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이집트 혁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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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루크 1세]] 폐위 및 유배
* 영국의 이집트 점령 종식
* 나세르 시대 개막
* [[아랍 냉전]] 시작
| 교전국1 = {{국기|이집트 왕국}} <br/ >
'''지원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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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국''' <br/ >
{{국기|소련}}<ref>Egypt as Recipient of Soviet Aid, 1955-1970 KAREL HOLBIK and EDWARD DRACHMAN Zeitschrift für die gesamte Staatswissenschaft / Journal of Institutional and Theoretical Economics Bd. 127, H. 1. (Januar 1971), pp. 137-165</ref><br/ >
| 지휘관1 = {{국기그림|이집트 왕국}} [[파루크 1세]]
| 지휘관2 = {{국기그림|이집트|1952}} [[무하마드 나기브]] <br/ >
{{국기그림|이집트|1952}} [[가말 압델 나세르]]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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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그림|이집트|1952}} [[압델 하킴 아메르]] <br/ >
{{국기그림|이집트|1952}} [[자카리아 모히에딘]] <br/ >
{{국기그림|이집트|1952}} [[후세인 엘 샤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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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이집트 혁명'''은 [[무하마드 나기브]], [[가말 압델 나세르]] 등 자유 장교단의 혁명이자 개혁적 쿠데타이다.
 
쿠데타 전 이집트 사회는 왕정이었으며, 귀족 제도가 존재하였다. 토지는 소수의 귀족, 지주의 수중에 있었고, 다수의 농민은 소작농이었다. 이집트는 1922년 2월 28일에 영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독립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대부분의 자본이 영국 대자본에 잠식된 상태였으며, 외교, 정치 영역에서는 영국의 공식적인 간섭을 받고 있었다. 여러 사실을 종합할 때 이집트는 영국의 식민지 상태에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낙후한 이집트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상과, 서구 제국주의로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진보적인 군 장교들과 하급 간부들은 자유 장교단을 조직하였고, 1952년에 쿠데타를 일으켜서 군주제와 귀족 제도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성립하였다. 또한 이집트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차단하였다.<ref>{{Cite저널 journal인용|last=Lahav|first=Pnina|author-link=Pnina Lahav|date=|title=The Suez Crisis of 1956 and its Aftermath: A Comparative Study of Constitutions, Use of Force, Diplomacy and International Relations|url=https://scholarship.law.bu.edu/cgi/viewcontent.cgi?article=1199&context=faculty_scholarship|journal=Boston University Law Review|volume=|pages=|via=}}</ref> 혁명 정부는 아랍 내셔널리즘과 반제국주의 의제를 채택하였다.
 
혁명 정부의 혁신적인 토지 개혁과 대규모 산업화 프로그램 및 사회주의 정책은 이집트를 10년 안에 산업 국가로 만들었다. 이 시기 이집트의 빈곤율과 빈부격차는 지속적으로 하락하였고, 전례없는 인프라 구축과 도시화를 경험하였다. 1960년대 아랍 사회주의 진영에서 이집트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을 포한한 수많은 아랍 민족 해방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한편, 미국, 영국, 프랑스, 벨기에, 이스라엘을 비롯한 서구 진영은 이집트를 적성 국가로 분류하였다. 이집트의 범아랍주의 정신은 1970년 이후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 정권이 출범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안와르 사다트 정권 출범 이후 이집트는 서구와 타협하기 시작했고 사실상 범아랍주의 진영에서 이탈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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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집트의 반영(反英) 감정이 고조되었다. 1919년 3월 이집트 인민은 대규모 봉기(1919년 이집트 혁명)를 일으켰다. 영국은 이집트 지배의 유화책으로서 1922년 2월 28일에 공식적으로 이집트의 독립 승인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순탄한 지배를 위한 것이었으며, 영국군은 그대로 이집트에 주둔한 상태였다. 게다가 대부분의 군사, 외교, 정치 영역에 있어서는 보호령 수준의 간섭을 하였으며, 이러한 간섭은 공식적인 것이었다.<ref>Jankowski, James. Egypt, A Short History. p. 112.</ref>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은 이집트의 군사와 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중단하였으나, 여전히 사회는 영국의 영향력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실질적으로 당시 이집트는 모든 면에서 영국에 의존된 상태였으며, 기업과 토지도 또한 영국인 지주와 주주의 손아귀에 있었다.<ref>Collins, Robert O.; Collins, Professor of History Robert O. (29 May 2008). ''A History of Modern Sudan.'' Cambridge University Press.</ref>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이집트 민족주의자의 영향력이 급증하던 시기였다. 1940년대 후반부터 이집트 반제국주의자에 의한 소규모 봉기가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1948년 제1차 중동 전쟁에서 팔레스타인 지원에 대한 이집트 왕정의 소극적인 태도는 이집트 민족주의자의 감정을 크게 격분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집트 왕정은 이집트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극심한 실업과 빈부격차, 빈곤을 해결할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이후 운동은 단순히 이집트 애국주의를 넘어서, “군주정 타도, 공화국 수립”이라는 구호가 등장하게 되었다. 1949년 이집트군 내에서 좌익 장교, 민족운동가, 일선 민간 관료들은 비밀리에 자유 장교단을 조직하였다. 자유 장교단 성립에서 가말 압델 나세르는 가장 열성적인 활동을 했고, 중요한 일을 맡았으나 형식적인 지도자로는 군대에서 상대적으로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무하마드 나기브를 임명하였다.
 
자유 장교단의 활동으로 인해 이집트군의 반영 의식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다. 특히 대(對)이스라엘 강경파인 군 장성 하이다르 파샤(Haidar Pasha)와 하리드 파샤(Harid Pasha)는 이집트 왕정에 의해 반란 혐의로 체포를 당했으나, 대중의 반발로 풀려나게 되었다. 여러 사건이 겹쳐질수록 이집트 대중의 반제국주의 의식은 성장하게 되었다.<ref>[https://www.cia.gov/library/readingroom/docs/CIA-RDP91T01172R000200280003-8.pdf CIA Office of Current Intelligence 20 July 1952]</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