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 (회남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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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남왕 유안'''(淮南王 劉安, [[기원전 179년]] ~ [[기원전 122년]])은 중국 [[전한]]의 학자로, 황족 · 제후왕이다. 저서로는 《[[회남자]]》가 있다.
 
[[한 고조]](漢高祖) 유방의 서자인 [[유장 (회남여왕)|유장]](劉長)의 아들이며, 아버지가 [[전한 문제|한 문제]](漢文帝) 때에 모반죄로 죽은 뒤 두 동생 [[유발 (제북정왕)|형산왕 유발]], [[유사 (사람전한)|여강왕 유사]]와 함께 회남나라를 나누어 받아서 회남왕이 되었다. 당시 한나라 조정은 제후왕의 권력을 줄여서 중앙으로 집중시키고 있었다. [[전한 무제|무제의무제]]의 즉위와 더불어 그러한 정책은 보다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기원전 122년]] 한나라 조정은 중앙집권정책을 군신 질서를 존중하는 유교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추진하려고 하였다. 문학을 애호하는 회남왕의 궁정에 기거하였던 빈객과 학자 중에는 이와 같은 한나라 조정(漢朝)의 정책에 반발하는 자가 많았으며 그 이유 때문에 유안도 모반의 음모가 있다는 혐의를 받아 자살하고 그의 봉지는 몰수되었다.
 
==생애==
회남여왕은 큰아버지 [[전한 문제|문제]]에게 반역했다가 사로잡혀 유배 길에 자결했는데,<ref name="h44">반고: 《[[한서]]》 권44 회남형산제북왕전제14{{위키문헌|:zh:漢書/卷044|한서 권44 회남형산제북왕전제14}}</ref><ref name="h14">위와 같음, 권14 제후왕표제2{{위키문헌|:zh:漢書/卷014|한서 권14 제후왕표제2}}</ref> 문제는 회남여왕을 불쌍히 여겨 문제 8년([[기원전 172년]]) 5월에 회남여왕의 일고여덟살배기 네 아들들을 후로 봉했다. 유안은 이때 부릉후(阜陵侯)에 봉해졌다.<ref name="h44"/><ref name="h15u">위와 같음, 권15 왕자후표제3상</ref> 문제 16년([[기원전 164년]]), 회남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회남여왕의 아들들 중 죽은 유량을 빼고 모두 왕으로 세워 주면서, 회남왕으로 봉해졌다.<ref name="h44"/><ref name="h14"/><ref name="h15u"/> 경제 3년([[기원전 154년]]),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나자 가담하려 했으나, 승상이 스스로 장수가 되기를 청하고는 왕의 뜻을 거스르고 한나라 편을 들어 가담하지 못했고, 한나라에서 또 회남나라에 구원군을 보내 회남나라는 반란 후에도 온전할 수 있었다.<ref name="h44"/>
 
유안은 처음 입조했을 때 태위 [[전분 (사람)|무안후 전분]]과 친교를 맺었고, 당시 황제에게 태자가 없었기에 전분이 다음 황제가 될 것은 유안이라고 하자 매우 기뻐해 무안후에게 뇌물을 주는 한편 [[양쯔 강]]과 [[화이허]] 사이의 지역에서 사람들을 모았다. 그리고 무기를 준비하며 군과 국에 뇌물을 뿌렸다.<ref name="h44"/>
 
{{전임후임
|전임자=[[유희 (성양공왕)|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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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ity control}}
 
==주석==
<references/>
 
[[분류:기원전 179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