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송 효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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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Xiaozong.jpg|섬네일|남송 효종]]
'''송 효종'''(宋 孝宗, [[1127년]] ~ [[1194년]])은 [[남송]] 2대 황제(재위 : [[1162년]] ~ [[1189년]]). [[휘]]는 '''신'''(昚)이고 자는 원괴(元瑰), 원수(元永)이며, 초휘는 백종(伯琮)이다. 다른 휘로는 원(瑗), 위(瑋)가 있다.
== 생애 ==
수안희왕(秀安僖王) [[조자칭]](趙子偁)의 아들로, [[북송 태조]] 조광윤의 차남 [[조덕방]](趙德芳)의 6세손이다. [[남송 고종|고종]]의 양자로 들어가 즉위하였다. [[진회]]의 사후 [[금나라]]의 4대 황제 [[해릉왕]]이 침공을 개시했다. 금나라군은 대군이었으나, 해릉왕은 권력확립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살해했기 때문에 금나라의 황족 중 한 사람인 완안옹(完顏雍)이 해릉왕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금나라의 유력자들은 속속 완안옹의 곁으로 모이게 되었고, 해릉왕은 군중에서 살해되었다. 완안옹은 금나라의 5대 황제 [[금 세종|세종]]이 되어 송나라와 화평을 맺었다. 같은 해 고종은 퇴위하여 태상황이 되고, 양자인 조신이 즉위하여 효종이 되었다. 금의 세종, 남송의 효종은 각자가 속한 왕조에서 가장 최고의 명군으로 불렸던 인물들이었는데, 우연하게도 동시대에 2명의 명군이 남쪽과 북쪽에 나타나게 되어 평화가 찾아오게 되었다.
효종은 본래 성격이 강하고 용맹했으며 끊임없이 금나라 정벌을 꿈꾸는 인물이었다.<ref>청위, 장허성, 《중국을 말한다 11》, 이원길 역, 신원문화사, 2008, p.232, {{ISBN|978-89-359-1450-0}}</ref> 그는 금과의 화친을 주장한 [[
효종은 자신을 닮은 셋째아들 조돈(趙惇)을 총애하였는데 병약했던 장남 장문태자가 요절하자 차남인 위혜헌왕을 뛰어넘어 조돈을 태자로 삼았다.<ref name="china11">청위, 장허성, p.273</ref> 그로부터 17년 뒤인 [[1189년]] 효종은 퇴위하여 상황이 되었고, 조돈은 즉위하여 [[남송 광종|광종]]이 되었다. 효종은 거처를 고종이 지내던 덕수궁으로 옮겨 이름을 중화궁으로 고쳤다.<ref>청위, 장허성, p.247</ref> 효종은 동생에게 제위를 빼앗기고 외지에서 홧병이 나 죽은 둘째아들을 가엾게 여겨 그 아들을 태자로 삼고 싶어했는데 이로 인해 부자지간이 틀어지게 되었다.<ref name="china11"/> 광종은 점차 효종의 거처인 중화궁에 문안을 오지 않게 되었고 효종은 아들을 그리워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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