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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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위생적인데다 인구 과밀 상태였던 런던시는 수백년에 걸쳐 수많은 전염병이 휩쓸고 갔지만, 영국인들이 기억하는 마지막 대규모 역병은 1665년부터 1666년까지 발생했던 '[[런던 대역병]]'으로, 런던시 인구의 5분의 1에 달하는 6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새뮤얼 페피스]]는 자신의 일기에 이 당시 역병에 대해서 기록한 바 있다. 1665년 9월 4일자 일기에서는 "도시를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일주일에 칠천 사백명이 죽었는데 그 중에서 병으로 사망하는 자가 육천 명에 달했다. 낮이고 밤이고 종소리만 울릴 뿐 조용하였다"고 적었다.<ref>{{서적 인용|author=Peter Hampson Ditchfield|title=Memorials of Old London|url=https://books.google.com/books?id=XW4LAAAAYAAJ&pg=PA76|year=1908|page=76}}</ref><ref>Walter George Bell, ''The Great Plague in London'' (Bracken Books, 1995).</ref>
 
====런던 대화재 (1666년)====
{{본문|런던 대화재}}
대역병이 휩쓸고 간 런던시에 또다른 대재앙이 닥치고 말았는데, 바로 [[런던 대화재]]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런던 대화재는 역병 해소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1666년 9월 2일 일요일 새벽 1시, 런던시 남부의 [[푸딩 레인]]에 있던 한 빵집에서 시작된 불은 동풍을 타고 주변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주택을 부수어 불길을 잡으려는 화재 진압 노력은 시작부터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이틀간 타오르던 불은 화요일 밤에 바람이 다소 잦아들면서 수요일부터 누그러들게 되었고, 목요일에는 어느정도 불길이 잡히는 듯 보였으나, 같은날 저녁 [[템플]] 일대에서 불길이 다시 치솟았다. 화약을 써서 일부 가옥을 한번에 터뜨려 철거하는 방법까지 동원된 끝에 화재가 완전히 진압될 수 있었다. 이 화재를 기리기 위해 [[런던 대화재 기념비|기념비]]가 조성되었는데, 기념비 명문에는 화재의 원인이 '가톨릭교도의 광란' (Popish frenzy) 탓이라는 문구가 약 150여년간 새겨져 있었다.<ref>Peter Ackroyd, ''The great fire of London'' (U of Chicago Press, 1988)</ref>
 
[[File:John Evelyn's plan for the rebuilding of London after the Great Fire.JPG|thumb|350px|대화재 이후 [[존 이블린]]의 런던시 재건 계획안]]
이 화재로 도시의 60%에 달하는 면적이 불에 탔다. [[옛 세인트 폴 대성당]]과 [[교구 교회]] 87곳, [[동업조합]]소 44곳에 [[런던 왕립거래소|왕립거래소]]도 소실되었다. 그러나 인명피해는 놀라울 정도로 적었는데, 최대 16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화재 이후 며칠간 런던시의 재건 계획에 관한 세 가지 방안이 국왕 앞에 바쳐졌는데, 각각 [[크리스토퍼 렌]], [[존 이블린]], [[로버트 후크]]의 것이었다.<ref>Thomas Fiddian Reddaway, ''The rebuilding of London after the great fire'' (Arnold, 1951).</ref>
 
크리스토퍼 렌의 청사진을 보면, 런던의 남북축과 동서축 방면으로 큰 대로를 내고, 모든 교회를 눈에 잘 띄는 위치로 각각 떨어뜨려 이전하며, 왠만한 공공장소는 드넓은 광장으로 바꾸고, 기존에 따로 세워진 대표 동업조합소 12곳을 [[길드홀]]에 딸린 하나의 일반 광장으로 통합할 것이며, [[블렉프리어스]]에서 [[런던탑]]에 이르는 템스 강변에 좋은 부두를 세운다고 되어 있었다. 렌은 새 도로를 낼 때 직선으로 곧게 내고, 그 도로의 폭도 30피트, 60피트, 90피트의 세가지 규격에 맞추도록 정하고자 하였다. 존 이블린의 계획에는 [[세인트 던스탠인더이스트 교회]]에서 세인트 폴 대성당까지 동서로 거리를 내는 방안과, 강변을 따라서 부두나 연립주택을 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렌의 계획안과는 사뭇 달랐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제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재건이 이뤄진 런던시는 옛 도로망을 고스란히 따르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대다수의 도로가 살아남게 됐다.
 
