의 순교 소식을 전했다. 로즈는 청나라의 중재제의를 거부한채 군함 세척을 이끌고 무력보복에 나서며 병인양요가 발생했다. 이들은 9월 26일 경에 양화진을 거쳐 서강까지 순찰한후 강화도를 공격하며 약탈을 자행하다가 11월에 철수하였다.[14][15] 이 사건에 분노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더럽혔던 땅을 서학인의 피로 씻음이 마땅하다" 고 하면서 양화나루 옆의 잠두봉에 형장을 설치해 천주교인들을 처형하게 하였다.[16] 이때 수천명의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죽었다. 그 뒤로 절두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17] 잘린 목은 한강에 던져졌고, 머리가 산을 이루며 한강물이 핏빛으로 변하였다고 전해진다.

해미 순교(생매장) 편집

충남 서산시 해미면 조산리에 있는 '여숫골'이라 불리는 골짜기에서는 천주교인 1000여 명이 처형 또는 생매장 당했다. 당시 해미진영(海美鎭營)은 천주교도 색출과 처벌의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충청도와 경기도 평택에 이르는 해미현 관아 관할지역에서 붙잡힌 천주교도들은 해미읍성으로 끌려왔다. 이들을 옥사에 가두었다가 서문 밖에서 처형했는데, 숫자가 너무 많아지자 시체처리의 편의를 위해 읍성 바깥의 해미천변에 큰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을 하였다.[18] 이러한 사실은 1935년 서산성당 범바로(P, Barraux) 신부의 조사와 발굴을 통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순교자 명단 편집

번호[19] 이름 및 세례명 신분 순교일 및 순교 동기
80 유정률 베드로 비서 1866년 2월 17일 장살
81 베르뇌 시몬 주교 1866년 3월 7일 군문 효수형
82 랑페르 유스토 신부 1866년 3월 7일 군문 효수형
83 도리 헨리코 신부 1866년 3월 7일 군문 효수형
84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 1866년 3월 7일 군문 효수형
85 남종삼 세례자 요한 승지 1866년 3월 7일 참수형
86 전장운 세례자 요한 상인 1866년 3월 9일 참수형
87 최형 베드로 회장 1866년 3월 9일 참수형
88 정의배 마르코 회장 1866년 3월 11일 군문 효수형
89 우세영 알렉시오 역관(번역가) 1866년 3월 11일 군문 효수형
90 다블뤼 안토니오 제5대 조선교구장, 주교 1866년 3월 30일 군문 교수형
91 위앵 마르티노 루카 신부 1866년 3월 30일 군문 교수형
92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 1866년 3월 30일 군문 교수형
93 장주기 요셉 회장 1866년 3월 30일 군문 교수형
94 황석두 루카 회장 1866년 3월 30일 군문 교수형
95 손자선 토마스 농부 1866년 5월 18일 교수형
96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원님 1866년 12월 13일 참수형
97 조화서 베드로 농부 1866년 12월 13일 참수형
98 손선지 베드로 회장 1866년 12월 13일 참수형
99 이명서 베드로 농부 1866년 12월 13일 참수형
100 한재권 요셉 회장 1866년 12월 13일 참수형
101 정원지 베드로 농부 1866년 12월 13일 참수형
102 조윤호 요셉 농부 1866년 12월 23일 참수형
103 이윤일 요한 회장 1867년 1월 21일 참수형

사건의 여파와 평가 편집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살아남은 리델청나라로 탈출해 천진 주재 프랑스 함대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전했고 이는 그해 11월 발생한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7][20][21][22]

기타 편집

병인박해는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흥선대원군을 기독교인들의 순교조선순교자의 나라가 되게 한 인물이라고 묘사할 정도로 서구인들에게도 유명한 사건이었다.

