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지 스 포데브라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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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지 스 포데브라트'''({{llang|cs|Jiří z Poděbrad}}, [[1420년]] [[4월 23일]] ~ [[1471년]] [[3월 22일]])는 [[보헤미아]]의 국왕(재위: 1458년 ~ 1471년)이다. 그는 체코보헤미아 역사상 처음으로 왕족 가문이 아닌 귀족 가문에서 선출된 왕이었으며, [[얀 후스]]의 종교개혁 정신을 추구한 '후스주의 왕'으로 평가되고 있다.
 
== 생애국왕 즉위 이전 ==
보헤미아의 귀족인 포데브라트 가(Poděbrad) 출신의 빅토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뮌스터베르크(Münsterberg) 공작이었던 빅토르는 [[후스 전쟁]]에서 온건 파벌이었던 [[양형영성체파]](우트라크파)를 지지했다. [[1434년]] 이르지는 급진 파벌이었던 [[타보르파]]의 몰락을 초래한 리파니(Lipany) 전투에 참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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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즉위한 라디슬라우스는 교황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고 보헤미아의 귀족들이 갖고 있던 전통적인 특권과 계약을 인정했다. [[1457년]] 라디슬라우스 국왕이 급사하면서 라디슬라우스가 이르지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렇지만 [[1985년]]에 있었던 시신 부검에서 라디슬라우스가 [[백혈병]]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국왕 즉위 ==
[[1458년]] [[2월 27일]] 보헤미아의 사회 계급 지도자들은 이르지를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추대했다.
후스주의를 추구하는 이르지의 등장은 후스주의 2세대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인바. 2세대 후스주의는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공존의 시기로서 이르지는 평화와 질서를 표방하면서 두 종파간의 화합을 모색하였다. 교황파를 지지하던 세력들은 그의 온건한 정책을 높이 평가했으며 외국인 지배자를 싫어하는 민중의 감정을 고려하는 등 이르지에게 투표했다. 이르지는 프라하 협정에 따른 온건한 통치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일부 [[로마 가톨릭교회]] 신도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렇지만 이르지와 적대 관계에 있던 [[교황 비오 2세]]는 포데브라트 가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후스전쟁]]의 종전을 선언한 1436년의 이흘라바 협약의 무효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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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지는 이 조약이 [[1464년]]에 발효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로마와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던 이르지의 구상은 좌절되고 만다. 먼저 프랑스의 [[루이 11세]]가 교황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를 거부하자 다른 군주들도 이에 동조하였다. 1464년 보헤미아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구상하던 교황 비오 2세가 사망하고 [[교황 바오로 2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이르지는 교황 바오로 2세와의 평화 협상을 시도했지만 새 교황도 자신을 적대시하고 있었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 교황의 파문 ==
이르지는 교황파 출신 귀족들을 자신의 적으로 만들었다. [[1465년]] [[11월 28일]] 교황파 출신 가톨릭 귀족들은 젤레나호라(Zelená Hora)에서 이르지 국왕에 대항하는 동맹을 결성했다. 이 동맹은 결성 당시부터 [[교황 바오로 2세]]의 지지를 받았다. [[1466년]] [[12월 23일]] [[교황 바오로 2세]]는 이르지 국왕을 [[파문]]하고 보헤미아의 국왕에서 폐위되었음을 선언했다. 과거 이르지와 동맹 관계를 맺었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3세, 헝가리의 국왕인 [[마차시 1세]]가 보헤미아 귀족들의 반란에 가세했다. [[마차시 1세]]는 1469년 2월의 전쟁에서 이르지 왕에게 포위되어 이르지 왕에게 협조할 것을 맹세하고 풀려났으나 그는 이를 지키기는커녕 [[1469년]] [[5월 3일]]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받아 [[올로모우츠]]에서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곧 루타시아루사티아, 살레지아실레시아, 그리고 대부분의 모라비아모라바 가톨릭교도들이 [[마차시 1세]]를 지지하고 나섰다.
 
== 죽음과 그 이후이 후==
==교황의 파문==
[[1470년]] 이르지는 자신을 지지하던 세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헝가리의 국왕 [[마차시 1세]]와 휴전 협정을 체결했으며 [[1471년]] [[3월 22일]]에 사망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폴란드]]의 국왕이었던 [[카지미에시 4세]]의 아들인 [[울라슬로 2세]](블라디슬라프 2세)를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선출하였지만, 교황청을 비롯해 루사티아, 살레지아실레시아, 모라비아모라바 지역은 물론이고 체코보헤미아 왕국내의왕국 내의 가톨릭교도들 대부분이 [[마차시 1세]]를 체코왕으로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은 계속되었다.
이르지는 교황파 출신 귀족들을 자신의 적으로 만들었다. [[1465년]] [[11월 28일]] 교황파 출신 가톨릭 귀족들은 젤레나호라(Zelená Hora)에서 이르지 국왕에 대항하는 동맹을 결성했다. 이 동맹은 결성 당시부터 [[교황 바오로 2세]]의 지지를 받았다. [[1466년]] [[12월 23일]] [[교황 바오로 2세]]는 이르지 국왕을 [[파문]]하고 보헤미아의 국왕에서 폐위되었음을 선언했다. 과거 이르지와 동맹 관계를 맺었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3세, 헝가리의 국왕인 [[마차시 1세]]가 보헤미아 귀족들의 반란에 가세했다. [[마차시 1세]]는 1469년 2월의 전쟁에서 이르지 왕에게 포위되어 이르지 왕에게 협조할 것을 맹세하고 풀려났으나 그는 이를 지키기는커녕 [[1469년]] [[5월 3일]]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받아 [[올로모우츠]]에서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곧 루타시아, 살레지아, 그리고 대부분의 모라비아 가톨릭교도들이 [[마차시 1세]]를 지지하고 나섰다.
 
 
==죽음과 그 이후==
[[1470년]] 이르지는 자신을 지지하던 세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헝가리의 국왕 [[마차시 1세]]와 휴전 협정을 체결했으며 [[1471년]] [[3월 22일]]에 사망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폴란드]]의 국왕이었던 [[카지미에시 4세]]의 아들인 [[울라슬로 2세]](블라디슬라프 2세)를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선출하였지만, 교황청을 비롯해 루사티아, 살레지아, 모라비아 지역은 물론이고 체코 왕국내의 가톨릭교도들 대부분이 [[마차시 1세]]를 체코왕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은 계속되었다.
[[마차시 1세]]는 가톨릭의 지원을 받아 계속 체코 왕권을 주장. 블라디슬라프 2세측과 [[마차시 1세]]측은 올로모우츠에서 [[올로모우츠 협약]]을 맺고 보헤미아는 블라디슬라프 왕의 통치를 인정하고, 다른 지역인 모라비아, 실레지아, 루타시아에서는 마차시의 지배를 인정했다. 그러다 1490년 [[마차시 1세]]가 죽자 블라디슬라프는 전체 체코 왕국의 지배를 회복하였다.
 
[[마차시 1세]]는 가톨릭의 지원을 받아 계속 체코보헤미아의 왕권을 주장주장했다. 블라디슬라프 2세측과2세 측과 [[마차시 1세]]측은 올로모우츠에서 [[올로모우츠 협약]]을 맺고 보헤미아는 블라디슬라프 왕의 통치를 인정하고, 다른 지역인 모라비아모라바, 실레지아실레시아, 루타시아에서는루사티아에서는 마차시의 지배를 인정했다. 그러다 1490년 [[마차시 1세]]가 죽자 블라디슬라프는 전체 체코보헤미아 왕국의 지배를 회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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