[[File:London - Richard Blome's map of 1673.JPG|thumb|350px|[[리처드 블롬]]의 런던시 지도 (1673년). 웨스트엔드 지역의 개발작업이 속도를 내기 시작한 시점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신도시 런던은 옛 모습과는 달랐다. 귀족층 시민들은 원래 살던 동네 대신에 웨스트엔드에 새로 집을 지어 사는 쪽을 택했다. 이곳에 새로 조성된 [[세인트제임스]]와 같은 상류층 거주구역은 왕실 소유 궁전과 가깝게 지어져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 자리에 [[화이트홀 궁전]]이 있었다가 1690년대에 화재로 소실된 뒤로는 [[세인트제임스 궁전]]이 들어서게 됐다. [[피카딜리]] 시골길을 따라서는 [[버링턴 하우스]]를 비롯한 조정 신하들 소유의 저택이 하나둘씩 세워졌다. 그리하여 중산층 상업인구가 많은 [[시티오브런던]] 지역과, 궁정계 귀족이 대다수인 [[웨스트민스터 궁전|웨스트민스터]] 지역의 분리가 이뤄지게 되었다.<ref>Timothy Baker, ''London: rebuilding the city after the great fire'' (Phillimore & Company, 2000)</ref>
 
한편 런던시에서는 목재로 된 건물의 자재를 석재와 벽돌로 대체하여 화재의 위험을 줄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의회에서 제정된 [[1666년 런던 재건법]]에서는 "벽돌 시공은 단정하고 튼튼할 뿐만 아니라, 차후 화재의 위험으로부터도 안전하다"고 적혀 있다. 이 당시부터 목재로 지을 수 있는 건축 요소는 문틀과 창틀, 가게 앞면 정도만 남게 되었다.<ref>{{cite book|author1=Thomas Robert Way|author2=Henry Benjamin Wheatley|title=Reliques of Old London|url=https://books.google.com/books?id=vjZAAAAAYAAJ&pg=PA10|year=1896|page=10}}</ref>
 
크리스토퍼 렌은 비록 자신이 내세웠던 신 런던 구상안이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소실된 교구 교회와 세인트 폴 대성당을 다시 세우라는 명을 받게 되었다. 그의 손을 거쳐 새롭게 탄생한 [[세인트 폴 대성당]]은 [[바로크]] 양식의 돔 성당으로서, 완공 이후 150여년 간 런던을 대표하는 데 있어 제일가는 명소로 남게 되었다. 또한 [[로버트 후크]]는 도시 검사관으로서 런던 시내 주택가의 재건 과정을 두루 살피기도 하였다. 한편 대화재 이후 수십년간 [[런던 월]] 동쪽에 인접해 있던 [[이스트엔드]] 구역도 인구 밀집 지역으로 거듭나게 됐다. 런던의 각 부두는 하류 쪽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하였으며, 수많은 노동자를 끌어모아 부두시설 그 자체는 물론 가공무역과 유통무역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들은 [[화이트채플]], [[웨핑]], [[스테프니]], [[라임하우스]] 등지에서 빈민가 환경을 이루며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ref>Michael Alan Ralph Cooper, ''A More Beautiful City: Robert Hooke and the Rebuilding of London After the Great Fire'' (Sutton Pub Limited, 2003)</ref>
 
