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주: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14번째 줄:
 
=== 한산주 ===
한산주의 치소 일대는 원래 [[백제]]의 수도 [[한성]]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고구려]] [[장수왕]] 이후 고구려가 점령하여 한산군(漢山郡)을 설치하였고, [[백제 성왕]] 때 일시 회복했다가 [[553년]] 신라 [[진흥왕]]이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이 지역을 취하였다. 진흥왕은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여 백제로부터 빼앗은 지역을 관할하게 하였다. [[557년]]([[진흥왕]] 18년) 신주를 북한산주(北漢山州)로 개칭하였는데, 이후에는 전세(戰勢)에 따라 치소(治所)가 이동하면서 [[한강]] 유역에서는 북한산주와 남천주(南川州, [[이천시]])의 폐치분합(廢置分合)이 반복되다가, [[백제]]가 망하고 4년 뒤인 [[664년]]([[문무왕]] 4년)에야 비로소 한산주(남한산주)로 정리되었다. [[757년]]([[경덕왕]] 16년)에 전국의 행정구역 명칭을 중국식 한자어로 고치면서 '한산주'도 '한주'로 개칭되었다. [[혜공왕]] 때 행정구역 명칭을 원래 명칭으로 되돌렸다고 한다. [[고려]] 때는 [[광주군 (경기도)|광주]](廣州)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른다개칭하였다.
 
한산주는 [[신라의 삼국통일|삼국 통일 전쟁]] 및 [[나당 전쟁]] 시기에도 영역이 계속 변화하였는데, 황해도 지역은 나당 전쟁 직후까지 군·현이 설치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가 이후 영역을 정리하고 군·현을 설치하였다. [[694년]]([[효소왕]] 3년)에 송악성(松岳城 : [[개성시]])과 우잠성(牛岑城)을, [[703년]]([[성덕왕]] 2년)에 개성(開城)을 쌓았고, [[748년]]([[경덕왕]] 7년)에 14개 군·현을 설치하였으며, [[762년]]에도 6개의 성을 쌓았다. [[헌덕왕]] 때 취성군(取城郡)을 설치하고 [[826년]] [[대동강|패강]]에 길이 300리의 장성(長城)을 쌓아 한산주의 북쪽 경계가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