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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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미헨(Miechen)
|배우자 =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왕조 = 혼전: 메클렌부르크슈베린<br />혼후: [[로마노프|로마노프 왕가로마노프가]]
|아버지 =
|어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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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년]] [[독일]]의 대공국 중 하나인 메클렌부르크슈베린에서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와 대공비인 로이스-쾨스트리츠의 아우구스타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왕족과 약혼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제정 러시아]]의 대공인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으로부터 청혼을 받자 전 약혼자와의 약혼을 깨고 [[1847년]] [[4월 22일]] 블라디미르 대공과 결혼하였다.
 
대공의 아버지인 [[알렉산드르 2세]]는 신부가 친정의 종교인 [[루터파]]에서 황실의 종교인 [[러시아 정교회]]로의 개종을 거부하는 것을 이유로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결국 승낙하였다. 마리 대공비는 결혼 후에도 여전히 루터파 신앙을 유지했으나 후일 아들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로마노프|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이 유력한 황위계승자 후보가 되자 아들을 위하여 말년에 [[러시아 정교회]]로 결국 개종하였다.
 
동서이자 [[알렉산드르 3세]]의 황후였던 [[마리아 표도로브나 (1847년)|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후]]와는 경쟁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러시아 사교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런 연유로 마리 대공비는 ''대공비들 중 가장 강력한 대공비''(the grandest of the grand duchesses)라는 평판을 얻었다. 이러한 영향력은 [[알렉산드르 3세]]가 사망하고 [[니콜라이 2세]]가 즉위하여 황실의 안주인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1872년)|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로 바뀐 뒤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비사교적이었던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1872년)|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와의 관계는 소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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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출과 사망 ===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탈출하여 1917년에서 1918년 사이 [[코카서스]]에 정착하였으나, [[볼셰비키]]의 세력이 가까이 접근하자 [[1918년]] 고깃배를 타고 [[코카서스]]를 떠나 [[아나파]]에 도달하였다.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로마노프|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의 황위 계승을 고대하였던 마리 대공비는 러시아 영토를 벗어나기를 거부하였으나, [[1920년]] 결국 4남 안드레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과 그의 정부 마틸드 크셰신스카야, 둘의 아들 블라디미르와 함께 이탈리아 배를 타고 [[베네치아]]로 탈출하였다. 이후 대공비는 [[스위스]]를 거쳐 [[프랑스]]에 정착하였고, 같은 해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 자녀 ==
* 장남 알렉산드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 : 조졸
* 차남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로마노프|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
* 3남 보리스 블라디미로비치 대공
* 4남 안드레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