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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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들어 로마 제국이 급격히 쇠퇴하고, 410년에는 브리타니아 점령도 종말을 고했다. 이에 따라 로마인이 지은 도시도 빠르게 쇠퇴하였으며 5세기 말이 되면서부터는 사실상 폐허로 남았다.
 
===앵글로색슨족 시대 (5세기 ~ 1066년)===
로마인들이 떠난 자리에는 [[앵글로색슨족]]이 들어왔다. 처음에 이들은 론디니움 주변을 피하여 마을을 세워 정착하였다는 것이 그간의 통설이었다. 하지만 2008년 [[코번트 가든]]에서 앵글로색슨족의 무덤이 발굴되어, 일찍이 6세기에서 5세기경부터 이주민이 론디니움 내에 정착하기 시작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앵글로색슨 마을은 런던 성벽 외부 일대를 중심으로 위치해 있었으며 서쪽으로 짤막한 골목을 따라 모여 있었는데, 이곳은 오늘날 [[올디치]] (Aldwych)와 [[트라팔가 광장]] 사이에 위치한 [[스트랜드 (런던)|스트랜드]] 일대에 해당된다. 마을의 이름은 '룬덴윅' (Lundenwic)으로, '윅' (-wic)이란 접미사를 통해 교역이 이뤄지던 마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중점적으로 밝혀진 사실은, 초창기 앵글로색슨 시대의 런던은 인구밀도가 높고 비교적 잘 짜여진 도시체계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런던은 바둑판 형태의 구획으로 된 도시였으며 만 명에서 만 이천명에 달하는 시민을 수용할 정도로 성장하였다고 한다.
 
초창기 앵글로색슨 시대 런던을 다스렸던 부족은 [[미들색슨족]]이었으며, 여기서 바로 잉글랜드의 지방인 [[미들섹스]]란 지명이 유래하였다. 다만 미들색슨족은 이름과는 달리 지금의 [[허트퍼드셔]]와 [[서리주|서리]] 일대를 지배한 것으로 보인다. 7세기 초로 넘어오면서 런던 일대는 [[에식스 왕국|이스트색슨]] 왕국에 병합되었다. [[604년]] 에식스의 왕이었던 [[에식스의 새베르흐트|새베르흐트]] (Saeberht)가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멜리투스]] (Mellitus)가 로마 이후 최초의 런던 주교로 서임되었다. 당시 에식스 왕국은 [[켄트의 애델베르흐트]] 왕이 대군주로 군림하고 있었으며, 멜리투스는 애델베르흐트의 후원으로 최초의 [[세인트 폴 대성당]]을 건립하였다. 예로부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이때 세워진 세인트 폴 대성당의 위치는 옛 로마의 다이아나 신전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크리스토퍼 렌]]은 이를 뒷받침할 근거가 없다고 보았다). 다만 지금의 위상과는 달리 처음에는 그리 대단한 성당은 아니었으며, 새베르흐트의 후계 왕이 이교도였던 탓에 엘리투스가 런던시에서 추방된 뒤로 파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스트색슨 왕국이 기독교를 완전히 받아들인 것은 650년경 [[시게베르흐트 2세]] 치세에 들어서였다. 8세기부터는 [[머시아 왕국]]이 잉글랜드 동남부로 지배력을 넓히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대군주 형식으로 다스리다 완전 병합으로 바뀌게 되었다. 런던 일대가 머시아 왕국의 직접 통치에 들어간 것은 730년경으로 보인다.
 
[[File:Alfred the Great silver coin.jpg|thumb|upright|left|알프레드 대왕이 새겨진 은화. '앨프레드 왕' (ÆLFRED REX)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File:Statue d'Alfred le Grand à Winchester.jpg|thumb|upright=0.9|[[윈체스터]]의 [[알프레드 대왕]] 동상 (1899년).]]
 
9세기부터는 [[바이킹족]]의 침략이 끊이질 않았으며 830년경 이후로 조금씩 잦아지게 되었다. 런던 역시 [[842년]]과 [[851년]] 두 차례에 걸쳐 약탈당했다. 865년부터 잉글랜드 전역을 휩쓸고 다니기 시작한 [[덴마크]]의 '[[이교도 대군세]]'는 871년 런던에서 겨울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후 덴마크의 영토로 남아있던 런던은 886년 [[웨식스]]의 [[알프레드 대왕]]이 이끄는 군대가 점령하여 머시아 왕국으로 재편입되었고, 알프레드 대왕 치세에는 그의 사위이자 [[올더먼]]이었던 [[에텔레드]] (Æthelred)가 다스리게 되었다.
 
