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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촌 ===
[[파일:Shibayama Chiba.jpg|thumb|300px|시바야마정의 곡진전(2009년).]]
[[시모사 대지]]가 침식되어 만들어진 곡호(谷戸)에는 예로부터 [[곡진전]]이라는 습전(湿田)에서 농작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에도시대]] 부터 농업이 계속되어온 취락을 고촌(古村)이라고 했으며, 강력한 촌락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시바야마의 집락 대부분이 고촌이며, 나리타 쪽에도 [[톳코]]와 [[코마이노]]가 이에 해당했다.{{refnest|group=注|이후 대집행으로 주거를 수용당한 코이즈미 요네는 톳코지구 주민이지만 남편과 함께 이주해왔다.<ref>{{Cite web|url=https://kotobank.jp/word/%E5%A4%A7%E6%9C%A8+%E3%82%88%E3%81%AD-1640298|title=大木 よね|accessdate=2017-11-11|publisher=コトバンク}}</ref><ref>[[#石毛博道|朝日新聞成田支局(1998)]]46-47頁。</ref>}}<ref name="moyu172">[[#伊藤睦|伊藤睦(2017)]]172頁。</ref><ref name=":22">[[#大和田|大和田武士 鹿野幹夫(2010年)]]64頁。</ref>
 
코마이노에는 과거 시인 [[미즈노 요슈]]가 살면서 땅이 개간되는 모습을 노래한 [[단가]]를 짓기도 했다.<ref name="sanridukanoharu"/>
 
이 땅은 [[시모사국]]과 [[가즈사국]]의 [[분수령]]에 위치하고, 에도시대에는 [[천령]]의 [[대관]]이 관할하는 구역의 말단이었기에 강력한 통치권이 미치지 않았다. 그래서 권력에 반항적인 풍토가 축적되어 있었다고도 한다.<ref name=":16" /> 1914년 이미 [[농민조합]]이 조직된 시바야마정(당시는 [[치요다촌]]과 [[후타가와촌]]으로 나뉘어져 있었음)은 농촌의 계급지배에 관한 수많은 분쟁이 이루어졌으며, 치바현에서 [[농민운동]]이 가장 활발한 지역이었다.<ref>[[#大坪景章|大坪景章(1978年)]]50-51頁。</ref>。
 
=== 개척부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