1683년~1684년 겨울에는 매서운 추위로 템스강이 결빙되면서 그 위에서 시민들이 장날을 여는, 이른바 '[[템스 프로스트 페어|프로스트 페어]]' (frost fair)가 열렸다. 이 해 템스강의 결빙 기간은 크리스마스 7주 전, 크리스마스 6주 후까지로 역사상 가장 길었던 결빙기로 남아 있다. 1685년에는 [[퐁텐블로 칙령|낭트 칙령]] 폐지로 프랑스 [[위그노]] 신자들이 런던으로 대거 이주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들은 [[스파이탈필드]]에서 실크 산업을 개척하였다.<ref>{{cite book|author=William Andrews|title=Famous Frosts and Frost Fairs in Great Britain: Chronicled from the Earliest to the Present Time|url=https://books.google.com/books?id=Y70TAAAAYAAJ&pg=PA16|year=1887|publisher=G. Redway|pages=16–17}}</ref>
 
이 때를 즈음하여 [[잉글랜드 은행]]이 설립되고, 영국 동인도 회사는 그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런던로이즈]] 사 역시 17세기 말부터 영업에 들어갔다. 1700년 당시 런던은 잉글랜드 전체 상품 수입량 중 80%를, 수출량 중 69%를, 재수출량 중 86%를 담당하고 있었다. 상품 대다수는 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건너온 비단, 설탕, 차, 담배 따위의 사치품이었다. 이 중에서 유독 높았던 재수출품 물량은 런던이 [[중개무역]] 도시로서의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확인케 한다. 17세기 당시 수많은 상공인이 활동하고 있었고 나중에는 대규모 공장까지 들어서게 되었지만, 정작 런던의 경제적 특성은 산업적 기반에 우선하여 이룬 것이 아니라, 훌륭한 무역 유통 중심지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부쩍 우세해진 잉글랜드 상선들이 물품을 런던으로 운송했던 것은 국내 수요를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유럽과 그 너머의 지역으로 재수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ref>{{cite book|author=Miles Ogborn|title=Spaces of Modernity: London's Geographies, 1680-1780|url=https://books.google.com/books?id=tCp_X-AUQ6MC&pg=PA206|year=1998|publisher=Guilford Press|page=206}}</ref>
 
네덜란드 출신이었던 [[윌리엄 3세 (잉글랜드)|윌리엄 3세]]는 런던에 별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도시에서 내뿜는 매연 때문에 천식에 시달렸다. 1691년 화이트홀 궁전에 처음으로 화재가 난 이후로는 노팅엄 저택을 사들여서 [[켄징턴 궁전]]으로 탈바꿈시켰다. 당시 켄징턴 지역은 그리 별 볼 일 없는 동네였으나 왕실 건물이 이전해온 뒤로 그 중요도는 상승하게 되엇다. 켄징턴 궁전은 이후 국왕들 사이에서는 그다지 사랑받지 못했지만, 궁전을 지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런던시의 영역은 한발짝 넓어진 셈이 되었다. 한편으로 윌리엄 3세 재위 당시 런던시 경계선 밖에 자리잡았으나 지금은 완전히 런던시 내에 위치한 [[그리니치 병원]]이 영업에 들어갔다. 이곳은 퇴역 군인들을 위해 지난 1681년 지어진 [[첼시 병원]]만으로는 모자라게 되자 해군 전용으로 세워진 병원이기도 했다. [[앤 (영국)|앤 여왕]] 치세에는 런던시 외곽에 거주하는 시민이 크게 늘어나자 이들을 위한 새로운 교회 50곳을 짓도록 허가하는 법령이 통과되었다.<ref>Jason R. Ali and Peter Cunich. "The Church East and West: Orienting the Queen Anne Churches, 1711-34." ''The Journal of the Society of Architectural Historians'' (2005): 56-73. [https://www.jstor.org/stable/25068124 In JSTOR]</ref>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