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리즈카 투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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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6월 25일, [[나리타시립 산리즈카소학교]]에서 신공항설명회가 개최되어 후지쿠라 시장이 주민들에게 신공항 건설에 협조를 요청했다.<ref name="飯高春吉" /><ref name="広報なりた"/> 하지만 공항건설 용지 및 소음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리타시와 시바야마정은 공항건설 반대 일색이 되었다. 반대하는 지역주민들은 도미사토촌과 마찬가지로 정부와 대결할 것을 결의, 도미사토의 반대운동조직과 현지에 [[단결소옥]]을 짓고 상주하는 혁신정당 조직가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각 지역에서 반대운동단체를 조직했다.<ref name=":11" /><ref name="drum2627"/><ref name="moyu1617"/><ref name="飯高春吉"/> 「산리즈카 공항반대동맹」이 결성된 것은 신공항설명회에서 불과 3일 후인 1966년 6월 28일이었다.<ref name="広報なりた"/>
 
당시 전후 개척으로 정착한 농민들은 주택자금과 영농자금 상환이 끝나 이제 겨우 생활이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고{{refnest|group=注|1946년 정착한 개척농민들의 개척영농자금은 5년 유예 15년 상환이었다. 즉 20년이 지난 1996년은1966년은 비로소 농민들이 자립하게 된 해였다.<ref name="fukuda355867"/>}} 그간의 노고의 성과가 비로소 결실이 되는 시기를 맞고 있었다. 또한 식량이 부족한 도쿄에 농작물을 공급해 [[전후부흥]]을 그림자에서 지원했다는 자부심도 있었다.<ref name="story7278">[[#大和田|大和田武士 鹿野幹夫(2010年)]]72-78頁。</ref><ref>[[#石毛博道|朝日新聞成田支局(1998)]]20頁。</ref> 그런 자신들을 제물로 삼는 산리즈카 방안에 개척농민들의 자존감은 매우 손상되었다.<ref name="fukuda7071">[[#福田克彦|福田克彦(2001)]]70-71頁。</ref> 병역・개척・공항 순서대로 국가에 농락당해온 농민들은 “세 번째 빨간종이([[징집영장]])를 받았다”며 분개했다.<ref name="drum284"/> 이런 이유로 그들은 공항건설계획이 지금까지의 자신들의 인생과 노력을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정부측의 기대와 달리 매우 강하게 반발했다.{{refnest|group=注|이와야마지구의 한 농민은 운수정부차관 [[사토 분세이]]에게 “선생, [[지렁이]]를 아십니까? 저것이 살면서 흙을 키우는 데 43년이 걸립니다. 친자 2대에 걸친 일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인내는 대단한 것입니다. 정부는 그 부분을 알고도 나가라고 하는 겁니까”라고 호소했다. “나와 함께 흙도 지렁이도 대체지로 옮겨 주시겠습니까” 라는 요구를 사토가 받아들이자 그 농민은 이전을 결심했다. 그리고 이전에 반대하며 상주하고 있던 학생들에게 “나한테 소학생 손자가 있다. 그 손자가 학교에서 ‘치바현민의 적’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것을 들으니 충격이었다. 어째서 내 손자가 현민의 적이냐. 손자를 위해서라도 적이라는 말을 듣지 않는 땅으로 옮겨야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하마께 신천지에서 농업을 할 것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ref>[[#佐藤文生2|佐藤文生(1985年)]]120-122頁。</ref><ref>[[#福田克彦|福田克彦(2001)]]370頁。</ref>}}{{refnest|group=注|개항 이후 반대파와 비밀 협상을 벌이던 [[카토 코이치]]에게 반대파 농민이 “전후 개간된 토지는 척박했다. 그러니까 보상금을 실어주면 그냥 놓아주겠지 생각하나 본데, 오히려 반대다. 척박한 토지를 경작할 수 있게 만드느라 고생했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라고 말했다.<ref>[[#大和田|大和田武士 鹿野幹夫(2010年)]]111頁。</ref>}}
 
이외에도 고촌을 개발과 소음으로부터 지키려는 시바야마 주민, 황실 연고의 어료목장에 강한 애착을 가진 전전파(戦前派), 행정으로 추진된 히가시야마지구 영농개선계획(실크 콤비나트 계획){{refnest|group=注|1965년 [[토야마촌 ()|토야마촌]] 농가 180호가 협력해 뽕나무 재배를 실시하여 현지에 [[제사소]]가 진출할 계획이 세워졌다. 1965년에는 농업구조개선사업 인가를 받아 텐나루에 치잠(어린누에) 시설이, 텐진미네에 장잠(큰누에) 시설이 각각 마련되었다. 최소보장연봉과 노력제공에 따른 월급을 제시했기에 많은 개척농가가 여기 참여했는데, 산리즈카 방안이 발표된 직후인 1966년 6월 24일 일방적 통지에 의해 중단되었다.{{sfn|『三里塚の土に生きる』を刊行する会|2000|p=222}} }}에 따라 [[양잠]]용 [[뽕나무]] 재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것이 휴지조각이 되어 분개한 농가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반대운동에 합류했다.<ref name=":9" /><ref name=":20">[[#佐藤文生1|佐藤文生(1978年)]]48・59-62頁。</ref><ref name="fukuda">[[#福田克彦|福田克彦(2001)]]47-52・390-394頁。</ref><ref name="moyu170172">[[#伊藤睦|伊藤睦(2017)]]170-172頁。</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