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건적의 난
황건적의 난(黃巾賊- 亂, 영어: Yellow Turban Rebellion, Yellow Scarves Rebellion)은 중국 후한 말기 황주하에 의한 토지겸병의 위기에 끊임없이 직면해 있던 농민이 황건적(黃巾賊)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다. 이후 중국은 군웅이 할거하며 결과적으로 황건적의 난은 삼국시대의 개막의 큰 원인이 되었으며 앞으로 300년간의 긴 분열기인 위진남북조의 배경으로 작용한다.
황건적의 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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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말기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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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한나라 관군 | 황건적 | ||||||
지휘관 | |||||||
하진 노식 황보숭 주준 동탁 원소 조조 손견 도겸 포신 |
장각 장량 장보 장만성 | ||||||
병력 | |||||||
약 7만 | 약 36만 |
배경
편집외척이나 환관의 전횡으로 인하여 부패한 정치 밑에서 한층 더 곤궁을 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는 미신적인 민간신앙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현세구제(現世救濟)의 종교가 유행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였다.
경과
편집태평도 창시
편집후한 영제 때에 거록(鋸鹿)의 장각(張角)은 스스로 대현량사(大賢良師)라 호를 짓고 황천(黃天)의 신(神)의 사자(使者)라고 일컬으면서 병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장각은 스스로 아홉 마디(九節)가 나 있는 지팡이를 짚고 설교하고 다녔는데, 170년대 초 무렵부터는 제자를 사방에 파견하여 포교(布敎)에 힘썼다.이같은 교리는 빈곤 속에서 질병에의 공포와 불안을 품고 있던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10여 년 사이에 화북(華北)의 동반부로부터 양쯔강(揚子江) 유역에 걸쳐 수십만 명의 신도를 얻어 일대 교단(敎團)으로 성장했는데, 이 교단의 이름이 태평도(太平道)이다. 태평도는 주술(呪術)에 의한 요병(療病)을 중심으로 하고, 한대(漢代)에 유행한 참위설(讖緯說)·음양오행설 등과 잡다한 민간 신앙을 가미하고 다시 도가(道家)의 설로 윤색한 것이다.
장각은 이 신도들을 36개의 방(方)으로 조직했는데, 이 조직은 빈민의 반(反)권력적인 성격과 결합하여 군사적인 조직이 되기도 했다. 즉, 장각은 천공장군(天公將軍)이라 호를 지어 최고위에 앉고, 2명의 동생 중에서 장보(張寶)는 지공장군(地公將軍), 장량(張梁)은 인공장군(人公將軍)이라 일컬었으며, 1만 명 전후의 신도로 이루어지는 방(方)의 책임자로는 장각의 제자가 선출되었는데, 그들은 신도로부터는 사(師:스승)라 불림과 동시에 방은 그대로 장군이름으로 불렸다.
이러한 태평도는 후한 정부로서는 커다란 위협이었다. 정부는 탄압책을 강구하여 해산명령을 내렸으나, 이것은 도리어 신도의 단결과 교단의 조직을 강화시키고, 반(反)권력적인 성격을 강화시켜 주는 결과가 되었다.
봉기
편집장각은 한제국(漢帝國)의 창천(蒼天) 대신 황천(黃天)의 세상을 실현해야 한다고 하면서 민중을 선동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당초 반란이 일어난 이유는 고위층의 부패와 민생의 어려움 때문이었으나 장각은 얼마 후 스스로 천공장군을 자칭하며 천자가 될 야심을 품었다. 그리고 백성들을 약탈한 것도 사실이다.
진압군 편성
편집황건적의 난은 후한 전국 13곳에서 일어나고 이에 후한 황제 영제는 외척이자 대장군 하진과 대책을 의논한다. 이리하여 옛 유비의 스승이었던 노식과 황보숭, 주준 등 3명의 장수가 황건적과의 전투 부대로 편성되고 조조도 기도위에 임명되어 황건적 토벌에 나선다.