이 박해는 네 차례에 걸쳐 파동으로 전개되었다. 첫번째는 1866년 봄에, 두번째는 1866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세번째는 1868년, 네번째는 1871년으로 이어져 도합 8,000여 명 이상의 순교자를 내었다. 1868년의 세번째를 무진사옥, 1871년의 네번째를 신미사옥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대원군에 의해 계속 추진된 것이므로 병인박해에 포함시키는 것이 통례이다. 따라서 병인박해는 병인년(丙寅年)인 1866년 한 해의 박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뒤 6년간에 걸친 박해를 모두 지칭하는 용어이다.[23]

관련 문서 편집

각주 편집

  1.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7> 한길사 2009.4.10 p125
  2.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3.31 p93
  3.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상)》. 80쪽. 
  4.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3.31 p95
  5.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7> 한길사 2009.4.10 p126
  6. [네이버 지식백과] 에른스트 오페르트 [Ernst Jacob Oppert] (두산백과)
  7.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병인사옥
  8.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3.31 p94
  9.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7> 한길사 2009.4.10 p126
  10. [네이버 지식백과] 병인박해 [丙寅迫害]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신부 리델(Ridel, 李福明)은 7월 조선을 탈출, 청나라의 톈진으로 가서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Roze,P.G.)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에 로즈는 10월에 7척의 군함을 이끌고 프랑스 선교사들의 학살 책임을 묻는 무력시위를 벌이게 되어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하였다. 이 병인양요로 말미암아 박해는 제2단계에 들어가게 되는데, 대원군은 국가적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면서 천주교도를 통외초구(通外招寇)의 무리로 내세워 수많은 천주교인을 처형하였다.
  11. [네이버 지식백과] 남연군분묘도굴사건 [南延君墳墓盜掘事件] (두산백과).....소식을 전해들은 대원군은 양이(洋夷)의 추적을 명하는 동시에, 이러한 괴변은 필시 천주교도의 내응(內應) 향도(嚮導)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국내에 남아 있는 천주교도를 더욱 엄중히 단속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12. [네이버 지식백과] 병인박해 [丙寅迫害]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박해는 네 차례에 걸쳐 파동으로 전개되었다. 첫번째는 1866년 봄에, 두번째는 1866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세번째는 1868년, 네번째는 1871년으로 이어져 도합 8,000여 명 이상의 순교자를 내었다. 1868년의 세번째를 무진사옥, 1871년의 네번째를 신미사옥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대원군에 의해 계속 추진된 것이므로 병인박해에 포함시키는 것이 통례이다. 따라서 병인박해는 병인년(丙寅年)인 1866년 한 해의 박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뒤 6년간에 걸친 박해를 모두 지칭하는 용어이다.
  13. [네이버 지식백과] 병인박해 [丙寅迫害]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1868년 4월에 일어난 오페르트(Oppert)의 충청남도 덕산 남연군묘(南延君墓) 도굴사건을 계기로 다시 불이 붙어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 오페르트는 수차에 걸친 통상요구가 거듭 거부되자 대원군 아버지의 분묘를 도굴할 계획을 세우고 작업을 펴나갔으나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이에 대원군은 크게 분노하여 내포 지방의 교인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하였다. 내포지방은 천주교회 창설기부터 천주교가 유포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희생자를 내었고 부근의 지방까지 피해를 입었다.
  14.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3.31 p106~107
  15. 전국역사교사모임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2> 휴머니스트 2003.4.28 p21
  16.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년 p98
  17. [https://web.archive.org/web/20210819085852/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582380&cid=47322&categoryId=47322 Archived 2021년 8월 19일 - 웨이백 머신 [네이버 지식백과] 문명과 야만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2011. 8. 8., 김육훈]).....절두산(切頭山, 잘린 머리가 산처럼 높이 쌓였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불렸답니다.
  18. [네이버 지식백과] 여숫골 [Yeosutgol]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지명, 2010. 2., 김기혁, 김기빈, 김순배, 권선정, 전종한, 강창숙, 심승희, 이영희, 이재덕, 조영국, 손승호, 이인희, 정부매, 정암, 최원회)
  19. 103위 순교 성인 목록에 따른 번호를 말한다.
  20. [설왕설래]병인양요 - 세상을 보는 눈, 글로벌 미디어 - 세계일보
  21. “병인사옥” (HTML). 
  22. 〈병인박해〉. 《엔싸이버 백과사전》. 2008년 6월 20일에 확인함. 
  23. [네이버 지식백과] 병인박해 [丙寅迫害]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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