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우스 젬갈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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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Gustavs Zemgals on Latvia Stamp.jpg|thumb|110px|[[라트비아]] [[우표]]에 나온 젬갈스]]
'''구스타우스 젬갈스'''({{llang|lv|Gustavs Zemgals}}, [[1871년]] [[8월 12일]] ~ [[1939년]] [[1월 6일]])는 [[라트비아]]의 정치인으로, 2대 [[라트비아의 대통령]]이었다.<ref name="treijs">{{cite book |last = Treijs |first = Rihards |authorlink = Rihards Treijs |title = Prezidenti : Latvijas valsts un ministru prezidenti (1918-1940). |language = 라트비아어 |publisher = [[Latvijas Vēstnesis]] |location = Riga |year = 2004 |isbn = 9984-731-47-2 |oclc = 61227165}}</ref>
 
==생애==
===젊은 시절===
[[라트비아]] 죽스테 (Džūkste)에서 태어났다. 이후 사카 교구의 초등학교에 진학하였고 [[리가]] 니콜라이 학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1899년에는 [[모스크바 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으며 [[라트비아]]로 가서 변호사로 일하다 신문 편집장, 정치활동가가 되었다.
 
1904년 [[러일 전쟁]] 당시 젬갈스는 군 징집을 받아 전선으로 보내졌으며 1년 반 동안 복무하다 [[대위]]로 진급하였다. 1905년 라트비아로 귀국한 뒤에는 진보성향의 일간지 〈야우나 디에나스 라파〉 (Jaunā Dienas Lapa, 새날 신문)의 창간자 중 한 명이 되었고 편집장을 맡았다. 이후 해당 신문의 뒤를 잇는 '무수 라이키' (Mūsu Laiki, 우리의 시간)의 편집도 맡았다. 그러나 이때의 언론 활동으로 1907년 7월 리가지구 [[법원]]이 젬갈스에게 3개월형을 선고해 투옥되기도 했다. 출소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젬갈스는 여타 정치운동단체와 더불어 라트비아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1912년부터 1914년까지는 잡지 《도마스》 (Domas, 사상)에서도 일하였다.
 
===정계 입문과 대통령 재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젬갈스는 다시 한번 징집되었고 처음에는 라트비아 중부의 보병사단에 배치받았으나 이후 [[핀란드]]로 갔다. 다시 라트비아로 귀국한 뒤 1917년 4월 23일에는 리가 시장으로 당선됐으며, 그해 가을 리가 임시시의회는 젬갈스를 다시 시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당시 젬갈스는 라트비아 급진민주당에서 활동중이었다.
 
1918년부터는 [[라트비아 임시국가위원회]]에서 활동하게 되었으며 라트비아의 영유권 주장 지역에 관한 직무를 맡게 되었다. 또 라트비아 급진민주당 소속으로서, 라트비아의 정당과 정치단체를 관할하는 [[타우타스 파도메]] (인민의회)의 제2부의장이 되었으며, 라트비아 [[독립]]을 선언했던 1918년 11월 18일 회의에서 의장을 맡았다. 1918년 12월 3일에는 리가 시의회 의장으로 당선됐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정권이 부상하고 라트비아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자, 타우타스 파도메는 라트비아 문제를 널리 알리기 위해 [[야니스 착스테]]와 젬갈스를 라트비아 대표로 임명해 해외에 파견하였다. 젬갈스는 여러 정부인사와 함께 영국 군함을 타고 [[코펜하겐]]으로 갔으나, 불과 두 달 뒤 젬갈스는 고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후 타우타스 파도메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힘썼으나, 측근 동지들과 함께 독일군에게 체포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라트비아 의회 ([[사에이마]])에 발을 들여 [[민주중앙당]] 소속 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역대 내각에서 여러 장관직도 맡았다. 1927년 [[야니스 착스테]]가 사망하자 라트비아의 [[대통령]]직에 올랐다. 대통령 재임 당시 그는 딱 한 차례 입법 거부권을 행사한 것을 제외하고는 의회 입법에 간섭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젬갈스는 [[사면]]권은 자주 행사하였다. 재임 기간 동안에만 총 648명이 감형 및 사면됐으며 172명은 완전히 사면됐다. 1930년 대통령 임기가 끝나자 다시 대통령직을 맡아달라는 주변의 많은 요청에도 불구, 재선을 포기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퇴임 이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젬갈스는 정계활동을 계속하였고 제4대 의회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이때 외무위원회, 재정위원회, 무역산업위원회의 위원을 맡았다. 1931년부터 1932년까지는 재무부장관도 역임하였다. 이후 1930년대에는 신문 〈야우나카스 지냐스〉(Jaunākās Ziņas, 최신소식)에 기사를 기고하였다.
 
1926년에는 라트비아 최고수훈장인 [[삼성훈장]] 3급을 수여받았으며, 1929년에는 가장 높은 삼성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1939년 1월 6일 사망하여 리가에 뭍였으며, 1990년에는 그가 태어난 죽스테에 젬갈스 기념상이 세워졌다.
 
== 각주 ==
{{각주}}
 
{{위키공용분류|Gustavs Zemgals}}
{{전거 통제}}
{{토막글|라트비아}}
 
[[분류:라트비아의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