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제이 단다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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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말 가마쿠라 막부가 지배하던 당시 일본은 [[분에이]](文永) 8년([[1271년]]), [[고안 (1278년)|고안]](弘安) 4년([[1281년]])에 두 차례에 걸쳐 [[몽골의 일본원정|몽골의 침공]]을 겪었다. [[에이닌]](永仁) 원년([[1293년]]), 가마쿠라 막부 9대 [[싯켄]](執権)인 [[호조 사다토키]](北条貞時)가 [[호조 가네토키]](北条兼時) ・ [[나고시 도키이에]](名越時家)를 파견한 것이 진제이 단다이의 시초로, 그때까지 설치되어 있었던 [[진서봉행|진제이 부교]](鎮西奉行)나 진제이 단기죠(鎮西談議所)는 폐지된다.
 
에이닌 4년([[1296년]]), [[호조 사네마사|가나자와 사네마사]](北条金澤実政, 호조 사네마사)가 새로 진제이 단다이로 임명된 이래로 진제이 단다이는 1인체제로 바뀌었고, [[쇼안]](正安) 원년([[1299년]]), [[효조쇼]](評定衆) ・ [[히키쓰케슈]](引付衆)가 설치되어 소송에민사소송에 대한 재판권을 갖게 된다. 진제이 단다이가 문장(問状)이나 소문(召文)、소송 관계 등 [[고케닌]](御家人)에 대해 발급한 문서는 그 형식에서 진제이 어교서(鎮西御教書) ・ 진제이 하지장(鎮西下知状)<ref>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진제이 단다이가 발급했던 하지장(『歴史民俗用語辞典』). </ref> 등으로 불렸다. 또한 [[고려]]나 [[원나라|원]](元) 등 외국과의 교섭에 관한 권한까지 위임받기도 하였는데, 《속군서유종》에 수록된 《신편추가》 및 《신어식목》에는 [[쇼안]] 2년([[1300년]]) 가마쿠라 막부가 진제이 단다이 가나자와 사네마사에게 국서를 지참한 고려 및 원의 사신단이 일본에 왔을 때의 접대 장소 및 문답 방법을 지시한 내용의 문서가 수록되어 있다.<ref>장동익 《일본 고중세 고려자료 연구》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년, 340~342쪽.</ref>
 
[[겐코 (1331년)|겐코]](元弘) 3년([[1333년]]),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의 토막(討幕) 즉 가마쿠라 막부 타도 운동인 [[겐코의 난]](元弘の乱)이 벌어진다. [[규슈]](九州) 지역의 무사단들에게도 이러한 막부 타도에 가담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윤지(綸旨)가 전해졌다. 3월에 [[기쿠치 다케토키]](菊池武時)가 논쟁 끝에 단독 거병해 반란을 일으켰는데, [[쇼니 씨]](少弐氏)나 [[오토모 씨]](大友氏) 등 다른 무사단의 동조를 얻지는 못했으며 기쿠치 부자 등 200기(騎)는 괴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