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내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비판과 반론: 항목 정리
May2030 (토론 | 기여)
항목 다시 수정.
100번째 줄:
 
== 비판과 반론 ==
윤내현의 고조선 관련 연구 및 그의 대표적인 저서 《[[고조선 연구]]》는 [[북한]]의 [[역사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1963)를 표절했다는 비판을 받았다.<ref>이형구, 〈리지린과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비교〉, 《역사학보》 146호, 1995 / [[서영수 (1949년)]], 〈요동군의 설치와 전개〉 p22,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ref>
윤내현의 고조선 관련 연구 및 그의 대표적인 저서 《[[고조선 연구]]》는 [[북한]]의 [[역사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1963)를 표절했다는 비판을 받았다.<ref>이형구, 〈리지린과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비교〉, 《역사학보》 146호, 1995 / [[서영수 (1949년)]], 〈요동군의 설치와 전개〉 p22,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ref> 이형구의 증언에 따르면 84년 당시 학술세미나에서 윤내현은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와 유사하다는 지적이 있자, 자신이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등 북한 자료를 미국의 대학도서관에서 입수했음을 시인하면서도, 85년 11월 "주를 달면 자신의 학설이 무너진다" 는 말을 남기고 이미 지급된 연구비를 반납하고 자신의 글을 거두어 갔다. 한편 윤내현은 《한국고대사신론》에서 "필자는 민족사학자들의 견해를 수용 · 보완한 북한 학자들의 연구 업적과 그들이 발굴한 자료도 활용하게 될 것이지만 그것을 일일이 주기하지 않을 것이며 대표적인 문헌 몇 권만을 소개하는데 그칠 것이다. 이 점은 분단시대에 있어서 한국 역사학계가 겪고 있는 고통이므로 독자들의 이해 있기를 바란다."라고 언급했던 일이 있는데,<ref>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 일지사, 1986, p.14</ref> 이에 대해서 이형구는 "민족사학자들의 견해를 수용·보완한 북한 학자의 연구 업적과 발굴 자료를 많이 활용하면서도 이에 대한 설명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민족사학자들은 약간의 견해를 피력했을 뿐이지 리지린과 같은 본격적인 연구는 없었다. 또 분단시대의 한국 역사학계가 겪고 있는 고통 때문에 주기를 일일이 달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다른 학자들은 북한의 학술 성과를 주기로 소개한단 말인가? 그리고 역사학계만이 마치 그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여 일반 독자들의 눈을 가리고 있다. 분단상황은 민족 모두의 고통이지 역사학계만 안고 있는 고통이 아니다. 북한의 자료가 제대로 입수되지 못하고 또 입수하기 어려운 상황이 고통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입수하고 검토하여 활용한 자료를 유독 밝히지 않고 넘어가겠다는 것은 분단상황의 고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자신의 주장에 영향을 주고 참고로 삼은 타인의 연구 업적을 밝힐 용기가 없으면 글을 발표하지 않는 것이 바른 태도이다."라고 비판하였다.
 
윤내현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정보부의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북한 학설을 유포하여 학계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졸지에 북한 공산주의를 추종한다고 매도당했다.<ref>윤내현,《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 2003, p.227. </ref>
이런 비판에 대해 윤내현은 이러한 조치가 학자의 양심을 저해한 행위가 아니며 자신의 연구 결과에 따른 것이라 주장했으며<ref>「고조선의 강역」해석싸고 표절 논쟁 재연 경향신문 6면 생활/문화 기사(뉴스, 1986.04.23) 참조</ref> “나의 주장은 [[신채호]]·[[정인보]]·[[장도빈]] 등의 ‘민족사학자’들이 주장해왔던 기존 학설과 궤를 같이하고 있을 뿐 표절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라고 입장을 표명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6042300329206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4-23&officeId=00032&pageNo=6&printNo=12483&publishType=00020|제목=「古朝鮮(고조선)의 疆域(강역)」해석싸고 표절 論爭(논쟁) 재연|언어=한국어|성명=이용(李傭)기자|날짜=1986-04-23|출판사=경향신문(네이버)|확인날짜=2012-07-03}}</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539985|제목="고구려 태동 현도군과 관계없어"|언어=한국어|성명=김태식 기자|날짜=2007-02-06|출판사=연합뉴스(네이버)|확인날짜=2012-07-03}}</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1&aid=0000166612|제목=오후여담, 역사 vs 역사|언어=한국어|성명=김성호/객원논설위원|날짜=2006-10-04|출판사=문화일보(네이버)|확인날짜=2012-07-03}}</ref> 연구비와 관련된 비판에 대해서도 일체 외부기관으로부터 연구비를 받은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ref>《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 2003, p.229.</ref>
이와는 반대로 독재정권에 발맞추어 도움을 준 것처럼 헛소문이 퍼지기도 했다.<ref>《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 2003, p.229.</ref>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윤내현이 재직하던 단국대학교의 당시 총장에게 학교에서 쫓아내라는 투서가 들어왔다. 윤내현은 학교의 입장이 난처하면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지만, 당시 총장은 새로운 학설을 내놓는 것이 학자의 본분이라며 오히려 격려해주었다고 한다.<ref>《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 2003, p.227.</ref>
 