한편 강동의 손견도 하비에서 부하 황개, 한당, 정보, 조무와 함께 1,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참여한다. 그리고 유주의 탁현에서는 유비가 장비, 관우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수백 명의 장정들을 모집해 모집한 용사 500명을 이끌고 황건적 토벌에 나선다.
유주성 전투
편집유주성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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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적의 난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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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유언 유비 | 황건적 | ||||||
지휘관 | |||||||
유언 유비 추정 관우 장비 |
정원지† 등무† | ||||||
병력 | |||||||
유비 500명 | 50,000명 |
의병을 일으킨 유비는 유주성으로 가 유주 태수 유언을 만난다. 얼마 뒤 황건적 대장 정원지가 5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유비는 의병 500명을 이끌고 유주의 관군 대장 추정과 함께 유주성 앞 대흥산에서 대치한다.
정원지는 부장 등무를 내보내 맞서게 했으나 유비의 의형제 장비에 의해 베어진다. 이에 정원지는 직접 나서지만 오히려 유비의 의형제 관우에 의해 목이 베인다.
대장 정원지가 쓰러지자 황건적들은 우왕좌왕하고 유비 삼형제는 황건적들을 무찌른다.
청주성 전투
편집청주성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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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적의 난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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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유언(후한) 유비(촉한) 공경 | 황건적 | ||||||
지휘관 | |||||||
유비 공경 추정 관우 장비 | 불명 | ||||||
병력 | |||||||
유비 500명 추정 5,000명 총병력 5,500명 | 불명 |
유주성 전투 후 다음 날 황건적에게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한 청주 태수 공경의 편지가 도착한다. 유주 태수 유언은 교위 추정을 시켜 군사 5,000명을 보내 유비와 함께 청주의 황건적을 무찌르게 한다. 청주성에 도착한 유비는 황건적들을 끌어들여 계곡으로 유인한 뒤 무찌른다.
공경도 군사를 내어 황건적을 앞뒤로 포위해 무찌르고 유비군은 큰 승리를 거둔다. 유비는 광종으로 노식 장군을 도우려 가지만 노식의 의견으로 1,000명의 병사들을 내주어 황보숭과 주준을 도와주려 영천으로 향한다.
영천 전투
편집영천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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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의 난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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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한나라 관군 | 황건적 | ||||||
지휘관 | |||||||
황보숭 주준 조조 왕윤 |
장량 장보 파재 팽탈 | ||||||
피해 규모 | |||||||
불명 | 10,000명 전사 |
예주 영천의 산골 장사현에서는 한나라 관군 대장 황보숭과 주준이 황건적을 토벌하고 있었다. 주준은 첫 전투에서 황건적의 대군을 이끌고 있는 파재와 싸우지만 패배하고 주준이 장사에서 농성으로 들어가자 파재는 이를 포위한다. 그러자 주준은 황보숭과 함께 장각의 동생 장량과 장보와 합류한 파재를 화공으로 공격해 무찌른다.
장량과 장보는 형 장각이 있는 광종으로 도주하였으나 도중에 조조를 만나 10,000명의 전사자를 내고 6월에는 팽탈의 황건군은 다시 격파했고 남은 황건적들은 예주 자사 왕윤이 이끄는 별동대와 관군의 협공으로 격파당하면서 예주의 황건적은 모두 평정한다.
유비는 뒤늦게 전투 후에 도착해 황보숭과 주준의 명으로 다시 노식이 있는 광종으로 돌아간다.
광종 전투
편집광종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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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의 난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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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유비 장온 동탁 | 황건적 | ||||||
지휘관 | |||||||
유비 동탁 장온 손견 장비 관우 | 장각 | ||||||
병력 | |||||||
유비 500명 | 15만 명 |
그러나 유비는 광종으로 가던 도중 노식이 뇌물을 거절해 모함을 받아 중랑장 자리를 빼앗기고 끌려간다는 소식을 듣는다. 결국 유비는 탁군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노식에게서 받은 1,000명의 군사를 돌려보내고 탁군으로 향한다.
