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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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9월]] [[러일전쟁]]에 참군하기 위해 [[일본군]] 기병 제8연대에 편입, 훈련을 수료하고 그해 [[10월]] [[오사카]](大阪)을 출발하여 [[청나라]] [[만주]]의 유수(柳樹)에 상륙, 유수지 전투에 참전하였다. [[1905년]] [[1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칙령으로 귀국을 명받고, 전쟁 중 출발 [[1월]]말 [[오사카]]로 갔다가 [[도쿄]]를 경유하여 [[2월]] [[경성]]으로 귀환하였다. 귀국 중이던 [[2월 14일]] 현지에서 일본특파대사 수원에 임명되었고, [[1905년]] 귀국 길에 6품(6品) 승훈랑(承訓郞)에 서임되었다.
 
귀환 직후 [[1905년]](광무 8년) [[2월 21일]] 시위대대부(待衛大隊附) 겸 시위기병대(待衛騎兵隊) 교관이 되었다가 [[3월]] 육군 참위(陸軍參尉)로 주[[일본]] 특파 대사(日本特派大使) [[의양군]]의 수행원으로 [[도쿄]]에 다녀왔다. 일본 체류 중 참위(參尉) 3계급 특진, 곧바로 참령(參領)에 임명되었으나 군 기강이 어지러워질 것을 우려하여 스스로 고사하였다. 동 [[3월]] 말, 바로 육군 기병 부위(騎兵副尉)로 임명되었다. [[4월]]에 귀국했다가 [[10월 12일]] 면직되었다. 같은 날 [[기병]][[정위 (관직)|정위]](騎兵正尉)로 승진, 군무부 군무국 기병과원이 되었다가 기병과장이 되었다.
 
[[1905년]] [[10월]] [[을사 보호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그는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데 동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1월]] 기병과장에서 육군 기병독립대대장(騎兵獨立大隊長)이 되었다. [[12월 5일]] 군부 군무국 기병과장 직에서 면직되고 육군 기병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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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 조약 이후 ===
{{참고|을사 보호 조약|한일합방}}
이후 [[대한제국]] [[군부 (대한제국)|군부]] 교육과장<ref>정운현,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새로 밝혀 쓰는 친일인물사》 (개마고원, 1999) 160페이지 </ref> 을 거쳐 [[1906년]](광무 9년) [[1월 13일]] 육군 기병 참령(陸軍騎兵參領)이 되었다.1906년 [[1월]] [[일본]]국 사절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친왕]](伏見宮 若字博恭親王) 일행 파견에 대한 답례로 [[대한제국]]에서도 사절이 파견되자, 윤치성은 육군 정위(正尉)로 일본에 파견되는 대사 [[완순군 이재완]](完順君 李載完)의 수행원의 한사람이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2월]] [[일본]] 체류 중 기병[[참령]](騎兵參領)으로 승진하고, [[3월]] 말 귀국하였다. [[1906년]] [[7월 20일]] 면직되고 같은 날 군부 참모국 제1과장(軍部參謀局第一課長)이 되었다가, [[10월 18일]] 군부 참모국 부국장이 되어 제1과장을 겸직하고, [[육군]] 기병[[부령]](陸軍騎兵副領) 흔3등에 임명되었다.
 
[[1907년]](광무 10년) [[4월]] 기자릉(箕子陵)의 석물(石物)과 정자각(丁字閣)을 개수하는데 감독관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6품에서 5품관으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4월 30일]] 다시 정삼품 [[통정대부]]로 승자하였다. [[6월 8일]] 참모국 부국장 겸 제1과장직에서 면직되고 [[대한제국 고종|고종황제]]의 배종무관부 [[배종무관]](陪從武官府陪從武官)에 임명되었다. [[8월 24일]] [[대한제국 고종|고종황제]]의 시종무관부 [[시종무관]](侍從武官部侍從武官)을 지냈고, 육군 [[기병]] 부장으로 승진했으며 뒤에 [[중장]]까지 승진했다. [[9월 9일]] 훈4등(勳四等)에 서임되고 태극장을 수여받았다. [[1907년]] [[김좌진]]. [[노백린]]이 상경하자 이들과 함께 조직적으로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대한협회]]지부(大韓協會支部)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또한 그는 황실에 숨겨져 있던 금괴 8상자를 빼돌려 대한협회의 군자금으로 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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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복 동생 : 윤치일(尹致日, [[1935년]] [[2월 10일]] ~ [[1985년]] [[4월 8일]])
** 이복 제수 : 김정숙(金貞淑, 김해김씨, [[1938년]] [[3월 10일]] ~ ), 김계준(金溪俊)의 딸
 
* 부인 : 전주이씨([[1875년]] [[9월 16일]] - [[1906년]] [[12월 18일]]), 1남 1녀
** 첫째 아들 : 윤준선(尹俊善, [[1906년]] [[10월 23일]] ~ [[2000년]] [[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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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며느리 : 유진팔<ref name="dd635">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편 번역, 역사비평사, 2001) 635페이지</ref>, 兪鎭八, [[1928년]] [[11월 25일]] ~ [[1996년]], 유치두(兪致斗)의 딸
** 셋째 아들 : [[윤호선]](尹豪善, [[1914년]] [[3월 21일]] ~ [[1982년]] [[2월 2일]], 언론인, [[상공신문사]] 사장 역임)
** 셋째 며느리 : 정영래(<ref name="dd635"/> 鄭榮來, [[1923년]] [[3월 18일]] ~ )
*** 손녀 : 윤도운(윤대경, 화가)
** 둘째 딸 : 윤현경([[1915년]] [[6월 2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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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째 딸 : 윤희경([[1924년]] [[7월 2일]] - )
** 넷째 사위 : 황창욱, [[대한중석]] 사장 역임
 
* 외할아버지 : [[한치원]](韓致元, [[1821년]] ~ [[1881년]], 호는 동랑(冬郎), [[부호군]] 역임)
 
* 사돈 : [[남궁억]](南宮檍, [[1863년]] [[12월 27일]] ~ [[1939년]] [[4월 5일]]) - 5촌 조카 윤광선의 장인
* 사돈 : 민영철(閔泳喆, [[1864년]] ~ [[1912년]]) - 형 [[윤치오]]의 딸 [[윤시선]]의 시아버지이자 형 [[윤치소]]의 아들 [[윤보선]]의 장인, [[민영환]]의 6촌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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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
[[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
[[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
[[분류: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