윤내현의 고조선 관련 연구 및 그의 대표적인 저서 《[[고조선 연구]]》는 [[북한]]의 [[역사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1963)를 표절했다는 비판을 받았다.<ref>이형구, 〈리지린과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비교〉, 《역사학보》 146호, 1995 / [[서영수 (1949년)]], 〈요동군의 설치와 전개〉 p22,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ref> 이형구의 증언에 따르면 84년 당시 학술세미나에서 윤내현은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와 유사하다는 지적이 있자, 자신이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등 북한 자료를 미국의 대학도서관에서 입수했음을 시인하면서도, 85년 11월 "주를 달면 자신의 학설이 무너진다" 는 말을 남기고 이미 지급된 연구비를 반납하고 자신의 글을 거두어 갔다. 한편 윤내현은 《한국고대사신론》에서 "필자는 민족사학자들의 견해를 수용 · 보완한 북한 학자들의 연구 업적과 그들이 발굴한 자료도 활용하게 될 것이지만 그것을 일일이 주기하지 않을 것이며 대표적인 문헌 몇 권만을 소개하는데 그칠 것이다. 이 점은 분단시대에 있어서 한국 역사학계가 겪고 있는 고통이므로 독자들의 이해 있기를 바란다."라고 언급했던 일이 있는데,<ref>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 일지사, 1986, p.14</ref> 이에 대해서 이형구는 "민족사학자들의 견해를 수용·보완한 북한 학자의 연구 업적과 발굴 자료를 많이 활용하면서도 이에 대한 설명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민족사학자들은 약간의 견해를 피력했을 뿐이지 리지린과 같은 본격적인 연구는 없었다. 또 분단시대의 한국 역사학계가 겪고 있는 고통 때문에 주기를 일일이 달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다른 학자들은 북한의 학술 성과를 주기로 소개한단 말인가? 그리고 역사학계만이 마치 그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여 일반 독자들의 눈을 가리고 있다. 분단상황은 민족 모두의 고통이지 역사학계만 안고 있는 고통이 아니다. 북한의 자료가 제대로 입수되지 못하고 또 입수하기 어려운 상황이 고통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입수하고 검토하여 활용한 자료를 유독 밝히지 않고 넘어가겠다는 것은 분단상황의 고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자신의 주장에 영향을 주고 참고로 삼은 타인의 연구 업적을 밝힐 용기가 없으면 글을 발표하지 않는 것이 바른 태도이다."라고 비판하였다.
한편 북한 학설을 인용했다는 이유로 용공학자로 비방당하고 정보기관의 조사를 받았다고 하며,<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81&aid=0002850292 비운의 역사학자 윤내현 서울신문 기사]</ref><ref>[https://shindonga.donga.com/Library/3/06/13/103001/5 신동아, 2003년12월호 기사]</ref><ref>윤내현,《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 2003, p.227. </ref> 반대로 독재정권에 발맞추어 도움을 준 것이라는 소문도 들었다고 한다.<ref>《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 2003, p.229.</ref> 또한 이러한 비판으로 인해 당시 재직하던 단국대학교에서 쫓아내라는 투서가 들어오기도 했으나 총장의 만류로 사직하지 않았다고 한다.<ref>《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 2003, p.227.</ref>
 
윤내현은 연구비 지원에 대해서 일체 외부기관으로부터 받은 사실이 없다며《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ref>,지식산업사, 2003, p.229.</ref>
 
"역대 어느 정부나 정권 또는 기관이나 집단에서 연구비나 행정지원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이런 비판에 대해 윤내현은 이러한 조치가 학자의 양심을 저해한 행위가 아니며 자신의 연구 결과에 따른 것이라 주장했으며<ref>「고조선의 강역」해석싸고 표절 논쟁 재연 경향신문 6면 생활/문화 기사(뉴스, 1986.04.23) 참조</ref> “나의 주장은 [[신채호]]·[[정인보]]·[[장도빈]] 등의 ‘민족사학자’들이 주장해왔던 기존 학설과 궤를 같이하고 있을 뿐 표절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라고 입장을 표명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6042300329206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4-23&officeId=00032&pageNo=6&printNo=12483&publishType=00020|제목=「古朝鮮(고조선)의 疆域(강역)」해석싸고 표절 論爭(논쟁) 재연|언어=한국어|성명=이용(李傭)기자|날짜=1986-04-23|출판사=경향신문(네이버)|확인날짜=2012-07-03}}</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539985|제목="고구려 태동 현도군과 관계없어"|언어=한국어|성명=김태식 기자|날짜=2007-02-06|출판사=연합뉴스(네이버)|확인날짜=2012-07-03}}</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1&aid=0000166612|제목=오후여담, 역사 vs 역사|언어=한국어|성명=김성호/객원논설위원|날짜=2006-10-04|출판사=문화일보(네이버)|확인날짜=2012-07-03}}</ref> 연구비와한편 관련된북한 비판에학설을 대해서도인용했다는 일체이유로 외부기관으로부터용공학자로 연구비를비방당하고 받은정보기관의 사실이조사를 없다고받았다는 주장했다주장도 있다.<ref>《우리[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81&aid=0002850292 고대사비운의 -역사학자 상상에서윤내현 현실로》,지식산업사,서울신문 2003, p기사]</ref><ref>[https://shindonga.229donga.com/Library/3/06/13/103001/5 신동아, 2003년12월호 기사]</ref>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