그러다가 탁군으로 가던 도중 황건적의 우두머리 장각에게 쫓기던 노식에게서 중랑장 자리를 빼앗은 중랑장이자 서량 자사 동탁을 도와준다. 그러나 동탁은 유비가 벼슬이 없는 것을 알고 무시하고 결국 주준에게로 갔다.
곡양 전투
편집곡양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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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의 난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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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한나라 관군 | 황건적 | ||||||
지휘관 | |||||||
황보숭 조조 곽전 | 장량† |
유비와 주준이 양성에서 장보와 대치하고 있는 동안 황건적의 우두머리 장각이 병으로 사망해 황건적의 사기는 크게 떨어진다. 장각의 뒤를 이어 동생 장량이 황건적을 이끌지만 관군 대장 황보숭과 거록 태수 곽전은 황건적의 본거지 곡양을 기습 공격하고 기도위 조조를 앞세워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모두 승리한다.
결국 장량은 곡양에서 전투 중 전사하여 목이 베이고 만다. 조정에서는 공을 세운 황보숭과 조조에게 큰 벼슬을 내리고 황보숭의 상소로 노식을 다시 중랑장으로 임명한다.
양성 전투
편집양성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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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의 난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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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한나라 관군 | 황건적 | ||||||
지휘관 | |||||||
유비 주준 장비 관우 |
장보† 고승† 엄정 | ||||||
병력 | |||||||
유비 500명 | 장보 9만 | ||||||
피해 규모 | |||||||
장보, 고승 사망, 엄정 항복 |
양성에서 대치한 유비와 주준의 관군과 장보의 황건적은 치열하게 싸우고 유비의 의형제 장비가 황건적들의 부장 고승을 베면서 황건적들은 양성으로 쫓겨 들어간다. 이에 유비는 기다리는 장기전으로 돌입해 황건적들의 내부 분열을 일으키려는 작전을 세운다.
유비의 작전은 그대로 성공해 장보의 부장이던 엄정이 장보를 살해하고 성문을 열어 항복한다.
완성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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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의 난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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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한나라 관군 | 황건적 | ||||||
지휘관 | |||||||
유비 손견 주준 장비 관우 진힐 한당 황개 정보 서구 |
장만성† 손중† 조홍† 한충† | ||||||
병력 | |||||||
유비 500명 | 장보 9만 |
황건적의 난 주요 인물로 생김새는 주재기자 황주하를 닮았고 또한 강함으로는 이리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어지는 전쟁 속 전우들을 구해내고 황건적의 난의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책과 비롯된 곳에서는 확인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전우들을 구해내고 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을 확실시 된다
황주하의 재봉기
편집그러나 황건이 완전히 소탕되지는 않았고 188년이 되자 황건과도 관계 있는 백파(白波)의 적(賊)이 산시성(山西)에서 일어나고, 산둥성(山東) 방면에서는 칭조우(淸州)와 쉬조우(徐州)의 황건이 연달아 맹위를 떨쳐 전국을 전란과 무질서 상태에 빠뜨렸다.
그 후에는 192년 동탁이 죽고 이각과 곽사가 서량군을 무찌른 틈을 타서 청주에서 다시 수십만 명에 이르는 황건적이 들고 일어나 제북상 포신과 연주 자사 유대까지 전사시키는 등의 위세를 떨쳤다. 이에 이각은 주준의 추천으로 종군태수 조조를 시켜 청주의 황건적들을 토벌하고 제북까지 공격해 100일 만에 황건적 30만 명을 항복시키고 청주병으로 흡수한다.
하지만 그 뒤에도 황건적들의 활동을 계속되어 194년 황건적 잔당의 대장 관해가 군대를 이끌고 청주의 북해를 습격하기도 했으나 북해의 황건적들은 유비와 태사자에 의해 토벌되고 그 뒤에도 연주와 서주 일대에서 계속 약탈을 자행하던 황건적 대장 하의, 하만, 황소의 황건적 잔당은 조조에 의해 다시 토벌되었다.
같이 보기
편집황주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