이 즈음부터는 방어를 목적으로 마을의 중심지가 옛 로마 성벽 안쪽으로 옮겨가게 되었으며, 이름도 '룬덴부르' (Lundenburh)로 바뀌었다. 로마 성벽은 보수를 거쳤고 방어용 해자도 다시 팠으며, 런던교 역시 이때 다시 지은 것으로 보인다. 템스강 건너 남쪽의 [[서더크]] 일대에는 요새를 갖춘 또 하나의 [[버러|마을]]이 들어섰는데 그 이름은 '수트링가 게워르크' (Suthringa Geworc {{해석|[[서리]]인의 보루}})였다. 한편 옛 룬덴윅 마을은 '엘드윅' (Ealdwic {{해석|옛 마을}})로 불리게 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올디치]]' (Aldwich)란 지명으로 남게 되었다.
 
이때부터 런던시는 고유의 지방 정부를 발달시키게 되었다. 911년 에텔레드가 사망하자 런던 일대는 [[웨식스 왕국]]의 영토로 넘어갔고 ,918년 웨식스는 머시아의 남은 영토를 모두 병합하였다. 런던은 예로부터 웨식스의 중심지였던 [[윈체스터]]와 통일 [[잉글랜드 왕국]]의 정치적 우위 면에서 경쟁 상대로 직면하게 되었으나, 도시의 규모와 상업적 부가 크다는 이점 덕에 정치활동의 집중에 있어서도 그 중요도를 꾸준히 높여가게 되었다. 예컨대 [[애설스탠]] 왕은 런던에서 위탄 회의를 여러 차례 열어 법령을 제정하였으며, [[애델레드 2세]]는 978년 런던에서 '런던법'을 반포하기도 하였다.
 
에델레드 왕 치세에 바이킹족의 침략이 다시 시작되면서, 런던도 994년 덴마크의 [[스베인 튜구스케그]] 왕이 군대를 끌고 침공해 들어왔으나 승리하였다. 덴마크의 계속되는 공세로 1013년 잉글랜드 측의 항전이 마침내 무너졌을 당시, 런던은 데인족의 공격을 격퇴하고 나머지 지역이 스베인 왕에게 굴복할 때까지도 항복하지 않은 최후의 보루로 남았다. 하지만 결국 잉글랜드가 항복한 그해 말 똑같이 항복을 선언하고, 에델레드 왕은 해외로 피신하게 되었다. 스베인 왕은 잉글랜드 국왕에 즉위한 지 5주만에 세상을 떠났고 에델레드 왕이 돌아와 다시 국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스베인 왕의 아들인 [[크누트 대왕]]이 1015년 잉글랜드 공격을 다시 감행하게 되었다.
 
1016년 애델레드왕이 런던에서 사망하자 그의 아들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가 [[위탄게모트]]에 의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병력을 모으기 위해 웨식스로 떠났다. 런던은 크누트가 이끄는 군대의 체계적인 공성전에 무릎을 꿇었으나 곧 에드먼드 왕의 군대가 진격해 해방되었다. 에드먼드왕이 다시금 병력 충원을 위해 웨식스로 떠나자 데인족은 공세를 재개하였지만 또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허나 에드먼드왕이 [[아산둔 전투]] (Battle of Assandun)에서 패하면서 런던을 비롯한 템스강 이북의 잉글랜드 전 영토를 크누트왕에게 할양하였고, 그로부터 몇 주 뒤에 사망하면서 크누트 대왕은 잉글랜드 전역을 다스리게 되었다.
 
애델레드왕이 데인족의 차지가 된 런던으로 귀환했을 당시 벌어졌던 전투를 다룬 노르웨이 서사시가 하나 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데인족 병사들이 [[런던교]]에 줄지어 서있었고, 잉글랜드군을 향해 던지는 창이 비오듯 쏟아졌다 한다. 그 기세에 움찔한 잉글랜드군은 근처 민가의 지붕들을 끌어와 전함 위에 갖다 씌워 머리를 보호하였다. 그렇게 해서 다리 근처까지 접근할 수 있게 된 잉글랜드군은 교각에 줄을 묶은 뒤 잡아당겨 다리를 무너뜨렸고, 런던을 탈환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1014년 스베인 왕의 죽음 이후 에델레드가 왕으로 복귀한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 그 당시에 런던을 빼앗기 위해 그런 고투를 벌였다는 마땅한 증거는 없다.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