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건적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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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황건이 완전히 소탕되지는 않았고 [[188년]]이 되자 황건과도 관계 있는 [[백파]](白波)의 적(賊)이 [[산시 성 (산서성)|산시성]](山西)에서 일어나고, [[산둥성]](山東) 방면에서는 [[칭조우]](淸州)와 [[쉬조우]](徐州)의 황건이 연달아 맹위를 떨쳐 전국을 전란과 무질서 상태에 빠뜨렸다.
 
그 후에는 [[192년]] [[동탁]]이 죽고 [[이각 (후한)|이각]]과 [[곽사]]가 서량군을 무찌른 틈을 타서 청주에서 다시 수십만 명에 이르는 황건적이 들고 일어나 제북상 [[포신]]과 연주 자사 [[유대 (후한연주자사)|유대]]까지 전사시키는 등의 위세를 떨쳤다. 이에 이각은 [[주준]]의 추천으로 종군태수 조조를 시켜 청주의 황건적들을 토벌하고 제북까지 공격해 100일 만에 황건적 30만 명을 항복시키고 청주병으로 흡수한다.
 
하지만 그 뒤에도 황건적들의 활동을 계속되어 [[194년]] 황건적 잔당의 대장 [[관해]]가 군대를 이끌고 청주의 북해를 습격하기도 했으나 북해의 황건적들은 [[유비]]와 [[태사자]]에 의해 토벌되고 그 뒤에도 연주와 서주 일대에서 계속 약탈을 자행하던 황건적 대장 [[하의]], [[하만 (후한)|하만]], [[황소 (삼국지)|황소]]의 황건적 잔당은 조조에 의해 다시 토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