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이집트 혁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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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영국군은 앵글로-이집트 전쟁을 통하여 이집트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1888년 콘스탄티노플 협약을 통해 영국은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군사 점령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령에서 일정한 수준의 독립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이 시기 이집트 국왕인 압바스 2세는 영국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고 그 결과 동맹국을 지원하였다. 승전한 영국은 패전국인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영토를 강제적으로 자국의 식민지로 편입하였다.<ref>Jankowski, James. Egypt, A Short History. p. 111.</ref>
 
이후 이집트의 반영(反英) 감정이 고조되었다. 1919년 3월 이집트 인민은 대규모 봉기(1919년 이집트 혁명)를 일으켰다. 영국은 이집트 지배의 유화책으로서 1922년 2월 28일에 공식적으로 이집트의 독립독립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순탄한 지배를 위한 것이었으며, 영국군은 그대로 이집트에 주둔한 상태였다. 게다가 대부분의 군사, 외교, 정치 영역에 있어서는 보호령 수준의 간섭을 하였으며, 이러한 간섭은 공식적인 것이었다.<ref>Jankowski, James. Egypt, A Short History. p. 112.</ref>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은 이집트의 군사와 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중단하였으나, 여전히 사회는 영국의 영향력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실질적으로 당시 이집트는 모든 면에서 영국에 의존된 상태였으며, 기업과 토지도 또한 영국인 지주와 주주의 손아귀에 있었다.<ref>Collins, Robert O.; Collins, Professor of History Robert O. (29 May 2008). ''A History of Modern Sudan.'' Cambridge University Press.</ref>
 
제2차 세계 대전 시기는 이집트 민족주의자의 영향력이 급증하던 때였다. 1940년대 후반부터 이집트 반제국주의자에 의한 소규모 봉기가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1948년 제1차 중동 전쟁에서 팔레스타인 지원에 대한 이집트 왕정의 소극적인 태도는 이집트 민족주의자의 감정을 크게 격분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집트 왕정은 이집트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극심한 실업과 빈부격차, 빈곤을 해결할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이후 운동은 단순히 이집트 애국주의를 넘어서, “군주정 타도, 공화국 수립”이라는 구호가 등장하게 되었다. 1949년 이집트군 내 좌익 장교를 주축으로 민족운동가, 일선 민간 관료들이 연합하여 비밀리에 ‘자유 장교단’이 조직되었다. 자유 장교단 성립에서 가말 압델 나세르는 가장 열성적인 활동을 했고, 중요한 일을 맡았으나 형식적인 지도자로는 군대에서 상대적으로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무하마드 나기브를 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